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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I) - 시간(屍姦)은 정말로 있었나?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25. 00:37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과 그 옆 쪽에 있던 고종의 서재 집옥재, 그리고 빈전(殯殿)으로 사용된 태원전 지역은 예전(2009년 이전)에는 군인과 고위관료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쿠데타의 무리들이 청와대 보호의 명목으로 신무문과 통하는 그 일대에 30경비단 사령부를 두고 계속 군사를 주둔시켰기 때문인데,(이른바 5160 부대) 그 사령부에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12. 12 쿠테타까지 모의했으니 애써 좋게 표현하자면 혁명의 요람이요 성지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당시 30경비단의 면적은 약 2만 평, 장세동 대령이 단장이었다)이에 1979년 신군부가 12. 12 쿠테타를 일으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할 때 필동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지금 남산한옥마을 일대)의 장태완 사령관은 30경비단을 포격해서라도 반란을 진압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했으나 하나회의 세력은 수경사에도 침투돼 있었던 바, 여기서도 곧 하극상이 벌어진다. 최후의 보루였던 장태완 사령관마저 부하들에게 체포되자 전두환의 신군부 무리들은 보안사 마당에서 역사적인(?) 기념 촬영을 한다.(이때 장태완 사령관이 30경비단을 정말로 포격했다면 당연히 문화재는 박살났겠지만 신군부 역시 박살났으리라 본다)
호통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 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12.12 사태 때 장태완 사령관이 실제 했던 말)
겁 먹은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고민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별 중의 별, 장태완 장군
부하들에게 체포된 장태완 사령관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가족들도 고통을 받게 된다. 결국 부친은 곡기를 끊어 아사하고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했던 아들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으며 아내는 투신자살했다. 장태완은 이후 재향군인회 회장에 선출되며 명예회복하였고 16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다 2010년 사망했다.
똥별들의 어찌됐든 역사적인 기념사진
※ 이 똥별들의 이야기인 12. 12 사태에 관해서는 기록이 정리되는 대로 포스팅할 예정임.
사망자(노란 장미님의 블로그에게 발췌)
최근 설치된 광화문 광장의 전두환 상
2020년 4월 25일 전남 도청 앞으로 옮겨졌다.
빈전(殯殿)인 태원전 지역
임진왜란 이전에는 없던 곳이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건립됐다. 1895년 명성황후의 빈전으로도 쓰였다. 이후 다시 철거되어 30경비단 시절에는 없었으나 2005년 복원되었다.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 지역
가운데 중국식 건물이 집옥재로 1873년(고종 10년) 완공됐다. 그 오른쪽이 협길당, 왼쪽 팔각집이 팔우정이며 팔우정 뒤로 뒤로 보이는 성문이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다.
보다시피 신무문을 나가면 바로 청와대다.
얘기가 이상한 데로 튀었지만, 좌우지간 건청궁 지 일부와, 집옥재, 태원전 지역은 일반인 접근금지 지역이어서 예전에 경복궁을 가면 향원정 뒤 샘물(열상진원) 부근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누구나 화장실에서 일을 덜 보고 나온 듯한 기분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분은 외국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는지 과거 동행했던 도쿄 인터내셔널 스쿨의 영어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 담 너머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이에 (당시는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5.16 군사 쿠데타 말이 나왔고, 또 조선의 왕비가 일본인에게 살해된 건청궁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그 선생이 굳이 당시의 흔적을 보고 싶다 하여 최대한 가까이 가 보았는데, 그때 국립현대미술관 바로 옆 구석에 세워져 있었던 명성황후조난지 비석이 왜 그리 생뚱맞고 처량스레 보이던지...... (그 표석은 1951년 건립된 이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증언해온 유일한 유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무슨 마음에서인지 모르겠으나 그 일본 여선생은 비석 앞에서 잠시 묵념을 올렸는데, 오늘(1월 19일)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새삼 그때 생각이 난다. 그 여선생이 신격호 회장의 딸 신유미 양을 가르치던 선생이었던지라.....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녀가 왜 묵념을 올렸는 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일본에서 자라긴 했으되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으므로..... 혹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한국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외국인이 아니었을까?
예전의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1909년 일제가 건청궁을 부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지었다. 이 건물이 해방 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쓰이다 1998년 철거됐다.
명성황후 시해장소에 세운 비석
1951년 6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명성황후조난지지')를 받아 명성황후 시해장소인 옥호루(추정) 근방에 세웠으나(추정) 2006년 건청궁이 완공될 즈음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여주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 장소가 명성황후 조난지였는지는 의문이다. 그 이유를 왼쪽의 국립현대미술관 벽이 말해준다.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지금은 건청궁이 원래대로 복원되었음에도(2006년 서양건물인 관문각은 빼고 복원됨) 명성황후의 시해장소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리고 그곳을 찾자면 여전히 외국인의 기록에 의존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 외국인들의 기록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기록은 모두 미명(未明)에 벌어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의 재구성인데다 게다가 그들은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록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완전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기록은 그것뿐인 바, 그로부터 상황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에 의존에 상황을 더듬어 보자면, 당시 명성황후의 얼굴을 전혀 모르는 일본 무뢰배들은 궁녀들을 협박하거나, 궁녀들의 가슴을 풀어헤쳐 늘어진 젖을 찾거나 했고,(세자에게 지목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가운데 말을 안 듣는 사람에게는 무차별의 폭행이 가해지고, 또 살해까지 서슴지 않는 지옥 같은 마당이었다. 이런 가운데 무뢰배에 의해 죽은 누군가를 명성황후를 오인할 수도 있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각각의 기록 중 어느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인데, 그 중 가장 믿음이 가는 것은 영국 총영사 힐리어의 보고서이다.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 (조선군 복장을 한) 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세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 (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이 잘리는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왕후의 의녀(女侍醫)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건청궁과 명성황후 시해 개요도
화살표는 명성황후의 도주 방향이며 번호는 시해 추정 장소이다.(번호는 위 그림 속의 지점, 점선은 아래 설명 참조)
명성황후가 빠져나간 쪽문
왼쪽 건물이 옥호루 및 곤녕합과 연결돼 있는 정시합(正始閤)이다. 명성황후는 각 복도로 연결된 이 건물까지 내달려 계단을 내려와 쪽문을 빠져나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3 또는 4 지점에서 붙잡혀 살해된다.
