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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0. 3. 17. 21:12
임진왜란 때 깡그리 불탄 창경궁은 광해군 8년(1616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재건된다. 하지만 그 7년 후인 인조반정 때 일부 전각이 불타고 인조 2년(1624년 2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며 정문인 홍화문(弘化門)과 정전인 명정전(明政殿)만 남기고 다시 불타버린다. 이후 창경궁은 다시 재건되나 영조대왕 시절에 다시 대다수의 전각이 불타게 되는데, 이번에 방화범으로 몰린 사람은 공교롭게도 부왕(父王) 영조에게 늘 구박만 받던 세자 이선(李愃, 사도세자, 1735~1762)이었다.
영조 32년(1756) 5월 1일, 창덕궁에 살던 영조는 뭐 트집잡을 게 없나 하여 창경궁 낙선당에 살던 아들 이선을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이선은 내시의 전갈에 놀라 일어나 다급히 아비를 맞으러 문을 나갔다. 영조는 낙선당 댓돌 아래서 세자의 헝클어진 매무새를 보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세월 좋구나. 대낮부터 술 처먹고 자리에 들었느냐?"
".... 안 먹었습니다."
"안 먹긴 뭘 안 먹었어? 꼴을 보니 잔뜩 처먹었구만.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려드느냐?"
".... 정말로 안 먹었습니다."
"아니, 이놈이 끝까지..... 얼른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아비가 거듭 몰아세우자 이선은 어쩔 수 없이 허물을 뒤집어 쓰기로 하고 거짓말을 한다. 사실 이런 일이 어디 한 두번이었던가.....
"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어 한잔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섰던 세자의 보모 최 상궁이 보다 못해 끼어들며 세자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세자마마의 말씀은 사실이 아닙니다. 술 잡숫는다는 말은 지극히 원통하옵니다. 술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소서."
상궁이 이렇듯 세게 나가자 영조도 당황한 듯 말을 못하고, 대신 다른 말로 세자를 추궁했다.
"시방 네가 이 아비에게 거짓을 고하였느냐? 최 상궁의 말이 사실이냐?"
이선은 일이 커질 듯하자 다음과 같은 말로써 상궁을 내쫓는다.
"먹고 아니먹고는 내가 알 일이지 어찌 자네가 알겠는가? 괜히 끼어들지 말고 물러가라."
그러자 영조가 다시 세손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상궁을 꾸짖었느냐? 어른 앞에서는 견마(犬馬)도 꾸짖지 못한다 했거늘 네가 감히 뉘 앞에서 목소리를 키우느냐?"
하고는 주위 신하들에게 '세자를 잘 훈계하라'는 영을 내리고 가버렸다.
영조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세자가 신하들을 호통을 쳤다.
"네 놈들은 내가 이처럼 억울하게 당하는 데도 한 마디 말이 없느냐? 그러고도 너희들이 나를 모신다고 할 수 있겠느냐? 괘씸한 놈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라."
이에 신하들이 낙선당에서 나가느라 잠시 분주해졌는데, 이때 누군가 촛대를 쓰러뜨렸고, 이에 낙선당에 붙은 불은 곧 옆 건물인 저승전(儲承殿) 관의합(寬毅閤)으로 번졌고, 다시 청음정, 경극당, 양생당, 취선당, 숭경당 등을 태웠다.
궁궐은 곧 난리가 났으니 관의합에 있던 부인 혜경궁 홍씨와 세손(훗날의 정조)은 놀라 황급히 몸을 피하고, 창덕궁 금원(禁苑, 후원)에 있던 영조가 또 다시 달려왔다. 이에 일은 더 큰 모양새로 비화되었으니 세자가 어까 혼난 분풀이로 불을 지른 것이라고 단정한 영조가 다시 이선을 크게 꾸짖었다.
"불은 왜 지르느냐? 네가 불한당이냐?"
" ..... "
사람이 너무 억울하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다. 게다가 이선은 예전부터 이와 같은 억울함을 숱하게 겪어왔는지라 묵묵부답하며 버티는데, 다만 이번에는 그 인내의 선을 넘었는지 세자가 잿더미 속에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 소주방 뒤 우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더니 갑자기 달려가 우물 안으로 몸을 날렸다. 세자는 신하와 나인들이 더불어 달려와 건져내어 목숨을 건졌으나 이후로는 정말로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막나가는 건지 정말로 정신이 돈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조울증 정도는 앓았음직하다)
대표적으로는, 남편 정치달이 죽어 다시 궁에 들어와 살게 된 동복누이 화환옹주와 근친상간을 하였고,(한중록과 실록의 기록에 근거한 추정)
아비인 영조 몰래 평양에 가 유람을 하고 기생들과 놀다 오기도 했다. 영조는 이 사실을 3정승에게 자세히 알아오라 시켰는데 이에 난감해진 3정승이 차례로 자진하였던 바,(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 영조는 그들의 갸륵한 충성심에 이 문제를 덮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서도 이선의 비행을 고발하는 상소가 이어졌고, 이선 또한 더욱 흉포해져 내시와 나인을 죽이고 여승을 궁 안으로 데려와 섹스를 하는 등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실망을 거듭하던 영조는 결국 폭발하였다. 때는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 영조는 기우제 행사를 지내는 창덕궁 행사에 세자를 채비시켰으나 이선은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노(大怒)한 영조는 이제껏 축척된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아들에게 자살을 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선이 따르지 않자 큰 뒤주를 가져오게 한 후 아들을 그 속에 집어넣었다. 편전인 휘령전(輝寧殿, 문정전) 앞뜰에서의 일이었다.
영조는 말리는 신하 중 별감 한 명을 본보기로 처단한 후 끝까지 아들의 죽음을 밀어붙였고, 이선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아비의 명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에 결국 조선조 왕실의 최대 비극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나게 되니, 이선이 들어간 뒤주는 선인문(宣仁門) 앞뜰로 옮겨져 풀과 두엄으로까지 덮여졌다. 뒤주 속에 이선은 그 여드레째 되는 날 숨을 거뒀다.~ 영조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둔 후 창덕궁에 머무르며 하루하루 아들의 생사를 체크했다. 처음에는 다들 영조가 며칠 후 풀어줄 것이라 생각하여 느근하게 감시했으니 먹을 것과 청량음료, 부채 등을 넣어주기도 하고, 이선도 가끔 나와 바람도 쬐고 오줌도 누고 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영조는 뒤주를 꽁꽁 묶게 한 후 풀과 두엄으로 뒤주를 덮게 했다. 실신시켜 빨리 죽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선은 쉽게 죽지 않았으니 그 사나흘 후, 영조의 명을 받은 포도대장 구선복이 어쩐가 물었을 때 이선은 그렇게 묻는 그대는 누군가 되물었다. 구선복이 이름을 말하자 어찌하여 직함을 밝히지 않는가 꾸짖기도 했으며, 이레째 되는 날, 생사 확인을 위해 뒤주를 흔들자 어지러우니 흔들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드레째 되는 날 반응이 없어 뒤주를 열어보니 죽어 있었다. 이선은 끝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 쳤는 듯 부채를 반으로 접어 오줌을 받아 마신 흔적이 있었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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