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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병원 근방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3. 11. 22:30

     

    사도세자의 비극에 관해서는 너무도 많은 글이 포스팅되어 있어 내가 따로 부언할 거리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암 완치 기념으로(6개월 후의 검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간 서울대병원 일원에서 눈에 익은 사도세자의 흔적들에 대해 사진과 함께 몇 자 글을 올리려 한다. 가장 먼저 말할 장소는 병원 입구의 함춘원지(含春苑址)이다.

     

    함춘원은 본래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 위치한 창경궁의 정원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인조대왕 재위시절 사복시(司僕寺)[각주:1]의 마장(馬場)으로 쓰여지며 잠식됐고, 구한말 때 대한의원(大韓醫院)이 세워지며 뒷마당으로 쓰였다.(지금 조금 남아 있는 함춘원지는 사적 237호로 지정됐다)


     

    함춘원지

    경모궁 중문(내삼문)과 영희전 기단이 남아 있다.



    ~ 대한의원은 1899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으로 설립 후 광제원,[각주:2] 경성의학교 부속병원, 궁내부 소관의 적십자 병원이 통폐합되었다. 건립 당시 이 건물은 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동양척식주식회사(현 KEB 하나은행 본점/구 외환은행 본점)와 함께 서울 3대 명물로 이름이 높았는데 지금도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현재 서울대학병원 역사문화원으로 쓰인다)

     

     

    구 대한의원 본관


    일제시대 총독부 병원으로 불릴 때의 사진

     


    지금 이곳에서 함춘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거라고는 일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 함춘원 문뿐이다. 그런데 이 함춘원 문이라는 명칭은 사실 아무 근거도 없는 잘못된 호칭이니 실은 영조 때 세운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景慕宮)의 중문(내삼문)이다. 사도세자가 아비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때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사당이 곧 경모궁인 것이다.(영조 때는 수운묘·垂恩廟라고 했으나 정조가 즉위하며 경모궁으로 높여 불렀다. 정조는 이때 사도세자의 명칭도 장헌세자로 바꿨다)


    경모궁(영희전)의 내삼문

    정면 3칸, 측면 2칸, 초익공 주두는 옛 모습 그대로이나 좌우 익랑은 날아갔다. 흔히 함춘문으로 불려지나 위에서 말한대로 무의미한 작명(作名)이다. '경모궁 도설(圖說)'에는 내신문(內神門)으로 돼 있다.


    1925년에 찍은 사진



    이처럼 지금은 문 하나만 달랑 있고 경모궁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의외로 본전의 기단과 계단은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걸 또 정확히 얘기하자면 경모궁의 것이라기보다는 영희전(永禧殿)의 것이라 부르는 편이 옳다. 영희전은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모신 곳으로서 구한말 광무제(光武帝, 고종)는 대한제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 있던 작은 규모의 영희전을 폐하고 이곳 경모궁 자리에 36칸 규모의 영희전 본전을 새로 세웠다.(1900년) 

    ~ 영희전이 옮겨진 것은 협소한 이유도 있었지만 주변에 명동성당이 건립되며 영희전을 굽어보는 까닭에 제국의 배향장소로서 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1899년 광무제는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였고 이에 경모궁에 있던 장헌세자와 그의 부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위패가 자연히 종묘로 옮겨졌던 바, 마침 경모궁이 비게 되었다. 이에 경모궁을 증축하여 영희전을 옮겨오게 된 것이다.


    촬영연대 미상의 영희전 본전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모궁 도설'에는 정당(正堂)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그 정당보다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단만 남은 현재 모습



    1930년대에 찍은 영희전 사진

    A가 본전이고 B가 내삼문인데 C와 D 지점에 있었을 외삼문과 대문은 이미 훼철되었다.

     

    경모궁 도설(圖說)

    영희전도 거의 이 모양새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광무제는 경모궁을 영희전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 과거의 경모궁 건물을 거의 그대로 활용하여 6조(태조, 세조, 성종, 숙종, 영조, 순조)의 어진을 봉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말로 그렇다면 정조는 일개인(사도세자)의 사당을 거의 종묘 영년전 규모로 지은 셈이다.(위 경모궁 도설 참고) 하지만 이곳 영희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으니 나라가 망해가던 1907년 융희제(隆熙帝, 순종)는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을 내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영정들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기고 사당과 부속 용지들은 모두 국가로 귀속시켰다.

     

    이것이 일본의 지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 그곳은 일제의 관용지(官用地)로 쓰이게 되었던 바, 영희전은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이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훼철되었다. 경성제국대학 본과 캠퍼스가 이곳 연건동에 들어선 것도 국가로 구속된 부지를 활용하고자 함이었다.(그렇지만 대학 본과 캠퍼스로 쓰기에는 작았으므로 평당 5~6원에 나머지 민간 부지를 매입한다) 흔히 영희전이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고들 말하나 아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련의 사진들을 보면 경성제국대학 본과가 설립된 1925년 무렵 영희전은 그 모습이 망실되고 있었다. 


     

    1925년에 찍은 사진


    위의 자리에는 1926년 경성대학 의학부 건물이 들어섰다.



    인근 성균관대학에서도 사도세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성균관대학교는 지난 2010년 정문과 담장을 허무는 과단성있는 결정을 내리고 교내의 옛 성균관 유적을 시민들과 공유했다. 이에 성균관 탕평비도 개방되었는데 이 비석은 영조 18년(1742) 3월 26일, 왕세자(사도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한 것을 기념해 성균관 입구에 왕명으로 세운 비석이었다.


    영조는 이 비석에 친히 '예기(禮記)'에 나오는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라는 구절을 썼다.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소인배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라는 뜻이다.



       성균관 탕평비



    또 서울대병원 정문 횡단보도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의 안뜰은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가 놓였던 곳이니 곧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다. 더불어 국립서울과학관 옆 월근문(月覲門)도 사도세자와 관계가 깊은 문이니 수시로 사도세자를 뵙겠다는 의지로써 경모궁으로 가는 첩경의 담장을 헐고 이 문을 내었다. 아래 안내문의 설명대로 정조는 매월 초하루에는 이 문을 통해 사도세자를 뵈러 갔던 바, 문의 이름을 월근문라 했다. 여기서 근 자는 '뵐 근(覲)' 자이다.



     

     

     

       창경궁 선인문의 바깥과 안쪽(이 안쪽 뜰에 뒤주가 놓였었다)

     

     

     

      창경궁 월근문과 안내문

     

    1. 조선 시대, 궁중의 말과 가마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1392(태조 1)년에 만들어 1865(고종 2)년에 없앴다. [본문으로]
    2. 1900년 서울에 설치하였던 내부 직할의 국립병원. 1907년 3월 10일 칙령 제9호로 의정부 직할의 대한병원으로 이관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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