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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 최후의 날(IV) - 순종황제의 국토순행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1. 23:40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이어 황태자 이척(李坧)이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즉위부터가 일제에 의한 것이었으니 꼭두각시 신세를 면할 수 없었는데, 그는 즉위 후 이토 히로부미가 하라는대로 전국을 순행하며 황제의 얼굴을 백성들에게 디밀었다. 황실이 일제에 의해 핍박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동요하는 백성들을 진무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쇼였다. 아무튼 대항할 힘이 없었던 순종은 1909년 1월 4일, 아래와 같은 조칙을 발표하고 지방 순행길에 오른다.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어찌 한시인들 모른 체하고 나 혼자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단연 분발하고 확고하게 결단하여 새해부터 우선 여러 유사(有司)들을 인솔하고 직접 국내를 순시하면서 지방의 형편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 한다. 짐의 태자태사(太子太師)이며 통감인 공작(公爵) 이또 히로부미를 이번 짐의 행차에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하노니, 짐의 지방 순행에서의 일을 도와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하고 편하게 하여 난국을 빨리 수습해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노라. <순조실록> 












    일산(日傘) 아래의 망토 두른 이가 순종, 그 왼쪽이 이토 히로부미, 그 왼쪽이 이완용이다. 사진의 출처는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으로 동행했던 일본인 사진사가 찍은 사진 중의 일부이다.


    그에 앞서 순종은 남도 순행길에 나서 1월 7~8일 대구를 방문했다. 2017년 대구시가 이를 기념해 달성공원 앞 길을 '순종어가길'로 명명하고 동상을 세웠는데.....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가 없을 수 없었을 터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 짓을 벌인 것은 1870년대 메이지 일왕의 일본열도 순행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당시 일왕은 메이지 유신 후 혼란했던 민심을 진무하기 위한 전국 순행으로써 백성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신(神)의 강림에 열광했던 일본과 달리 조선의 백성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역으로 반일 감정만 부추켜져 태극기와 일장기를 같이 게양하지 말자는 전국적인 운동까지 일었다. 황제의 순행은 황실이 일제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홍보한 셈이었다.


    이에 아이디어를 낸 이토의 체면은 구겨지게 되었고, 한일 양국의 비난 여론에 궁지에 몰린 그는 스스로 통감직을 물러나 일본 천황의 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장으로 물러나 앉았다. 조선 병합의 진도가 느린 데 대한 겐요샤(玄洋社)나 고쿠류가이(黑龍會) 같은 극우단체의 성토 및 우치다 료헤이,  스기야마 시게마루 같은 낭인 집단 대표들의 비난도 한몫을 했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빨리 조선을 병합하라는 것이었고, 이에 상대적으로 이토는 조선의 병합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도 주장하는 바가, 이토는 조선 합병을 원치 않았고 보호국으로 두려 했으나 그가 안중근 의사에 피살됨으로써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로, 조선 통감 이토는 1907년 4월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에게 아래와 같은 전보를 쳤다.


    조선의 정세가 지금처럼 나아간다면 해가 바뀜에 따라 에넥센이션(annexation)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빨리 일본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 미리 러시아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


    본토 외무부에 대한 조선 합병 공작에의 재촉 지시였다. 앞서 언급했던 이토의 전기 이토 히로부미전(伊藤博文傳)에는 그의 의중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1909년 4월 1일 양상(兩相, 가쓰라 수상과 고무라 외무대신)은 병합에 관하여 서로 협의하고 당시 추밀원 의장의 관사에 있던 공(公, 이토 히로부미)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의 현 상황에 비추어 장래를 내다볼 때 한국을 병합하는 것 이외에 다른 계책이 없다는 사유를 설명했다. 처음에 양상은 공이 당연히 반대를 주장할 것을 예상했으나..... 공은 병합에 이론(異論)이 없음을 밝혔다. 양상은 크게 기뻐하며 병합의 의견을 제시하고 협의했다. 공은 이것을 모두 받아들였는데, 다만 이로 인해 중대한 외교문제가 야기되지 않도록 사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음을 주지시켰다.


    여기서 '에넥세이션'(annexation)은 '합방', '병합'을 의미하는 말로서, 일본의 공식 용어 '합병'(合倂)은 1910년 일본 외무부 정무국장 구라치 데츠키츠(倉知鐵吉)가 만들어낸 글자임을 밝힌 바 있다.(☞ '대한제국 최후의 날 III')* 이토는 이 '에넥세이션'의 승인과 만주 분할을 위해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하얼빈에 갔다 피살된 것이었다. 조선에의 합병을 재촉하다 자신의 목숨을 재촉한 꼴이 된 셈이었다.


    * 우리나라의 공식 용어는 '병탄'(倂呑)으로, '남의 재물이나 영토, 주권 따위를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이토가 조선의 병합을 서두르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 1907년 7월에 일어난 헤이그 밀사 사건이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극비리에 보내온 초청장을 가지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 회의장에 고종황제의 밀사가 잠입하려던 사건! 그 밀사의 임무는 당연히 일제의 조선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세계 만방에 알리는 것이었을 터였다. 이에 깜짝 놀란 이토는 핑계김에 고종을 폐위시키고 만만한 순종을 제위에 올린 것인데, 애석하게도 결과를 보지 못하고 뒈지고 만 것이었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헤이그 비덴호프(국회의사당)

    1899년 1차 회의에는 26개국이 모였고, 1907년에는 44개국이 모여 군비축소와 국제평화 유지를 협의했다. 


    당시의 회의장 광경

    고종황제는 밀사를 파견, 이 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대표의 결사적 방해로 인해 밀사들은 끝내 회의장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다룬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현지에서 발행된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nference)>에 특사에 관한 기사가 실리며 그들의 목적이 언급됐으나 다만 거기까지였다. 


