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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7. 14. 23:25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이로쓰여 한민족 역사 중에서 적어도 조선은 천신(天神)에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었고 땅과 곡식의 신에만 제사 지낼 수 있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제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던 바, 《예기》에 써 있는 규범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규범을 몰랐거나 모르는 척 했던 듯, 1464년(세조 10)까지 환단(圜壇=원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국초(國初)의 환단은 지금의 한남동 매봉산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세조가 제사를 지낸 환단은 남단(南壇)으로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 부근에 있었다.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안에 남단 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아울러 정조 때 학자 성해응이 쓴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는 '백악산 아래 세 봉우리가 있고, 삼청동문(三淸洞門) 큰 각자(刻字) 바위 앞에 삼청전(三淸殿)이 있는데 그 옛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삼청동 총리공관 맞은편 절벽의 '삼청동문' 각자

     

    환단은 이후 성리학 및 사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부터 문헌에서 사라진다. 천제(天祭)는 제후국의 예(禮)에 어긋나므로 폐(廢)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중론 때문이었으니 이후 450년 간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자주 듣는 "종묘사직이 어쩌고 저쩌고"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떠들어댔다. (한마디로 말해 알아서 기었다는 거.....)

     

    몰라서 그렇지 사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말이다. 조선의 임금이 제사 지낼 수 있는 곳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종묘, 그리고 토지와 곡식신을 받드는 사직단뿐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종묘사직 어쩌고"하는 말은 "우리는 천자의 나라가 아닌 한낱 제후국에 불과한 나라입니다"라고 떠벌리는 것과 하등 진배없다. 간간히 풍백(風伯), 운사(雲師), 뇌사(雷師), 우사(雨師)를 모신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 제사를 올렸지만 엄격히 말해 천제는 아니었다.  

     

    * 국초에는 가뭄에 들면 종묘와 사직, 환단과 여러 용추(龍湫, 폭포수 아래의 깊은 못)에 비를 빌었다.(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서울 사직단 정문
    사직단 /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사상에 의해 네모난 방형(方形)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사(社, 토지 신)와 직(稷, 곡식의 신)에 제사 지냈다.

     

    광해군 때는 이마저 중지되었다. 광해가 풍우뇌우단에 가려는 것을 신하들이 막아섰던 바, 아마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대한 눈치 보기인 듯했다. 이후로는 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내 나라를 구해준 은혜)을 외치는 노론(老論)들로 인해 그나마 풍운뇌우단도 훼철되었으니 다만 사직에 제사 지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로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요 약속이 됐다.

     

    그런데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 천제(天祭)의 꿈을 꿨다. 아니 꿈만 꾼 게 아니라 실제로 그리했으니 1897년 명나라의 것을 본 뜬 장대한 제단을 만들어 천신에 제사를 올렸다. 그것이 바로 환구단(圜丘壇=원구단)으로 지금의 조선호텔, 롯데호텔, 프레지던트호텔 자리가 환구단과 그 부속건물이 있던 자리였다.  

     

     

    베이징의 천단(天壇) 기년전(祈年殿) / 황제가 천제(天祭)를 지내던 곳으로 대한제국은 천단을 모델로 환구단을 건립했다.
    대한제국의 발상지 환구단 /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남별궁(南別宮)이 있던 자리에 환구단을 건립하고 천제를 올린 후 황제에 즉위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환구단 그림 / 신위판이 보존된 황궁우와 지붕을 올리기 전의 환구단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환구단을 형태를 보다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원형의 환구는 하늘을 상징하며 이 기단 위에 원추형 금색 지붕이 씌워졌다.
    환구단 황궁우(皇穹宇) / 환구단 건물 중 지금은 오직 황궁우만 남았다. 환구단 건립 2년 후 신위판(神位板) 보관소로 건립되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신위판을 봉안하며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추존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11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급조한 환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의 황제위에 올랐다.* 조선왕조 500년 만에 첫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니 이름하여 광무(光武) 원년이었다. 이제 황제국이 되었으니 독자적인 연호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장소는 급조된 경위와는 상관없이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어느 장소보다도 뜻깊은 곳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때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이 1644년에 멸망한 대명제국(명나라)의 뒤를 잇는 나라임을 천명한다. 정신 나간 인금이라 아니할 수 없다. --;;)

     

    * 황제 즉위는 이미 경운궁 석조전에서 있었고 이 날의 천제(天祭)는 황제국에 걸맞은 의식이 필요하다는 영의정 심순택의 상소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지만 고종은 이 제천의식으로써 명실공히 황제에 즉위에 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대로 조선은 천자의 나라이기를 포기했기에 제천의식을 행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천단(天壇), 즉 환구단을 가질 수 없었다. 환구를 가진다는 것은 명·청에 거역하는 일이고 동아시아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에서 환구단을 건립한 것은 동아시아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의미일 터였다. 그랬다. 1895년 아시아의 최고 지존으로 군림해오던 청나라가 신흥강국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청나라는 지존에서 내려서야 했고 조선에 대해서도 이래 저래라 간섭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고종은 이 기회를 틈타 대한제국을 세워 황제에 즉위했고, 환구단을 건립했다. 그리고 천제를 드림으로써 황제의 반열에 올랐음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후로도 황제는 동지와 새해 첫날에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자력이 아닌 외세에 의해 얻은 황제의 자리가 반석일 수는 없었으니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써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1907년) 언제 황제국이었냐 싶게 나라까지 넘어갔다. 일제는 조선을 집어삼킨 후 성공적 합병과 통치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시정5년기념공진회의 경복궁 개최를 계획했는데, 이에 필요한 숙박시설의 마련을 위해 1913년 3월 15일 환구단을 헐고 호텔 건립에 들어갔다.

