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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19. 05:30

     

    비단 명성황후 시해사건뿐만이 아니라 구한말 개항에서부터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비극이었다. 위로는 국왕 고종과 왕비 민왕후(명성황후)가 오직 왕권에만 집착해 부국강병의 길을 저버렸고, 밑으로는 백성들의 자주의식이 없었다. 1894~5년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 관한 우위를 점하려 이 땅에서 박 터지게 싸울 때, 이 땅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곤 제 집 방 문짝을 떼어 산으로 지고 올라갔다 밤에 가지고 내려온 일뿐이었다. 전투 중에 혹여 방문이 훼손되면 찬바람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상태로 가면 국가의 문이 송두리째 없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나라 · 일본 간의 전투에서 의외로 일본이 이겼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고 타이완과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 조선에 대한 배타적 권리 또한 당연히 확보했을 터, 이제 남은 것은 조선에 대한 압박이었다. 그러나 그 압박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극동에서의 패권과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하하던 제국주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해 일본이 애써 확보한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주게 만든 것인데, 여기에 프랑스와 독일이 가세해 러시아의 편을 듦으로써 일본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된다. 극동에 러시아라는 뜻하지 않은 힘의 변수가 등장했던 것이었다.(이른바 삼국간섭)

     

     

    청일전쟁 전황도

     

    이 사건으로 일본은 체면이 망가졌다. 아니 체면뿐 아니라 전쟁의 실익도 거두지 못했으니 조선과 만주에서의 힘은 향배는 오히려 러시아로 기울게 되었다. 일본의 간섭에 시달리던 조선 정부도 이때를 노려 옳다구나 러시아 편에 서는데, 그에 앞장선 사람이 왕비 민왕후였다. 따라서 그녀는 일제의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 이에 결국 일제는 일국의 국모를 살해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는 바, 이것이 바로 1895년(을미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이른바 을미사변)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속의 명성황후
    아래 명성황후 사진과 싱크로율 높은 주인공 수애
    <조선비사 사천년>에서 찾은 민왕후의 얼굴 / '명성황후'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

     
    일본이 3국의 간섭에 요동반도를 돌려주고 무력하게 물러선 건 당연히 그들 나라를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일본의 국력으로 그들 세 나라와 맞서 싸운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래저래 그 분풀이 상대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만만한 조선이 눈에 거슬리게 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본은 미구의 적 러시아를 적극 지원하며 의지하고 있는 민왕후를 제거해야만이 속도 풀리고 일도 풀릴 것 같았다. 을미사변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일본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제국주의 속성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살펴보면 볼수록 참으로 어처구니없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론 너무 억울하고 참담해서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진다. 내가 '우리 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의 카테고리에서 이 사건을 늦게 다룬 이유도 실은 그 때문일 터, 그렇다고 민왕후가 시해된 역사의 가장 비극적 장소를 찾아가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아 그 비극의 장소를 찾아 구한말의 역사를 고증해보았는데, 때로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사건을 하나하나 쫓아가 보자.

     

    우선 민왕후를 죽인 무리는 어떤 놈들인가 알아보자. 그 가장 윗 대가리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로, 그가 조선에 와 있는 일본 낭인(浪人, 깡패) 조직을 조종해 경복궁 건청궁에 칩입, 고종을 협박하고 민왕후를 살해했다는 것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미우라 고로의 영웅심에 기인한 척살 사건이 이 사건의 본질인 양 알려져 있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크게 다르다.

     

    을미사변의 출발점은 일본 군국주의의 중심인 대본영(大本營)으로 그곳의 최고 우두머리 두 명, 즉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대장과 야마가다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신이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에게 살해의 밀명을 내림으로써 시작된다. 이에 미우라가 1895년 9월 1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대신해 신임 일본 공사로 조선에 건너오게 되는 것이니,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내용은 사실은 그 중간부터인 셈이다.

