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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신정변의 뒤안길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2. 27. 23:57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한말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차별당한 구식군대(훈련도감 등)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왕후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를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옹립한 사건이 1882년 임오년(고종 19) 6월 9일(음력)에 일어난 임오군란이다. 하지만 이들 구식군대들은 고종이 불러들인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척살되고 흥선대원군은 중국 천진(天津)으로 압송되니 쿠데타는 3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고종은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자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 일에, 그것도 국가 간의 일에 공짜가 어디 있으랴? 고종은 곧 청나라가 내민 가혹한 청구서를 받아들어야 했다. 청구서에는 조선의 국왕과 청군을 파견시킨 북양대신이 동급으로 취급됐고,(500년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청국 상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통상 특권이 주어졌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조규를 통해서였다.(☞ '오욕의 땅 이태원 - 임오군란과 경리단 길')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의 계산서 또한 혹독했다. 조선 정부는 당시 피살된 일본인 교관과(신식군대인 별기군을 훈육했던 교관이 일본인이었던지라) 공사관의 피해에 대한 보상과 배상을 해야 했으며, 공사관의 보호 명목으로 일본군인이 조선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해야 했다. 이때 일본 국가에 지불해야 할 돈만 50만 엔이었는데, 돈이 없었던 조선은 일본에서 연리 8부의 이자로 차관을 빌려 그것을 다시 일본에 주어야 했다. 골 때리는 일이었다.
     
    ~ 조선 정부는 일단 가진 돈 15만 엔을 털어 일본에게 주고 박영효를 수신사로 일본에 보내 나머지를 꾸어오게 한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배상금 일부를 탕감해주고 5년이던 상환기간을 10년으로 연장해줌과 함께 17만 엔을 연리 8부로 빌려준다.(이 돈은 차관으로 빌린 것으로, 이 중 5만엔은 배상금으로 공제하고 12만 엔만 받게 된다) 그것도 거저 빌려준 게 아니라 부산 세관의 관세 수입과 서천 사금 광산을 담보로 잡았던 것인데, 이것은 구한말 조선이 일본에 휘둘리게 된 결정적인 초기 사건임에도 이 차관교섭에 대한 연구 자료를 찾기 힘들다.
     
    청나라가 내민 계산서가 허례적인 항목에 치우쳤던 반면 일본이 내민 계산서는 보다 실질적이었으니, 이는 앞으로의 향배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장은 청나라의 지배를 당하게 된 터, 임오군란 때 오장경의 휘하로 들어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으로 조선에 남은 원세개는 말을 타고 궁에 들어와 조선 왕보다 상석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하는 지경이 되었는데, 그러한 그의 나이 불과 23살이었다. 과거부터 이어오던 청과 조선의 의례적 종속관계가 그런 새파란 놈에 의해 실질적 종속관계로 전락돼버린 것이었다.
     
    한편, 1882년 11월 임오군란의 뒷수습을 위해 일본에 갔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이른바 개화파는 일본의 발전된 모습에 크게 놀란다. 1868년 시작된 명치유신으로써 막부의 땟국을 벗고 동양의 선진국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박규수 등의 영향으로써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그들 개화파는 더욱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바, 귀국 후 조선의 변혁을 시도하지만 수구파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에 그들은 쿠데타로써 정권을 잡아 나라를 개혁하고자 모의한다.(☞ '박영효와 홍영식')  
     
    1884년 갑신년 10월 17일(음력), 그들은 드디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날 저녁 예정됐던 우정국(서양식 우편국) 낙성식 축하연에 초빙된 대소관료들 중 민영익을 비롯한 수구파 대신들을 처치하고 일거에 정권을 탈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개화파 상한(갑신정변에 협조한 민간인)들은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안동 별궁(지금의 풍문여고 정문 부근)의 담을 넘어 들어가 불을 질렀다. 하지만 순라꾼에 일찍 발견돼 실패하자 그 옆 초가에 다시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불길이 솟구치고 소란이 일자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은 외국 귀빈들과 함께 문을 나오다 기다리고 있던 상한에게 칼을 맞고,(홍영식과 알렌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 일을 앞서 설명한 바 있다) 기타 수구파 대신들이 살해되거나 부상을 입었다.(이때가 저녁 8시 반 경으로, 이때부터 카운트하면 개화파의 세상은 3일 천하가 아니라 약 46시간 정도이다)

