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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밖에 장충단 공원에서 일어난 사건들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7. 25. 23:59

     

    * '장충단과 박문사'에서 못다한 이야기

     

     

    장충단 비

     

    앞서 말한 대로 장충단이라는 앞면의 예서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썼고 뒷면의 해서 비문은 육군부장 민영환이 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

     

    그런데 장충단 비 뒤로 누군가의 무덤에서 가져왔을 두 개의 장명등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앞면에는 第一江山 太平世界(제일강산 태평세계)'라는 글자가, 뒷면에는 '단기 4296년 5월 15일 배성관(裵聖寬) 근립(謹立)'이라고 쓰여 있다. 1963년에 배성관이 삼가 세웠다는 것인데 이 배성관이란 자는 5~60년대 우리나라 문화재의 해외 밀반출에 앞장섰던 골동품상으로 세간에 알려진 사람이다. 그것이 왜 경건한 이 자리에 놓여 있는가? 관계 당국의 확인 및 처를 바란다.(장명등도 필시 그자가 갖다 놓은 것이리라)

     

     

    장충단 비 뒤의 정체불명 비석
    장충 단 비 앞에 놓인 푯돌도 바르지 않다. / 푯돌은 이곳이 장충단 터였다고 말하고 있으나 본래는 신라호텔로 오르는 언덕 오른쪽에 있었고 광복 후에도 그곳에 비석이 세워졌다. 1969년 권력의 야로로 이곳으로 쫓겨왔을 뿐이다.
    대신 안내문은 바르다./ 오른쪽 탐방객이 바라보고 있는 안내판의 설명에는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남소영(南小營) 전각 / 본래 장충단 터에는 조선 후기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인 남소영이 있었다. 일제가 공원화하여 철거하기 직전의 남소영 전각 모습이 엽서로 남겨졌다.
    남소영도 / 단원 김홍도가 남소영에 있던 서울 선비들의 모임을 그렸다.

     

    * 그밖에 장충단 공원에서 일어난 일들

     

    1. 김두한과 일본 야쿠자와의 결투

     

    장충단 공원에서 김두한이 일본 야쿠자들과 40:1로 싸웠다느니,김두한 패거리와 일본 야쿠쟈들과의 60:5의 결투가 벌어졌다느니 하는 유명한 소문이 있는데,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60:5 정도로 처리했다. 일본 야쿠쟈 원로 고노에가 나타나 패배를 인정하며 싸움이 정리된다. 김두한이 이끄는 소수의 종로 패거리와 야쿠자 간의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두한 일당과 일본 야쿠쟈와의 60:5 결투(진짜?)
    장충단 공원에 남은 수표교 / 어릴 적 김두한이 거지패들과 함께 살았다는 수표교 다리 밑이다. 본래는 청계천에 있다가 복개공사로 인해 1965년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청계천이 복원된 후에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마름모 꼴 교각 /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교각 하부가 마름모 꼴로 만들어졌다. 다리는 전체 길이 27.5, 폭 7.5, 높이 4m로 세종 때 물 높이가 표시된 수표(水標) 돌기둥을 만들어 수량을 체크했다. 어릴 때 보았던 수표가 어디 갔나 했더니 보물로 지정돼(838호) 세종대왕기념관으로 갔단다.
    화강암 상판 / 교각과 마찬가지로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고급스럽게 난간까지 둘렀다. 서울시에서 청계천 2가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 같은데, 이상한 꼴로 재탄생하느니 그냥 이 자리에 있었으면 한다. 제 자리를 찾는 것도 좋지만 지금 가면 어떻게 하든 원형 훼손이 불가피하다.

     

    2. 이정재 유지광의 장충동 공원 집회 난동 사건

     

    1957년 5월 25일 자유당 독재를 성토하는 야당의 시국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몽둥이를 든 조직폭력배 30~50명이 연단 위아래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이 벌어졌다. 부통령을 노리던 이기붕 민의회 의장의 사주 아래 정치깡패 이정재와 유지광이 부하들을 동원해 벌인 사건으로 폭행, 기물파손, 방화를 저지른 깡패들은 목적 달성 후 유유히 사라졌고 경찰들이 뒤늦게 나타나 호들갑을 떨었다. 유명한 김두한이 경비책임자로 그 자리에 있었으나 중과부적이었다고 전한다.(그때는 아래 사진처럼 배가 나온 중년 아저씨였던지라.....) 

     

     

    '폭력배에 짓밟힌 장충단 강연회' / 제목 밑으로 야당의 경비책임자였던 김두한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1957.5.27. 동아일보)
    난동의 주역 이정재와 유지광 / 정치깡패 이정재와 유지광은 5.16 혁명 후 체포되어 이정재는 죽고 유지광은 살아난다.