     

     

    두 원흉에 관한 책
    '세계사를 바꿨다', ''대일본제국을 세웠다'는 가와카미 소로쿠와 야마가다 아리토모에 대한 찬사는 일본 내에서의 그들의 위상을 짐작케 해 준다.
    <조선왕비 살해와 일본인>/ 민왕후 시해가 대본영의 계획임을 최초로 밝힌 재일동포 2세 역사학자 김문자의 책.(※표지 사진은 민왕후가 아님)

     

    다음 회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가와카미와 야마가다의 민왕후 살해 목적은 다가올 러일전쟁의 개전에 앞서 경복궁 앞  병조(兵曹) 내에 설치된 한성전보총국의 통신선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훗날 '정보전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가와카미 소로쿠는 과거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앞서 설치한 그 통신선을 확보함으로써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친러파 민왕후가 통신망의 사용을 허락할 리 없을 터, 아예 처단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가와카미는 자신의 계획을 가장 먼저 야마가다와 상의했고, 이어 총리 이토 히로부미, 노무라(野村靖) 내무상, 무쓰(陸奧宗光) 외무상, 요시카와(芳川顯正) 사법상과도 모의했다. 이토는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주한공사 이노우에를 야마가다가 추천한 미우라로 교체했다. 물론 민왕후 살해의 특명을 주어서였다. 

     

     

    조슈(일본의 지명) 3존 / (왼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다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이들 3인은 조선침략과 민왕후 살해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미우라는 조선에 건너오자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는 척 두문불출하며 불경을 왼다. 이에 일약 '염불 공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이것이 얼빵한 호인(好人)으로 보이기 위한 철저한 위장술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이렇듯 신임 일본공사에 대한 경계의 눈이 멀어지자 그는 곧바로 작전을 개시하였던 바, 부임 후 한 달이 지난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작전 회의를 연다.

     

    회의 참석자는 하바드와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비서 시바 시로(柴四郞), 공사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공사관 무관 오카모도 류노스케(岡本柳之助), 공사관 무관이자 조선군부 고문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로 미우라까지 총 6명이었다. 미우라는 왕비 시해를 위한 이 작전의 이름을 '여우 사냥'으로 명명했다.

     

    이 가운데 오카모도 소좌의 임무는 민왕후 시해를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조선훈련대의 소행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오카모도는 평소의 친분을 이용해 사건이 벌어진 10월 8일, 실제로 흥선대원군을 경복궁에 데려다 앉히는 수완을 발휘한다. 대원군이 끌려갔는지 자발적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서로의 증언이 달라 알 수 없지만 오카모도가 흥선대원군의 노탐(老貪)을 이용해 데려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오카모도는 일본군과 순사 30명을 데리고 대원군의 처소로 가 궁중에서 파견된 조선인 순검 10명을 포박해 창고에 가두고 대원군을 회유했다고 한다)

     

    ~ 다만 일말의 양심이었는지 아니면 늙어 몸이 말을 안 들었는지, 대원군은 자신의 처소인 공덕리 아소당(我笑堂)에서 1시간 정도 꾸물거렸다. 또 그를 옹위해 오던 오카모도 일행은 100명의 일본 수비대 제1중대와 아현동 고개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서로의 접선이 늦어져 경복궁 도착에 다시 1시간이 지연된다. 그로 인해 새벽 4시까지 마치기로 계획한 작전은 6시경에 끝나게 되었으며, 이에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미국 공사관 장교 윌리엄 다이 등이 사건의 목격자가 될 수 있었던 바, 왕비 시해를 조선훈련대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려는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새로 발견된 아소당 사진/ 1906년 이전 사진이다.
    새로 발견된 아소당 사진 / 아소당은 말년의 대원군이 유폐됐던 마포 공덕리 아흔아홉 칸 별장으로 현 동도고등학교 자리이다. 건물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근방에 금표(禁標) 하나만 남아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공덕리 금표 / 서울 지하철 공덕역 3번 출구 바로 앞에 있다.
    공덕리 금표 안내문
    아소당 자리에 조성된 소공원

     

    아무튼 작전은 그렇듯 극비리에 진행되었는데, 미우라는 그 선봉에 대본영에서 추천해 함께 온 미야모토 다케다로(宮本竹太郞, 명성황후를 최초로 찌른 놈) 소위와 서울의 일본 신문사인 한성신문사 사장 아다지 겐조,(安達謙藏, 일본 무뢰배들을 동원한 놈)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훗날 육군대신에 오르게 되는 자로 당일 동원된 놈들의 총지휘를 맡았다) 그 세 놈을 세웠다. 