     

     

    안동 별궁 삼문 / 고종이 1881년 지은 별궁으로 순종의 가례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1936년 일제에 의해 건물이 매각된 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최근 현광루를 비롯한 내부 건물이 부여에 있는 한국전통문화학교 내에 복원되었다.
    우정국의 1904년 사진
    오늘날의 우정국 / 위 건물 중 하나가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이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창덕궁 고종의 침전으로 가 청군이 변란을 일으켰으니 빨리 몸을 피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후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이처시켰다. 그곳 경우궁은 별궁 같은 곳이 아니라 지금 계동 현대 사옥 자리에 있던 수빈 박씨(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의 사당이었다. 개화파들이 고종을 이리로 모신 건 오로지 향후 예견되는 청군의 공격에 방어하기 좋은 협소한 장소를 택하였음인데, 사전에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한 약속대로 경우궁의 주위를 일본 공사관 병력 150명이 와서 지켰다.

      

     

    지금의 경우궁 / 1908년 육상궁(청와대 옆 칠궁)에 복원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계동에 있었던 경우궁도 이와 같은 모습에 부속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우궁 터 푯말
    경우궁 터에서 바라본 관천대(觀天臺)와 공간 사옥 / 경우궁, 관상감, 제생원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 모두 현대 사옥이 깔고 앉았고, 관상감의 천문대였던 관천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경우궁 터? / 경우궁은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고종의 명으로 옥인동으로 옮겼으나 일제에 의해 소리 소문 없이 철거되었다가 2019년 3월 옥인동에서 그 터로 짐작되는 곳이 발굴되었다.

     

    여기까지는 일이 착착 잘 돌아갔으니, 개화파들은 왕명으로 수구파의 중심 인물인 민태호, 민영목,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내시 유재현 등을 불러들여 경우궁 입구에서 살해했다.(이때 당 20살의 일본 하사관학교 출신 서재필의 칼이 춤을 춘다) 왕과 왕비는 경우궁 재실(齋室)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불안하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지라 10월 18일 날이 밝자 민왕후는 경복궁이든 어디든 이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개화파는 궁궐로 가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 하며 경우궁 가까이 있던 연령군(숙종의 막내 아들)의 종가(宗家)로 이처시킨다. 

     

    ~ 이 집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이자 고종의 종형인 완림군 이재원이 살던 곳이었으나, 왕이 머문 집은 궁으로 승격되는 조선의 국법에 따라 계동궁(桂洞宮)이 되었다. 아무튼 얼떨결에 개화파에 협조하게 된 이재원은 요즘의 바지사장 격으로 혁명정부의 좌의정이 되었고 곧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그는 혁명정부가 3일천하로 끝나면서 부역자로서 처벌받을 처지가 되었지만 고종의 비호로 귀양을 면한다) 개화파는 이 집에서 개화파 인사와 종친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을 꾸려 공표한다. 

     

     

    현대 사옥 앞 도로가의 계동궁 터 표지석


    그날 오후 왕과 왕비는 끈질기게 환궁을 졸라대었고, 개화파들도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었다 여겼는지 오후 5시경 왕과 왕비를 다시 창덕궁 관물헌으로 이거시킨다. 김옥균만은 "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청군의 공격에 방어하기 어렵다"하여 반대하지만 다케조에가 방어에 문제없다고 큰소리치는 바람에 결국 왕의 이거가 이루어진다. 
     

    다음날인 10월 19일 오전 9시, 개화파들은 밤 늦게까지 다듬은 80개조의 정령(政令, 정책 및 공약)을 발표하는데 그 중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1. 대원군을 불일내(不日內)로 모셔올 것.

    1.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人民)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제도를 마련하고, 사람으로서 벼슬을 택하되 벼슬로서 사람을 택하지 말 것.

    1. 온 나라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어려움을 펴게 하는 동시에 국용(國用)을 유족하게 할 것.