     

    1960년 3월 15일, 위 사건에 이어진 3.15 부정선거가 터진다. 이날 있었던 정·부통령 선거에서 8순 노인이던 이승만은 4선에 성공하고 이기붕은 부통령이 된다. 하지만 대통령 유고 시(고령의 이승만이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대통령직을 승계해 정권을 이어가겠다고 생각한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자유당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선거와 개표는 그 같은 부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이에 불복하는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3.15 정·부통령 선거 포스터
    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과 이기붕 / 이 두 사람은 압도적인 표차로써 정·부통령이 되었으나 (1960.3.17. 동아일보)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고
    중고등학생에 이어
    초등학생까지 들고 일어선다.
    김주열의 주검 / 고등학교 시험을 보기 위해 마산에 왔다 부정선거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 학생이 최류탄이 눈에 박힌 채 유기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건 기사 / 김주열의 사망 사건은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킨다.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과 오열하는 어머니 모습 등의 4.19 관련 사진이 2020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기붕의 죽음 / 이기붕은 4.19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집단자살하였으며 (정확히는 아들 강석의 총에 의한 집단살해)
    망명길의 이승만 대통령 /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퇴위하여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이승만은 1965년 하와이에서 사망한다)

     

     

    * 이기붕 일가 사망 미스터리

     

    계엄사의 발표대로 1960년 4월 28일 오전 5시 40분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에게 먼저 총질을 하고 자신을 쏘았다면 3발의 총성이 나고 잠시 간격을 두었다 2발의 총성이 나야 하는데, 이날 발표는 잇달아 4~5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했다. ▲다른 가족은 모두 한 발에 갔고 이강석만은 자신의 가슴과 머리에 2발을 쐈다고 했는데, 검시 결과 양쪽 다 단번에 숨을 거둘 수 있는 급소였다. 따라서 검시관은 1발을 쏜 후 머리나 복부에 다시 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전했다. ▲사건 당시 이무기 비서가 바로 옆방에 있었는데 사건 이후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식구 중 어느 누구도 한 줄의 유서나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이기붕의 시신
    곽영주와 최인규의 최후 / 이기붕 일가 살해 배후로 의심받던 곽영주 경무관(대통령 경호실장)과 3.15 부정선거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도 5.16 후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던 바, 이기붕 일가 사망 미스터리는 영원히 베일에 싸이게 되었다.
    곽영주, 임화수, 이정재의 시체(아래에서부터) / 일세를 주름잡았던 이들 세 사람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3. 제7대 대통령 후보들의 장충단 공원 유세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후 1963년 5대 대통령과 1967년 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4년 중임'의 헌법에 따라 7대 대통령 출마 자격이 없었으나 이승만의 3선개헌과 동일하게 공화당과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대통령 3번 연임'을 허용하는 3선개헌을 강행한다. 박정희는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되자 역사적인 7대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다.(역사적이라 함은 이것이 마지막 민선 선거가 되기 때문이다)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을 극적으로 꺾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은 1971년 4월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박정희와 격돌한다. 이때 박정희는 남은 과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고, 김대중은 박정희 후보가 또 당선되면 다시는 선거를 할 수 없는 박정희씨 영구 집권의 총통시대가 열리게 될 것인즉 이번에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이 예언은 불행히도 들어맞았다)

     

     

    제7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1971년 4월 25일 박정희 장충단 공원  유세
    1971년 4월 8일 김대중 장충단 공원  유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박정희 53.2%, 김대중 45.2%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됐다. 하지만 박정희로서는 개운치 않은 결과였다. 자유당 정권만큼의 부정선거는 아니나 공권력을 총동원한 선거에서 95만 표라는 차이는 사실상 박정희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박정희는 마침내 또 한 번의 불법개헌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일명 체육관 선거)라는 영구집권의 길을 마련하고, 또한 대통령 자리를 위협하는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한 납치작전을 획책한다.

     

     

    야욕의 시동 / 대통령의 임기 6년, 연임이나 중임 규정 따위를 아예 없앤 화끈한 개헌안을 불법 통과시킨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시키고 정당의 정치활동 중지, 대학휴교 등의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때가 1972년 10월 10일로 이른바 '10월유신'이다.
    국민투표에서 통과된 유신헌법 / 대대적인 홍보로 국민들을 세뇌시킨 유신헌법은 그해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9% 찬성 91.5%라는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에 영구집 권의 길을 닦은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라는 하나마나한 선거로 8대 대통령이 되고( 1972년 12월 23일)
    철권통치 속에
    다시 9대 대통령이 되지만(1978년 12월 27일)
    결국 비명에 가고 만다. / 1979년 10월 26일 저녁에 벌어진 일로, 9대 대통령이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이때 박정희의 나이 61세로 아직 독재의 여력이 남은 연령이었으나, 하지만 이 사건이 아니더래도 당시의 혼란한 정세는 나머지 5년의 임기를 허락하지 않았을 성싶다. 아무튼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합 수부장 전두환의 기획된 등장 / 1979년 11월 3일 박정희의 국장이 치러졌다.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고 11월 6일, 그가 직접 10·26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이 국민들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김재규의 최후 / 왼쪽 아래는 의무관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옷을 찢어 가슴을 살펴보고 있는 사진이다. 김재규는 1980년 5월20일 사형이 확정되자마자 불과 나흘 뒤인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사이나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역사의 진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 저 하늘만이 진실의 전부를 알고 있을  것이나 침묵하기에 위정자들은 늘 하늘 무서운 줄 모른다. 그러나 <노자>에 이르기를 천망은 회회하되 소이는 불실이라고 했다.(하늘의 그물은 매우 성겨 없는 듯 보이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사진은 장충단에서 바라본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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