     

     

    민왕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한성신문사 소속의 무뢰배 
    가운데 중절모 쓴 놈이 한성신문사 사장 아다치 겐죠이고, 왼쪽에 양복을 입은 놈이 하버드대 출신의 작가 시바 시로다. 이들은 물론이요 민왕후 시해자 56명의 명단 가운데 낭인으로 분류할만한 자는 없다. 낭인이란 말은 일본에서 만든 핑계일 뿐 일정 수준을 갖춘 정객(政客)들이 왕비 시해에 가담했음이었다.  

     

    현장을 총지휘한 구스노세 유키히코

    이 많은 등장인물들은 민왕후 살해에 일본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방증한다. 

     

     

    이윽고 디-데이(D-day)인 10월 8일, 뉘 늦게나마 도착한 흥선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자 미리 준비했던 긴 사다리가 담장에 걸렸고 일본 수비대가 담을 넘어 광화문의 빗장을 풀었다. 그러자 곧 이미 도착해 있던 일본 무뢰배와, 일본 수비대 제3중대, 미리 포섭된 반정부 조선 훈련대, 방금 도착한 일본 수비대 제1중대가 무더기로 엉켜 궁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때 안에서는 미국인 장교 다이가 지휘하는 조선인 시위대의 발포가 있었으나 쪽수가 밀려도 한참을 밀렸던 바, 조선인 시위대는 곧 무기는 물론 웃옷까지 벗어던지고 사방으로 달아났다. 새벽 5시 반 경이었다.

     

    ~ 시해에 조선훈련대가 가담한 이유는 훈련대가 일본군 교관에 의해서 길러진 친일 부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로 인해 해산된다는 위기감과 불만이 팽배해 있던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미우라는 조선훈련대를 왕비 시해범으로 만들기 위해 10월 10일을 디-데이로 삼았으나 그들의 해산령이 일찍 내려지는 바람에 10월 8일로 거사를 앞당기게 되었다. 시해에 가담했던 훈련대 대대장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 등은 이로 인해 만고의 역적으로 이름이 남는다.

     

     

    우범선과 그의 가족

    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서 민왕후 작전에 적극 가담했던 우범선은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도피한 후 일본인 하다 사카이와 결혼해 아들 우장춘을 낳는다. (우범선은 이후 고종이 보낸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나 우장춘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해'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된다는 거.... 왠지 찝찌름)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춘생문(경복궁 동북문)과 추서문(경복궁 서북문)에서 어정거리고 있던 한 무리의 일본인들도 곧 담을 넘어와 조선인 앞잡이들이 안내하는 건청궁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건청궁 앞에서도 연대장 현흥택이 지휘하는 조선인 시위대와 일본인 폭도들의 충돌이 있었으나 곧 광화문 쪽의 일본 수비대가 몰려들며 총을 쏘아대자 조선인 시위대는 모두 신무문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10월 8일 새벽 광화문을 통과한 일본군과 무뢰배들은

     

    경회루의 왼쪽 길을 택해

     

    곧장 경복궁 가장 뒤쪽의 건청궁에 이른 후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을 뒤지며 민왕후를 찾았다.(사진은 1900년대 초에 찍은 것이며 뒤에 보이는 서양식 건물은 고종이 1888년 건립한 관문헌이다. 건청궁은 1909년 경복궁 내의 다른 전각들과 함께 헐렸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구스노세 유키히코의 총을 맞고 쓰러졌고 부하 우범선이 쓰러진 상관에게 총질을 했다. 이후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 수비대는 건청궁 밖에서 경계를 서고, 건청궁 안은 공사관 군인들과 아다지 겐조가 동원한 무뢰배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군인들과 무뢰배는 임금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처소 곤녕합(坤寧閤)으로 몰려들어 민왕후를 찾기 시작했다.