    1. 내시부(內侍府)를 혁파하되, 그 가운데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모두 등용할 것.

    1. 전후(前後) 간에 간악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기로 가장 드러난 자는 정죄(定罪)할 것.

    1. 각 도의 환상(還上) 제도는 영구히 와환(臥還)할 것.

    1. 규장각을 폐지할 것.


    고종도 당연히 그 정령을 받아보는데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간, 눈이 돌아가버리고 만다.

     

    '이럴수가.....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조만간 데려온다고....?' 세상이 바뀌었으니 내시부가 혁파되고 그중 능력 있는 자는 관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들이 발표한 각료 명단에서 보았듯 정3품의 고위직에 건달들이 임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데려오는 것은 안 된다. 이미 권력을 맛을 본 아버지인 터, 다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날뛸 것이 뻔하다..... 민왕후하고는 또 얼마나 싸울런가.....'

     

    "전교형식(傳敎形式)으로써 이 80개 개혁 조항을 공포하겠사옵니다. 정오까지 조서(詔書)를 내려 정식으로 공포할 수 있게 해주소서."

     

    김옥균이 마지막 강압조의 말도 고종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권력의 화신이었지만 그 역시 권력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으니 이를테면 앞서의 구식군대들, 당장의 김옥균, 1894년 한양을 향해 쳐들어왔던 전봉준, 을미사변 이후 친일내각을 이끌었던 김홍집,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이상은 모두 고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박살난 케이스였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했더니.....'

     

    개화파가 대원군을 데려오겠다는 건 청나라에 대한 독립에의 표방일 뿐 다른 뜻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고종은 이미 분노로 달아올라 있었던 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편전 밖을 향했다.(그가 사람을 시켜 몰래 청군을 불러들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지만, 민왕후가 그리 했을 개연성은 차고도 넘친다)

     

    누군가를 기다림인지, 고종은 오후가 한참 지나서도 조서를 내리지 않고 버티다 3시가 가까워질 무렵, 체념한 듯 조서를 내려 공포한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이제 이 갑신년의 정변은 성공한 셈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옥균이 개화파를 대표하여 조서를 받아들려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대포의 굉음에 이어 요란한 총소리 소리가 들려왔다. 교전이 벌어진 듯 총소리는 끊어짐이 없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밖으로 뛰어나갔을 때 이미 청군 1,500명은 창덕궁의 돈화문과 함양문 양쪽으로 나뉘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돈화문 쪽의 군대는 원세개, 함양문 쪽의 군대는 창경궁 선인문으로 들어온 오조유의 부하들이었다.

     

    개혁파와 이들을 지지했던 상한 · 일본공사관은 사전에 나름대로 3중의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즉 외위(外衛)인 돈화문은 조선군이 지키고, 중위(中衛)인 인정문은 150명의 일본군이, 편전 앞 선정문은 서재필이 이끄는 20여 명의 친위군이 지켰다.

     

    그러면서 박영효는 전·후영(前·後營)의 영장(營將)을 교체해 전후영 소속 병사에 대한 지휘권을 확보했으나 청군의 영향 하에 있던 좌·우영(左·右營) 영장은 교체하지 못했다. 외위가 쉽게 무너진 것은 이 좌·우영이 청군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를 펴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니 그들은 아예 총을 쏘지 못했고, 괜히 서 있다 총에 맞을까 도망가기 바빴다. 지휘관인 영장이 개화파가 아닌 까닭이었는데, 그로 인해 청군과 적극적으로 교전하던 전·후영의 군사마저 무너져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가 지켰던 창덕궁 돈화문
    일본군이 지켰던 인정문 / 하지만 이 두 곳은 모두 청군에 돌파당했다.

     

    1,500명의 청군이 밀고 들어오자 다케조에의 호언장담과 달리 중위의 일본군들은 총을 몇 방 쏘지도 않은 채 달아나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내위의 20명뿐으로, 무기나 제대로였다면 또 모를까, 그들이 1,500명의 청군을 이기기는 블가능했다. 그러자 고종은 후원의 연경당을 거쳐 북장문을 빠져나가 명륜동 북묘로 갔다. 바로 진령군이 무당짓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임오군란과 진령군')

     

    고종은 북묘로 갈 때 홍영식, 박영교(박영효의 형) 및 7명의 하사관과 동행하였다. 그리고 북묘에서 그들을 뒤쫓아 온 청나라 군사들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때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이 들고 가려는 고종의 사인교를 필사적으로 막아서며 어의(御衣)를 붙들고 매달리다 총칼을 맞고 처참하게 죽는다.

