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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5. 07:39


    절경으로 이름 높은 괴산 화양동(華陽洞) 계곡에 들어서면 우선 만나보게 되는 것이 경천벽(擎天壁)과 운영담(雲影潭)이라 불리는 아래와 같은 기암괴석이다. 그리고 그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조선 중기 유학자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인근의 만동묘(萬東廟)를 마주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그의 손자이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배향한 사당이다. 그들의 사당이 왜 이곳 화양동 산자수명한 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화양서원의 배향자인 송시열로부터 찾을 수 있다. 만동묘는 그의 유훈으로 세워진 것이고, 이 화양 9곡 절경들의 이름은 그가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흉내 내 지은 것으로, 한 마디로 지독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몸부림이 배어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화양동 계곡이다.   


    화양구곡의 1곡인 경천벽


    화양구곡의 2곡인 운영담



    사실 이 화양동이란 이름 자체가 모화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중국, 즉 중화(中華)의 문화가 햇빛처럼 빛나며 복을 준다는 뜻이다.(中華一陽來福) 만동묘 역시 마찬가지이니 그 어원은 춘추시대 순자(荀子)의 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유래됐다. 본래는 물이 만 구비를 흘러 동해를 흘러간다는 자연 철리(哲理)의 표현이었겠으나, 이후 변형되어 절개를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변질되어 ‘중국의 힘과 영향력이 동쪽을 향해 보호하고 있다’는 극단적인 모화주의의 표현으로 사용되어진 것이다.


    중국 명나라 두 황제의 신위를 모신 이 만동묘의 위세는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가 있다는 당대의 민요 '승경가'에서도 알 수 있는데, 한말의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기 전) 이곳의 하마비(下馬碑)를 지나쳤다가 만동묘지기에 의해 말에서 끌어내려졌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의 수모는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그 계단의 가파름에 하인의 부축을 받았다가 발길질을 당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대명(大明) 황제의 신위를 모신 이 신성한 곳을 (하인의 부축에 힘입어) 감히 정면으로 오르려 하느냐는 일갈과 함께였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동묘의 문 앞 계단은 살벌하게 가팔아 계단을 오르자면 정말이지 코가 먼저 닿을 지경인데, 이렇게 만든 이유는 오르는 사람이 만동묘를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게(불경스러우므로 앞으로 똑바로 오르면 안 되고 게걸음처럼 옆으로만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동묘 입구



    입구의 가파른 계단과 계단 오르는 법(사진 출처 : 다음 블로그)



    이하응이 발길질을 당한 이유는 그 같은 대의를 위배했기 때문인데, 훗날 흥선대원군이 되어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의 위세를 얻은 그는 전국의 서원 중 가장 먼저 이곳 화양서원을 철폐시켰음에도 만동묘만큼은 어쩌지 못하고 그저 일체의 지원을 막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당시 흥선대원군이 자신을 발길질한 빈씨 성의 만동묘지기를 불러 지금도 나를 그렇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천자의 명이니 여전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대답을 들은 일화는 유명하다)



    만동묘의 유래가 적힌 만동묘정비 



    이 ‘만동필절’의 위력은 화양동 계곡의 이른바 5곡인 첨성대(瞻星臺)와 6곡인 능운대(凌雲臺)에서 다시 빛난다. 계곡에 우뚝 솟은 이 절경의 바위에는 선조 임금의 글씨라는 만동필절의 4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알다시피 선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인조와 함께 역대 임금 중의 내로라하는 찌질이로 임진왜란 중에는 제 나라를 버리고 홀로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던 바로 그자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온, 지금으로 보자면 6급 정도의 중국 공무원에게도 머리를 조아렸는데, 까닭에 중국사신으로 다녀온 민정중이란 자가 명나라 숭정황제(의종)의 글을 얻어 와 새겼다는 ‘비례부동(非禮不動)’과, 그것을 예찬해 송시열이 직접 썼다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의 것이요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황제의 것이다)’의 글씨는 조선의 법도보다도 더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선조의 글씨라는 증거는 불분명하나 ‘만절필동’이 선조가 중국에 보낸 ‘피무변명주(被誣辨明奏)’에 포함된 문장, 즉 ‘일편단심 명 황제를 향한 정성은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惟其一心拱北之誠, 有似萬折必東之水)’고 한 글의 내용인 것만은 분명하다.


     


    화양동 첨성대와 능운대


    문제의 '만절필동'


    '비례부동'의 각자(옆에 숭정황제의 글씨라는 각자도 보인다)


     송시열의 '대명천지 숭정일월'의 글씨



    그리하여 이 같은 글씨들은 회양서원의 유생들이 발행한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에 새겨 넣어지고 이것은 ‘암행어사 출두요~’ 할 때의 마패보다도 더 한 위력을 발휘하였으니(실제로 마패는 역참의 말들을 빌릴 때 사용한 것이지만) 관리와 백성들을 불문하고 수탈과 횡포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그 같은 묵패는 수탈과 횡포의 수단만으로 활용지는 않았으니, 언제든 수틀릴 때는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으며 때로는 생사여탈권을 쥔 무소불위의 권력 그 자체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기록된 묵패의 위력,(사진 출저: KBS) 


      