     

    이준 열사 동상

    특사로 갔던 이준(전 평리원 검사)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현지에서 분사(憤死)했다. 그의 유해는 헤이그 공원 묘지에 묻혔으나 1963년 국내로 들여와 안장됐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순종은 이토의 가족들에게 위로금을 보내고 자못 비탄의 호들갑을 떨었지만, 조선에서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마도 그였을는지도 모른다. 대한제국 황실을 무던히도 못살게 굴던 이토였던 바, 이제 한 시름 돌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전혀 기대 밖이었으니 늑대를 피하려다 범을 만난 꼴이랄까, 새로운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군바리 출신답게 일사천리로 합병을 몰아부쳤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 이토는 통감을 사임하고 2대 통감으로서 부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를 세운 후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서 조선 합병을 추진하다 피살된다. 소네에 이어 3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육군 대장 출신의 무식하기 한량없는 자로서, 영국 <데일리메일>의 기자 프레데릭 매켄지(☞ '대한제국 최후의 날 II')는 그에 대해 '이토는 채찍으로 사람을 쳤지만 데라우치는 쇠사슬로 사람을 칠 사람'이라는 예리한 하마평을 담았다.


    앞서 말한대로 조선의 5백년 왕업은 1910년 8월 22일 남산 왜성대 통감청사에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최종적으로 황제가 이를 승인한 칙유(勅諭) 문서의 공표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데라우치는 그날 이후 집회금지령을 내려 분위기만 단속했을 뿐 합병에 관한 황제의 칙령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순종의 완강한 거부에 부딪힌 것이었다.


    그 증거가 지난 2010년 도쿄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에 보관돼 있는 한일병합 문서 중 일본국왕의 합병 칙유 문서에는 목인(睦仁, 메이지 일왕의 본명 무쓰히토)이라는 서명이 되어 있고 국새(天皇御璽·천황어새) 또한 확실히 날인돼 있었으나, 대한제국황제의 칙유에는 황제의 서명도 국새의 날인도 없었다. 대한제국의 병합조약 문건은 이처럼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던 바, 한일병합 조약은 국제법상 효력이 발휘될 수 없는 조약임을 말해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병합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음 또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조약 당사자의 서명 날인이 없는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이다)



    왼쪽 대한제국의 칙유 문서에는 순종의 이름 서명이 빠져 있고 국새가 아닌 행정어새(내부 행정용 도장)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찍혀 있다. (2010년 8월 11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공개한 문서이다) 


     

    게다가 이 한일 양문서의 필적은 같은 사람의 글씨로 판명되었던 바, 통감부 관계자가 이 문서를 작성한 후 일본 것은 일본국왕에게서 서명 날인은 받았으나 대한제국의 것은 끝내 황제의 서명 날인을 이끌어내지 못한 정황까지도 짐작케 해준다.(책장의 접힌 부분인 판심에서도 '통감부'라는 인쇄 글자가 드러나 이 문서가 통감부에서 만들어진 것임이 증명된다)


    이같은 짐작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서류 또한 2010년에 발견되었다. 아래의 서류는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위임장의 승인을 요청한 조회 자료로, 조회 일자가 한일병합늑약을 조인한 1910년 8월22일이라는 점과 상단에 '무척 급한 문서(至急)'라는 도장이 찍힌 점으로 미뤄 순종황제가 이완용 임명 승인을 마지막까지 저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혹은 순종황제의 후가 되시는 순정효황후의 저항일 수 있다. ☞ '대한제국 최후의 날 III')


    910년 8월29일 이완용이 통감 데라우치에게 순종 황제의 통치권 양여에 관한 칙유안을 빨리 승인해달라고 요청한 조회 문서. 급한 용무라는 뜻의 ‘지급’이란 빨간 글자가 찍혀 있다. 황제의 조약 거부로 다급해진 일제와 이완용이 일방적으로 조약 절차를 추진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료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27570.html#csidxe198da0a1e2acb38361fad3073054d7


    이완용 전권대사 임명 승인 조회비(사진 출처: 연합뉴스)

     

    "한국황제께옵서 누차 배신행위를 감행하사"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협약한 비밀문서 '한일협약의 약정을 요구한 기밀통비발'로, "한국 황제 폐하께옵서 누차 배신행위를 감행하사" 등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적대감이 노출된 문장이 포함돼 있다.(오른쪽) 이 문장은 나중에 종이를 덧대어 고쳐졌다.(왼쪽) 순종이 조인에 애를 먹였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출처: 연합뉴스)



    추론하자면 순종은 이완용이 내미는 칙유 문서에의 서명 날인을 끝까지 거부했고, 이에 똥줄이 탄 이완용이 순종이 감춘 국새를 대신해 내부 행정용 도장인 행정어새를 찍어 통감부로 가져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서류들은 한일병합이 순종황제의 승인을 거쳐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그간의 일본 측 주장을 뒤엎는 결과이기도 하다.(이에 2010년 5월에는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이 서울과 도쿄에서 '1910년에 체결된 한일병합 조약은 무효'라는 성명을 동시에 발표하기도 했다)


    ※ 참고로 국새와 행정어새는 이렇게 다르다.



    국새 대한지보(大韓之寶)가 찍힌 순종의 날인 문서.

    흔히 옥새(玉璽)라 부르는 이 어보는 구 총무처가 한국전쟁 중 분실했다.


    순종 칙유 문서에 찍힌 행정어새 칙령지보(勅命之寶).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대한제국 최후의 날(V) - 순종황제의 마지막 저항'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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