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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전쟁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19. 12. 29. 00:00

     

    <조선폭도토벌지>는 일제의 의병 탄압 기록물이다. 1913년 일본 조선주차군사령부에 의해 발행된 이 책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항일의병의 발생 원인, 교전 상황, 탄압 작전이 망라돼 담겨 있다.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위 기간 동안 일본군과 의병과의 전투는 2,852회를 넘었고 의병의 숫자는 141,815명에 달했다. 우리는 흔히 이 의병들의 궐기를 '한말의 의병운동'이라 부르나 이쯤 되면 '의병전쟁'이라 부르는 게 맞을 듯하다. 아울러 이 책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의병은 일제에게 충분히 공포스러웠고 위협적이었으며, 또한 결사적이었다.

     

     

    조선주둔군사령부가 발간한 <조선폭도토벌지>/ 아래 매켄지의 책과 함께 조선 의병 활동을 고찰할 수 있는 책으로, 일제의 1급 비밀문서였다가 해방 후 의병연구 학자들에 의해 내용이 공개됐다.
    프레데릭 매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  /  더불어 그는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을 발간해 일제의 만행과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상에 알렸다.

     

     <조선폭도토벌지>에 의거한 아래의 표를 보면 의병의 본격적인 활동은 1907년 군대해산이 체결되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첫 총성은 앞서 말한 남대문 전투가 될 것이다. 표에서 보이듯 의병활동은 이듬해인 1908년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헌병이나 경찰보다는 일본 정규군과의 교전이 대종을 이룬다. 의병의 사상자 수 역시 교전 횟수에 비례한다.

     

     

     

     

    아래 막대그래프는 사상자의 통계를 나타낸 것으로 왼쪽 표는 일본인 사망자를, 오른쪽 표는 의병의 사망자 및 포로가 표시됐다. 사상자가 가장 많은 해는 역시 1908년이다.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인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의병 사상자로,(일본인 411명 : 의병 23,624) 무려 58배에 달한다. 물론 의병 사상자 수에는 포로의 숫자도 포함돼 있지만, 사실 부상자나 포로수는 많지 않고 대부분이 전사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얼핏 의병이 일본군의 상대가 안 됐던 듯 여겨지지만 실상은 다르다. 일제는 의병 토벌 작전 중에 사살한 민간인도 모두 통계에 넣었던 바, <조선폭도토벌지>에 기록된 진상은 아래 글과 같다.

     

     

     

     

    메이지 39년(1906) 3월에서부터 메이지 44년(1911) 6월에 이르는 기간 우리 토벌대(수비대 헌병 경찰)의 손상은 전사자 136명, 부상자 277명이고 토벌행동에 기인한 우리 병사자(病死者) 등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폭도의 손상은 전사자 17,779명, 부상자 3,706명, 포로 2,139명을 냈고, 기타 검거에 의하거나 또는 자수 귀순한 폭도의 수도 현저하게 많거니와, 만약 일본인과 조선인 양민들의 손해를 따지자면 그것은 극히 어마어마하다. 재(在)조선 일본인이 폭도에 의해 학살된 수는 토벌대 전사자 수의 몇 배나 되고, 조선인 양민의 피해는 그 정확한 수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아마도 일본인 양민 손해의 몇십 배가 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무튼 위 표의 내용처럼 의병 활동은 군대 해산 이듬해인 1908년 최고조에 이르는 바, 해산된 대한제국군대의 조직과 무기가 의병활동을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절정은 1908년 1월에 벌어진 13도 창의군(十三道 倡義軍)의 서울 진격전이다. 전국 48개 의병조직의 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망우리에 집결한 후 서울의 통감부를 향해 진격했다. 총대장은 이인영(李麟榮)이었고 부대장은 군사장 직함의 허위(許蔿)였다. 이중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13도 창의군은 1월 13일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지금의 청량리역 부근에서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았고, 이때 의병장 김규식과 연기우가 총상을 당해 부득이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망우리 고개로 후퇴한 13도 창의군은 1월 25일, 뒤늦게 당도한 2,000명의 의병과 함께 2차 공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을 부음을 받고 급작스레 귀향하게 되는 바, 허위는 이인영을 대신해 연합의병부대의 총대장이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2차 공격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총대장 이인영이 통문을 돌려 서울 진격전을 연기시켰다는 설과 일본군의 반격에 후퇴했다는 설이 겹친다. 이후 허위는 본래의 거점인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가 박종한, 김수민, 김응두, 이은찬 등의 의병장과 함께 임진강 의병 연합부대를 결성해 게릴라 작전을 벌인다. 