    지금은 믿어지지 않지만 그대는 정말로 그런 때였다. 그런데 당시는 명나라가 망한 때였다.(따라서 마지막 황제 의종의 제사를 우리 조선이 모셨다) 그럼에도 명나라 숭배는 지속되었으니, 태조 이성계 때부터 이어온 지난 250여년 동안의 뿌리 깊은 모화사상이 뼈 속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도 무리라 할 수 없는 것이 북한 정권의 2대에 걸친 주체사상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신격화를 이끌어내었는데, 그것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년에 불과하다. 그 짧은 시간에도 저들의 주체사상이 북한 인민들의 뼈 속 깊이 각인될 수 있었던 걸 보면 다른 비교 학문 없이 오로지 유학만을 최고 지성과 덕성으로 연마해온 조선에 있어서는 그것이 이상한 일도 못 되 터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존명(尊明)의 모화사상은 민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아래와 같은 비석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유명 조선국'이란 명나라에 속한 조선국이란 뜻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Sonsang4님의 블로그)


    '삼전도 비'를 쓴 이경석의 묘비. 영의정 이경석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어쩔 수 없이 삼전도 비를 써야 했기에 '유명 조선국'이란 글자가 이해는 되지만 민간에서도 '유명 조선국'은 유행하였다. 당대의 청백리 이경석의 묘소는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있으며, 그곳에서는 박세당이 비문을 짓고 이광사가 글씨를 쓴 1754년의 신도비와 1975년에 개수한 두 개의 신도비를 볼 수 있다. 


    삼전도 비(대청황제공덕비). 이 비석은 인조가 항복한 한강 삼전 나루 인근에 세워졌으나 이후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다 지금은 롯데월드 옆 석촌호수가에 안착됐는데, 나름 삼전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이여징이 새겼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존명 사상은 어쩔 수 없이 존청(尊淸) 사상으로 바뀌었고, 이후 250년 간 사대의 대상은 청나라가 되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해 조선 초에 세워진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은 이제 청나라 사신을 맞는 장소로 바뀌었다. 이렇듯 대상이 바뀌었다 뿐 달라진 것은 없었으니, 이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선의 지배사상으로 군림한 주자 성리학의 뿌리 깊은 중화 우월주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중화(小中華)를 표방하고 나섰던 바, 아무리 중국의 유교사상을 국시로 택하고 주자 성리학에 젖어 철학까지 지배당했다 할지라도 정말로 생각 있는 선비들이 있었다면 그러한 소중화로서 대중화(大中華)에 끌려가다 나라까지 망하는 그런 비극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니 윤증, 허목, 윤휴, 박세당 같은 선비는 주자 성리학에 좌우되지 않은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경전해석을 내놓았다. 특히 백호(白湖) 윤휴(1617~1680)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맹(孔孟: 공자와 맹자)이 살아 돌아오다면 틀림없이 나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옳다 할 것이다"며 주자 성리학을 비판했으나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 유학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다. 그는 죽으면서 마지막 말을 글로 남기려 했으나 송시열에 의해 거부당했고, 이에 "뜻이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하는 말을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그 윤휴를 죽인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공자는 '춘추'를 지어 천하 후세에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밝히심에, 무릇 혈기가 있는 무리는 모두 마땅히 ‘중국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미워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오직 우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명태조 주원장)와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 태조 이성계)께서는 같은 때에 창업하고 곧 군신의 의를 맺었으니, 소국을 사랑하는 은혜와 대국에 충성하는 절개가 거의 300년간 바뀌지 않았다.” 즉 그의 말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이야 말로 우리의 길이다'라는 것이었다. 



    화양구곡의 4곡 금사담 위의 암서재. 


    송시열의 독서당인 암서재에서 앉으면 만동필절을 새긴 첨성대가 정면으로 보인다.(사진 출처: 경북일보)



    그런데 지난 2017년 12월 5일, 이 ‘만절필동'의 망령이 300년 만에 되살아났다. 대한민국의 주중(駐中) 대사인 노영민은 그날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열린 신임장 제정식에서 자신의 신임장을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에게 전달한 후 방명록에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라고 쓴 것이었다. 그리고 한글로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뒤로하고 한중관계의 밝은 미래를 함께 열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는 이 말을 쓰기 위해 꽤 준비를 한 듯 간자체로 정갈히 쓰고 그 취지까지 덧붙였는데, 이후  ‘만절필동'의 글이 문제가 되자 자신의 취지는 '사필귀정'의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노영민 대사의 방명록 글.(사진 출처: YTN 뉴스)



    그의 행동이 과연 옳았는지, 그리고 그 해명이 믿을만한지는 이 글을 읽는 분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겠다. 다만 한마디를 하자면 이런 식으로는 앞에서 말한 '황제국의 나라 중국, 속국의 나라 한국'이라는 그 뿌리 깊은 인식을 바꿀 수 없다. 그같은 중국인의 인식에 대해서는 비단 조상 탓만을 할 수 없는 것이니 이런 식의 행동들이 계속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우리를 얕잡아보게 만드는 구실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앞에서 분개했던 대통령 수행기자에 대한 중국 경호원들의 집행 폭행도 바로 이 같이 면면히 이어 온 우리의 저자세 굴욕 외교의 산물이다. 이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실리 외교라고.....? 과연 우리는 중국에게서 어떤 실리를 취했길래 국빈방문한 대통령의 수행기자와 청와대 직원들이 중국 경호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야 하며, 그러고도 아무 말도 못하고 지나가야 하는가? 지난 대통령의 국빈방문 때의 중국 측의 무례에 대해서는 그외에도 정말로 할 말이 많지만 해봐야 나만 스트레스 받을 터, 그저 내가 좋아하는 독일의 작가의 말로 이 글을 끝낼까 한다. "굴종할 자세가 돼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폭군이 군림한다." -게오르그 루카치-

     

     

      * 그림 및 사진의 출저:   Daum 블로그, Naver 까페,  Google kr,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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