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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I) - 남대문 전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20. 00:16
앞서 '대한제국 최후의 날 I'에서 언급했듯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잃어버린다.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통감부의 지배를 받았던 바, 조선의 국권은 1905년 망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 1907년(융희 원년) 7월에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통감부의 통치가 합법화되었고, 이어 8월 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나는 1907년 8월 1일을 실제적으로 대한제국의 호흡기가 뽑힌 날이라고 보고 있다.
그 전날, 주한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창덕궁의 순종 황제를 겁박해 군대해산조칙서의 사인을 받아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그 조칙에 의거, 무기를 무기고에 반납한 후 훈련원(을지로 훈련원 공원과 국립의료원 일대) 광장에 모여야 했는데, 그에 앞선 오전 7시 각 연대의 대대장들이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인 대관정(현 한국은행 본관 뒤 부영호텔 공사현장)에 먼저 소집돼 순종 황제의 명의로 된 군대해산조칙서의 낭독을 들어야 했다.
"짐이 생각컨데 국사다난한 때를 당하여 극히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지업에 응용함이 금일의 급무라. 현재 군대는 용병으로 조성한 까닭으로 상하가 일치하여 국가를 완전히 방위하기에 충분치 아니할새, 짐은 지금부터 군제 쇄신을 꾀하여 사관 양성에 전력하고 나중에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코자 함으로 짐이 이에 유사에 명하여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를 선택하고 기타는 일시 해대케하노라....."
그들 대대장에게 군대해산명령을 먼저 하달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하 부대원들을 각각 해산시키도록 하려는 것이 일제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때 일제는 그 자리에 모인 대대장들은 구조조정 없이 직업과 신분을 유지하며 은사금까지 하사한다는 당근책을 함께 준비했다. 큰 소동 없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체시키려는 일제의 교활한 술수였다.(사병들에게도 약간의 은사금이 준비되었으니, 하사관은 80원, 1년 이상 근무 사병은 50원, 1년 미만은 25원씩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훈련원에 모인 군인들은 아직 뭔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상부로부터 전달받은 명령은 전군 체조가 있으니 무기를 반납하고 오전 10시까지 맨손으로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공교롭게 비가 내렸던 바, 일기에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어수선해질 즈음 각 대대장에 의해 해산령이 전달되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대한제국 서울 시위대 2개 연대와 지방 진위대 8개 대대가 모두 해산되며 황궁호위대 1개 대대만이 일본군에 복속돼 유지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황궁호위대는 '조선보병대'라는 이름으로 1931년까지 존속하다 해산된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또 다른 비보가 들려왔다. 대한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소령)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날 아침 그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일제의 소집에 응하지 않고 중대장 김재흡을 대신 보냈는데, 김재흡으로부터 해체 소식을 들은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쓴 후 지니고 있던 권총으로 자신을 머리를 쏘았다.
"나 박승환은 국은을 입은 지 몇 해나 되었으나 나라가 망해도 왜놈 하나 참하지 못했으니 만번을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다. 그런 내가 너희들에게 해산하라는 말을 어찌 전하랴. 차라리 죽음으로써 사죄하리라. 대한제국 만세!"
박승환의 자살 소식과 함께 유서도 공개되었다. 그러자 제1대대 박승환 휘하의 군인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일제가 1차 해산 대상으로 삼은 인원은 3,441명이었으나 일기 탓으로 모인 인원은 200여 명에 불과했는데, 그중 제 1대대 소속 100여 명이 해산에 불응하고 서소문 시위대 영내로 들어가 일제가 봉인한 무기고를 뜯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군 51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중대장 남상덕 참위가 지휘하는 대한제국군은 제2연대 제1대대가 합세하며 한때 우세한 전력 속에 대치했으나 일본군 기관총 부대가 증파되며 판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날 대한제국 시위대는 호치키스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 3개 대대와 맞서 시가전을 벌였고, 특히 숭례문 위에 진을 친 일본군과의 전투가 치열히 전개되며 일대는 피바다를 이루었다.(이날의 전투가 남대문 전투라 불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대한제국군은 급격이 개전(開戰)하는 바람에 탄약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던 바, 총알이 바닥나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백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정오 무렵에 이르러 장교 13명을 비롯한 68명 사망, 100여 명 부상이라는 참패에 가까운 결과를 내고 서소문 밖으로 물러나게 되었다.(포로는 516명이었다)
도망간 시위대는 대부분 지방으로 가 대한제국의 지방군인 진위대와 합세했고, 이후 양평, 원주, 여주, 수원, 강화, 홍주, 대구, 안동, 진주 등 전국에서 의병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아래의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의 프레더릭 아더 매켄지(F. A. Mckenzie)가 전국의 의병을 찾아 나선 끝에 1907년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조우한 의병들을 촬영한 것으로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사진이다. 이중 가운데 군복을 입은 사람은 필시 남대문 전투에 참가했던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양평의 의병들을 지휘했을 것이다.
지방으로 간 대한제국 군인들은 지방 의병들을 조직했고, 이듬해 2월 왕산(旺山) 허위가 이끄는 전국 13도 의병이 서울로 진격한다. 이 뜻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음 회에 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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