     

     

    환구단 자리에 건립된 조선철도호텔 / 지하 1층 지상 3층에 69개의 객실을 갖춘 건물로 조선총독부를 설계한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가 설계 시공 했다.
    조선철도호텔 후원의 황궁우

     

    이듬해인 1914년 9월 30일 일제의 조선철도호텔이 건립됐다.(10월 10일 낙성식 때 이름이 '조선호텔'로 바뀜) 그러나 황궁우는 그대로 살려 후원의 정자처럼 만들었는데 매각된 벨기에 영사관 뜰의 장미를 옮겨 심어 조성한 정원 '장미원(薔薇園)', 일명 '로즈 가든'은 호텔이 자랑하는 명소가 되었다. 황제가 제천의식을 올리던 곳이 일제의 호텔로 바뀌고 태조의 신위와 일월성신을 모셨던 곳은 유흥을 즐기는 호텔 정자로 전락하였으니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을 법했다. 이 호텔은 근방의 반도호텔과 더불어 일본이 망할 때까지 번성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쓰였다.

     

     

    1925년 6월 30일자 매일신보의 '장미원' 기사

     

    이후 쇠락한 호텔은 철거되고 1968년 미국 아메리카 에어라인과 한국관광공사가 합작 투자한 웨스틴 조선호텔이 건립됐는데, 이때 남아 있던 환구단 부속건물이 황궁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헐려나갔다. 웨스틴 조선호텔 홈페이지는 이때 사라진 건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 호텔이 1914년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호텔이며,(조선철도호텔을 전신으로 삼았다)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호텔이자 최초의 아이스크림이 판매된 곳임과 동시에 (미군에 의한) 최초의 댄스파티가 개최된 곳이라 홍보하고 있다.

     

    어쩌면 황궁우도 웨스틴 조선호텔 건립시 사라졌을지 모른다. 제천의식의 장소는 진작에 없어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외삼문, 어제실, 전사청 건물도 모두 밀어버린 마당에 망한 나라의 위패를 보관했던 장소 따위가 대수였으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건물은 공사 중 사적으로 지정되어(제126호) 미구의 위험이 방지되었고, 지금은 더 다행스럽게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서 호텔 공간에서 분리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난 주, 한없이 좁아진 환구단 영역이나마 감사한 마음으로 거닐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황궁우는 호텔 빌딩 숲 사이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꾸부정한 모습으로 조선왕조의 멸망과 금세기의 변화를 모두 지켜봤을 것이다. 웨스틴 조선호텔 또한 부침이 있어서 1982년 민영화 방침에 따라 삼성이 550억을 주고 인수했고 1995년 나머지 지분을 모두 인수했으나 1997년 신세계가 삼성에서 분리되며 호텔지분을 다시 인수하여 신세계의 소유가 되었다.

     

     

    환구단 배치도 / 조사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추정 배치도이다. 박스 안은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 위쪽이 황궁우이고 아래 쪽이 정문이다. 제사 준비 장소였던 어재실은 1960년대까지 '아리랑 하우스'로 불리며 호텔 부속건물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환구단 삼문 / 조선철도호텔 건립시 철거된 광선문(光宣門)을 대신하여 호텔 정문으로 1960년대 말까지 남아 있었다. 이후 웨스틴 조선호텔 건립시 이전되었으나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하다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 정문이 본래 환구단 삼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 2009년에 비슷한 자리에 복원되었다.
    사진작가 성두경의 사진 / 삼문이 호텔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왼쪽으로 어재실이 보인다. 60년대 초 사진으로 짐작된다.
    환구단 답도와 전축삼문 / 환구단과 황궁우를 잇는 계단과 문. 전축은 벽돌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이런 구조물도 있었다. / 환구단을 둘렀던 원형 난간석으로 조선철도호텔을 지으며 훼철됐다.
    남아 있는 구조물 부재
    환구단 석고 / 환구단 입구에 있으며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설치된 돌 북이다. 제천(祭天)의식 때 울리는 큰 북소리를 상징하며 몸체에 화려한 용(龍)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석고는 조선말기 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석고각 계단 / 석고를 보호하기 위해 세웠던 석고각은 이등박문의 신사인 장충동 박문사로 옮겨졌다.
    석고각의 마지막 사진 / 1960년 2월 장충동 박문사 자리에서 촬영된 것으로 이때까지는 존재하였으나 이후 사라져버렸다. 일제시대 매일신보가 국보적인 조선의 대표 건물축이라 칭송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로 특히 화려한 익공을 자랑하였던 바, 만일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당연히 국보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석고각은 목수 심선석(沈宣碩)이 지었다.
    박문사 종각으로 쓰이던 석고각 /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이등박문의 사당 박문사 본당이다.
    전축삼문에서 본 황궁우 / 위패의 보관 장소로서 제1단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기(皇地祇), 태조 이성계가 추존된 태조고황제의 위패가, 2단에는 대명성제(大明聖帝 )와 야명성제 (夜明 聖帝 )가, 3단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오성(五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오악(五嶽), 사해(四海), 명산(名山), 성황(城隍),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사(雷師), 오진(五鎭), 사독(四瀆), 대천(大川), 사토(司土)의 위패가 모셔졌다.
    황궁우는 1967년 사적 157호로 지정되었으나 이후로도 왜색의 흔적을 안고 있다가 1990년대 완전 복원되었다.
    천장의 칠조룡(七爪龍) 그림도 복원되었다. 칠조룡은 발톱 일곱개의 용으로 황제를 상징한다.
    그 영욕의 시간들을 지켜보았을 황궁우 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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