     

    그 외 다른 개화파 사람들은(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정난교, 이규완 등) 다케조에와 함께 북장문을 빠져나와 일본공사관과 제일은행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숨어 있다 인천으로 가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된다. 이들의 나머지 생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섹션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달았던 대로 박영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구하고 불행했는데, 그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변수(邊燧)로, 개화파의 일본어 통역관으로 일하다 혁명에 뛰어들게 된 인물이었다.


     

    북장문으로 이어지는 창덕궁 뒷담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간 변수는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냉대를 경험하는 바,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후 주 일본 공사관 직원이었던 민주호의 도움을 받아 베어리추 랭귀지 스쿨을 거쳐 메릴랜드 대학 농학과에 입학하였고, 1891년 이학사가 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라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타이틀을 얻는다. 그는 수석 졸업을 하여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하는 영예를 가지기도 했는데, 이것이 <워싱톤포스트>에 소개되었다. 

     

    이에 앞서 그는 1883년 보빙사 민영익을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거기서 대륙을 횡단해 워싱톤에서 어서 미대통령을 만나고, 이후 뉴욕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가 여러 나라를 유람하다 조선에 돌아오게 되는 바, 동행했던 민영익, 서광범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보빙사 일행(1883년) / 뒷줄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변수다.

     

    변수는 졸업 후 연방농무부에 취직을 해 공무원의 길을 걷는데,(동양인 최초의 미연방정부 직원) 함께 미국에 갔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이 모두 한국에 돌아와 뜻을 펼쳤듯, 그 또한 나름대로의 원대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31살 되던 해 무참히 꺾여버렸으니 워싱톤 구내에서 열차에 치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1891년 10월 22일) 그의 죽음을 미국의 유명 신문이 모두 대서특필했는데, 평소 그를 아꼈던 남북전쟁의 영웅 암엔 데일 장군은 자신의 장지(葬地)에 변수를 묻는 배려를 보였고, 변수의 친구들은 비석에 영어 이름과 함께 한글 이름을 새겨주었다.

     

    ~ 그는 메릴랜드 농과대학 설립자 찰스 베네딕트 칼버트의 아들인 리처드 칼버트, 암엔 데일 장군의 아들 등과 같이 수학했는데, 평소 "조선이 근대화되어 산업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농업혁명이 선행돼야 한다"는 말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 근대화에 힘쓰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메릴랜드 대학에서는 변수를 기려 그의 기념실을 조성했고, 학교 안내문에는 그에 대한 소개가 빠지지 않는다. 그가 죽었을 때 미국에서 보여준 폭발적 반응과는 달리 워싱톤 D.C.의 조선공사관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도 무리가 아닌 것이 그는 조선에서 이미 대역죄인의 명단에 올라 있는 자였던 바, 아마도 그의 가족들은 그보다 먼저 저 세상에 갔을 것이라 본다. 그의 삶은 이름 그대로, 조선의 위급을 알리려는 '변방의 봉화불'로 타오르다 갔다.

     

     

    갑신정변 당시의 변수(1884년) / 갑신정변 직전 개화당 인사들의 사진이다.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유길준, 변수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얼굴이 보이는데, 이들은 곧 피아(彼我)가 나뉜다.
    학생 시절의 변수(Penn Su, 1861-1891) / 1885년 주한미국공사대리 조지 포크의 유품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웨스트포인트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이채롭다.
    변수의 묘비 / 맨 위 '벤수'라고 새긴 한글이 보인다.
    변수의 무덤/ 메릴랜드 주 세인트 죠셉 묘지에 위치한다. 뒤에 보이는 새 비석은 2003년 5월, 후손인 변만식 씨의 주도로 워싱톤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 박윤수)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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