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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충단과 박문사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7. 24. 00:51

     

    초등학교 시절 장충단(奬忠壇) 공원과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살았다. 그래서 장충단 공원에는 정말이지 많이 왔고 특히 근방의 어린이 야구장(당시 리틀 야구장)에서는 거의 살다시피 했다. 당시 이웃 학교 애들이나 동네 친구들하고 야구공 내기 시합(당시 홍키공이라 불리던 약간은 귀했던 )에 미쳐 있었던지라..... 이후로도 이사 가지 않고 한참을 그 동네에 살았으니 장충단 공원에는 수없이 왔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충단 공원 이름이 왜 장충단인지 몰랐다는 거..... 그저 동네가 장충동이어서 장충단 공원인가 보다 했을 뿐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유래를 안 것은 최근이었다. 최근이라 함은 미스터 트롯 출신의 어느 가수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멋드러지게 불렀을 때이니 매우 가까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때 문득 장충단이 무슨 뜻일까 해서 검색을 해 본 것이었다. 결과를 말하자면 장충단은 1895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살해사건, 이른바 을미사변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 등을 추모해 1900년 고종의 명으로 세운 제단이었다. 그들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마침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에서 설명해놓은 것이 있기에 옮겨 쓰기로 하겠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일본군과 일본인 무뢰배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왔다. 이때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 앞을 지키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구스노세 유키히코의 총을 맞고 쓰러졌고 부하 우범선이 쓰러진 상관에게 총질을 했다. 이후 배신자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 수비대는 건청궁 밖에서 경계를 서고, 건청궁 안은 공사관 군인들과 아다지 겐조가 동원한 무뢰배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군인들과 무뢰배는 임금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처소 곤녕합(坤寧閤)으로 몰려들어 명성왕후를 찾기 시작했다.

     

    먼저 장안당에 칩입한 무뢰배들은 고종과 왕세자, 왕세자빈을 협박하고 윽박지르며 왕비의 위치를 다그쳐 물었는데, 그 과정에서 고종은 무뢰배들이 찍어누르는 힘에 의해 무릎 꿇려졌고, 세자는 상투를 붙잡혀 패대기 쳐진 후 칼등으로 목덜미를 세게 엊어 맞았다. 이 소란을 목격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재빨리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으로 달려가 궁녀와 명성황후를 깨웠는데,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무뢰배들이 곤녕합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이경직은 곧장 그들을 막아섰으나 총과 칼을 연이어 맞았고,(칼을 휘두른 놈은 한성신문사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미처 피하지 못한 명성왕후 역시 칼을 맞고 는다.(최초로 찌른 놈은 미야모토 다케다로 소위)

     

     

    건청궁 부감/ 화살표가 왕비 침전인 곤녕합이다.


    을미사변 5년 후인 1900년 고종은 남산 북쪽 기슭, 어영청의 분영(分營)이 있던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제각을 짓고 봄 여름으로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하지만 이 국가행사는 채 10년도 지속되지 못했으니 1908년 일제는 장충단에서 올리던 제사를 금지시켰다. 아울러 장충단 일대를 위락공간으로 만들어 이토 히로부미 위안 야유회를 열고 여기에 조선의 군부대신 등을 초청했다. 아직은 병탄이 되기 전이었음에도 우리의 국권이 행사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나아가 일제는 이곳에 이토 히로부미 동상을 세우려고도 하였다. 일제가 하고 많은 장소 중에서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물어보나마나, 이곳 장충단이 항일의 상징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엄연히 국권이 살아 있었던 바, 조선인의 감정이 그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매천야록>은 적고 있다. 1900년 건립 이래 장충단은 비단 을미사변 뿐 아니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왕실 수호를 위해 희생당한 군인들의 충절을 기리는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와 같은 저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조선이 병탄된 1910년, 곧장 제단과 사전(祀殿)이 철거되고 비석마저 뽑혀졌다. 그것이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짓이라는 것 또한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일제의 준동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았으니, 1920년대 후반에는 이곳에 일본 국화(國花) 벚꽃을 잔뜩 심은 공원을 조성하였고,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공간인 박문사라는 사당까지 세웠다. 그의 한자 이름 伊藤博文에서 박문(博文)을 떼어 붙인 박문사(博文寺)였다. 이토가 생전에 귀의한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에 속한 절이나 사당의 성격이 짙은 곳으로, 박문사의 부지로는 처음에는 (지금 총리공관이 있는) 삼청동 언덕 등이 거론되었으나 결국 장충단이 있던 자리로 귀착되었다.