     

    먼저 장안당에 칩입한 무뢰배들은 고종과 왕세자, 왕세자빈을 협박하고 윽박지르며 왕비의 위치를 다그쳐 물었는데, 그 과정에서 고종은 무뢰배들이 찍어 누르는 힘에 의해 무릎 꿇려졌고, 세자는 상투를 붙잡혀 패대기 쳐진 후 칼등으로 목덜미를 세게 얻어맞았다. 이 소란을 목격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재빨리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으로 달려가 궁녀와 민왕후를 깨웠는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무뢰배들이 곤녕합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이경직은 곧장 그들을 막아섰으나 총과 칼을 연이어 맞았고,(칼을 휘두른 놈은 한성신문사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미처 피하지 못한 민왕후 역시 칼을 맞고 죽는다.(최초로 찌른 놈은 미야모토 다케다로 소위)

     

    이상은 모든 기록과 구전이 대동소이하고, 그 이하 민왕후가 옥호루에서 칼을 맞고 시해되었다는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하의 기록은 모두 옳지 않은 듯하니 최근에 발견된 <한국왕비살해 일건(一件)>이라는 시해 보고서 '제2권'에는 ①건청궁 내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왕비를 끌어내었고 ②그녀를 장안당에서 10m 정도 떨어진 마당으로 끌고 가 살해하였으며 ③시신을 옥호루에 잠시 두었다가 ④건청궁 밖 녹산에서 불에 태웠다는 설명과 함께, 살해지점과 불에 태운 지점이 그림으로 표시됐다.

     

    ~ 이 보고서의 작성자는 당시 영사관 일등영사였던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로, 사건 발생 두달 보름 만인 12월 21일 이 문서를 작성해 본국에 자세한 보고를 했다.(이 기밀 문건은 2013년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것임)

     

     

    <한국왕비살해 일건> 표지와 침투 경로를 그린 지도

     

    <한국왕비살해 일건>에서 말하는 민왕후 시해장소(가운데 X표 지점)

     

    건청궁 부감

    화살표 된 곳이 왕비 침전인 곤녕합이다.

     

    위 보고서에 의해 밝혀진 침입로

     

     

     

    이보다 더 자세한 기록은 <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저자 김영수가 모스크바 국립문서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베베르(당시 러시아 공사)의 보고서로, 이 문서에는 민왕후의 죽음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왕비를 바닥에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발로 세 번 짓밟아, 찔러서 죽였다.”

    그런데 이 기록은 주한영국총영사 힐리어가 남긴 “왕비는 뜰아래로 달렸지만, 추적당해 쓰러졌다. 그녀의 암살자는 그녀의 가슴 위에 반복적으로 그의 칼로 그녀를 찔렀다.”는 기록과도 매우 유사한 바, 어쩌면 민왕후 죽음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인지 모른다.

     

    김영수 씨가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찾아낸 '경복궁 10월 8일 현장도'.

    이 기록에 따르면 민왕후가 살해된 곳은 곤녕합과 장안당 사이의 복도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동안 민왕후가 시해된 장소는 곤녕합의 왕비 침전이나 옥호루로 알려져 왔으나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본 결과 옥호루나 곤녕합은 시해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이에 다음 회에서는 자세한 현장 사진과 함께 시해 장소를 조명해 보도록 하겠으며, 아울러 김진명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 이후 새삼 주목받고 있는 당시 무뢰배들이 행한 민왕후 강간과 시간(屍姦)에 대해서도 집중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

     

     

    프랑스 주간지 <르 주루날 일뤄스트레>가 표지 기사로 다룬 조선왕비 시해사건 / 한 놈은 칼을 휘두르고 다른 놈은 가랑이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무뢰배의 한 명이었던 이시즈카 에조가 상부에 올린 시해 보고서 / 위 대목 이후 민왕후의 국부검사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II) - 시간(屍姦)은 정말로 있었나?'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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