     

    허위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에도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의 밀지를 받고 자진해산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관직에 머물며 1904년에는 오늘날의 대법원장 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이 당시 공명정대한 판결로 인망이 높았었다. 이후 1904년 친일 단체 일진회에 대항하는 정우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일제의 탄압을 받고 법복을 벗게 되는데, 이후 1905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낙향해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 같은 전력을 알고 있던 일제는 허위를 체포하는 데 진력하였으니, 1908년 6월 지방 의병 결속을 위해 경기도 양평에 내려왔던 허위를 유동(柳洞) 계곡에서 붙잡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21일 오전 10시, 허위는 결국 수감돼 있던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 사형장에서 처형되니,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내내 의연하고 당당했으므로 죄를 심문하는 취조관마저도 허위의 의연한 모습에 감동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존대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와 노령(露領)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나 거의가 거룩한 희생을 맞았는데, 2007년 그의 손자인 허 게오르기와 허 블라디슬라브가 특별귀화의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하며 관심을 받았었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 살게 된 허위의 후손들이었으니 그야말로 살아 있는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허위의 후손을 만난 이낙연 총리 / 이낙연 총리 왼쪽이 허 블라디슬라브, 오른쪽이 허 게오르기. 2019년 7월 18일 키르키즈스탄에서 찍은 사진이다.

     

    의병장 허위 체포에 관한 문서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자료
    허위의 유서 / 교수형을 언도받고 쓴 유서로,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국권도 회복하지 못한, 효도도 충성도 못한 몸이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라는 비분강개를 담았다.

     

    허위는 목표한 흥인지문을 넘지 못했지만,

     

    청량리까지 진출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청량리에서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왕산로는 허위의 호 왕산(旺山)을 따 명명한 길이다.

     

    전투 추정 장소

    청량리에서 흥인지문 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에서 교전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망우리 의병 출발지에 건립된 '13도 창의군 탑'

     

    '13도 창의군 탑' 조각품

     

     

    '13도 창의군 탑' 안내문

     

     

    그 외에도 청주 오근장 일원에서 일본 헌병대위 시마자키(島崎善治)를 저격해 사살한 후 세금 수송대를 습격해 탈취한 충청도의 의병부대나,(끝내 잡지 못해 의병장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폭도들의 첩보술과 경계술 등의 전술이 토벌대를 우롱할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고 한 그 의병부대를 지휘한 청주 출신 의병장 한봉수, 포수 출신인 까닭에 일본군이 가장 무서웠했다는 경상도의 평민 의병장 신돌석, 이름난 들어도 치를 떨었다는 제천 출신 의병장 박여성(朴汝成) 등은 <조선폭도토벌지>에 등장하는 이름난 의병들인데, 아래의 사진은 그 책에도 등장하지 않는 전라도의 의병장들이다. <조선폭도토벌지>에 "임진왜란 때의 승전을 생각해 도무지 일본군을 두려워 하지 않고 덤빈다"고 기록됐던 바로 그 호남 의병들일지도 모르겠다. 

     

     

    히로시마 대학 히구미 교수가 공개한 전라도 의병장 사진. 1909년에 체포된 의병장들이라는 설명 뒤에 개개인의 이름이 열거돼 있다.(사진 제공: 전라남도 이순신 연구소) 

     

     

    아름다운 의병 고애신(사진 출처: 웃짤 닷컴) 

     

     

    이 여자 의병장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듯.(물론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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