     

    그리하여 장충단 자리를 포함하는 남산 기슭의 넓은 부지에 건평 387평의 사당을 세웠던 바, 본당의 설계는 남산 '조선신궁'을 설계한 국수주의 건축가 이토 쥬타(伊藤忠太)가 맡았고,(일제가 본당 건축에 얼마나 심혈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부재로써 광화문 궁장의 석재가 사용됐다. 이후 이 건물은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의 도구로써 적극 활용되었으니 안중근 의사의 아들인 안준생을 데려와 이토의 아들에게 사과시키고 화해 장면을 연출한 곳도 이곳이었다. 일제가 표방한 내선일체를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태평양 전쟁 중 전사한 일본군의 위령제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앞서도 말했지만 박문사 건립에는 조선 왕궁과 국가 제사 시설의 건물들이 통째로 뜯겨와 사용되는 모욕적인 일이 벌어졌던 바, 경희궁에서 옮겨져 박문사 정문으로 쓰이던 흥화문(경희궁의 정문)은 요행히도 1988년 제 자리 근방으로 돌아왔지만,(☞ '잃어버린 광해군의 꿈 II'쿠리(庫裡, 창고와 승방)로 쓰이던 경복궁 선원전, 종각으로 쓰이던 환구단 석고각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 말하자면 박문사는 본당만 새로 지은 것인데, 1945년 11월 이것이 불타며 애꿎은 우리의 옛 건물까지 소실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박문사 본당 / 본당에는 영친왕이 쓴 '춘묘산(春畝山)'이란 편액이 걸렸다.(춘묘는 이등박문의 별호다) 춘묘산은 박문사가 세워진 언덕을 말함인데 이 언덕 왼쪽으로 환구단 석고각으로 쓰였던 전각이 보인다.
    쿠리로 쓰이던 선원전 / 경복궁 선원전 건물이었으나 1945년 11월 23일 박문사 본당에 화재가 나며 같이 소실됐다.
    박문사 전경 입구에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이 보인다. 저들은 경춘문(慶春門)이라 불렀다.
    박문사 정문으로 쓰이던 흥화문은
    다시 호텔신라의 정문으로 쓰이다 1988년 복원된 경희궁 앞으로 옮겨졌다.

     

    광복 후 박문사 자리에는 어색하게도 국가의 내외빈을 모시는 '영빈관'이 세워졌으나(1967년 2월 28일) 줄곧 적자로 운영되다 1973년 삼성의 페이퍼컴퍼니인 (주)임페리얼로 넘어가게 된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영빈관을 불하받은 (주)임페리얼은 일본 자금의 지원을 받아 호텔을 건립하게 되는데 그 이름을 차마 '제국호텔'이라 하지 못하고 '호텔신라'로 하였지만 설계는 우연찮게도 일본의 다이세이 건설이 맡았다. 박문사를 지은 오쿠라쿠미 토목이 2차대전 후 이름을 바꾼 회사였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박문사 본당의 자리에는 마땅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자리해야 했으며, 그 아래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장충단이 복원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은 그러지 못했으니 지금 그 자리에 호텔신라가 들어섬으로써 일제의 잔재가 깨끗이 청산되지 못했다. 드문 드문 발견되던 박문사의 흔적들은 영빈관과 한옥 호텔이 들어서며 다행히 사라졌지만 기분 나쁘게도 이등박문의 망령은 여태껏 그곳에 머물고 있다. 

     

    삼성은 이 호텔을 건립하며 니쇼이와이, 다이세이 건설, 오쿠라 호텔, 고이즈미 그룹 등 일본의 7개 기업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문인지는 명확히 연관 지을 수 없겠으나 2004년 6월, 일본 자위대 50주년 행사가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나, 기모노 착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한복을 입은 여성 고객은 입장이 불허되는(넘어지면 위험하다는 노파심으로써) 현실은 아직도 이등박문이 망령이 이곳을 떠돌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그렇지 않고는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근 숲 속에 버려졌던 장충단 비석도 1969년 돌아오긴 했으나 제 자리가 아닌 공원 내 수표교 근방에 자리 잡았다.(신라호텔와 박문사 부지는 정확히 일치해 장충단이 제 자리에 세워질 수도 없다) 비록 비석은 제 자리를 찾지 못했지만 제사는 부활돼 지금10월 8일(을미사변이 일어난 날)에는 '장충단추모제'가 열린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다시금 말하거니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장충단 공원의 장충단 비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다.
    '장충단'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썼다. 장충(奬忠)은 충의를 장려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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