화살표는 명성황후가 빠져나온 쪽문이며 왼쪽 기단 위에는 서양식 건물 관문각이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장소에 관한 4가지 설 중 힐리어의 증언은 내가 볼 때 가장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고 나머지 설이 거짓은 아니니 무뢰배들에 의한 궁녀의 죽음이 그림 ① ② ④, 혹은 그밖의 장소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힐리어의 증언은 내가 I편에서 인용한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시해 보고서인 '한국왕비살해 일건(一件)'의 내용과도 거의 흡사하다. 즉 우치다의 보고서는, 건청궁 내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왕비를 발견했고, 그녀를 장안당에서 10m 정도 떨어진 마당으로 끌고 가 살해하였으며, 시신을 옥호루에 잠시 두었다가, 건청궁 밖의 녹산에서 불에 태웠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우치다와 힐리어의 증언이 명백히 상충되는 부분은 명성황후 시해 장소뿐인데, 이 장소 ③과 ④는 같은 곤녕합의 뒤뜰로서 목격자의 목격 지점과 각도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질 뿐, 거의 같은 장소로 보아도 무방할 듯 여겨진다. 다만 힐리어의 증언에서 빠진 것은 명성황후가 옥호루를 통해 도주해 사망 장소까지 간 경위인데, 같은 곤녕합 건물인 정시합(正始閤) 문으로 나가면 바로 ③과 ④ 지점으로 연결되는 쪽문을 만날 수 있으므로(위 사진 참조) 뜰 아래로 뛰어나갔다고 설명한 것 같다.
왕과 왕비의 침실이 있던 건청궁 입구
을미사변 당시의 건청궁 현판
건청궁 입구 안내문
왕의 침실인 장안당
왕비의 침실인 곤녕합
곤녕합 오른쪽의 다락 형식의 누각은 따로 옥호루라고 불린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왕후는 이 누각의 안쪽 복도를 달려
(옥호루 복도)
오른쪽으로 보이는 쪽문을 빠져나갔지만,
(쪽문에서 안쪽을 찍은 사진/명성황후는 앞에 보이는 '정시합' 계단을 뛰어내려와 이 문으로 나갔다)
관문각 앞 통로에서 붙잡혀 처참히 살해되고,(쪽문에서 바깥쪽을 찍은 사진)
시신마저 이곳 녹산에서 불태워진다.
곤녕합 앞의 잘못된 안내문
명성황후 시해장소가 곤녕합인 것처럼 써 있는 이 안내문은 설사 옥호루 복도에서 살해되었다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채택한다 하더라도 사실과 맞지 않는 듯.('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는 장면 또한 당연히 없었다)
상황을 재현하자면, 괴한의 침입을 알리는 이경직의 외침에 명성황후와 궁녀들은 잠에서 깨어났고, 곧 이어 들이닥친 무뢰배들에 의해 이경직이 처참하게 죽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르는 무뢰배들은 칼로 궁녀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혹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 궁녀들의 가슴을 풀어 헤쳐 젖이 처졌을 40대 여인을 찾는 둥의 소동을 벌이는데,(곤녕합으로 몰려든 무뢰배는 20명 정도로 이들이 서너 패로 나뉘어 제각각 난리를 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소동 중에 휩쓸려 있던 명성황후가 재빨리 옥호루 쪽으로 달아났던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눈들이 많았더지라 금방 포착되었고, 이에 명성황후는 뒤쫓아 온 무리들에게 잡혀 가슴을 여러 곳 찔려 죽는데, 그 모양새가 왕후라 짐작되기 충분했다. 하지만 죽은 자가 왕후인지 궁녀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무뢰배들은 곤녕합의 나이 비슷한 궁녀들을 몇 명 더 죽여 스스로 확신감을 가졌던 것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때 최초로 명성황후를 벤 놈이 미야토모 다케다로 소위이고, 데라자키 다이기치(寺崎泰吉)라는 놈이 또 다시 칼을 휘둘렀다.
후쿠시마 구시다 신사에 보관 중인 히젠도
토 카츠아키(藤勝顯)라는 낭인이 을미사변 때 사용한 칼을 메이지 41년(1908) 구시다 신사에 기증했다. 칼집에 '단칼에 번개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一瞬光刺老狐)는 문구가 써 있는 이 칼은 지금은 신사박물관 측에서 공개를 원천봉쇄하고 있어 실물을 볼 수 없다. 명성황후를 찌른 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황상 궁녀를 찌른 칼일 가능성이 높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V-미야모토와 우범선의 종말')
위 힐리어의 글에서 죽은 자가 왕후라는 것은 왕후의 주치의 격인 시의녀의 행동으로 알 수 있다. 누구의 보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곧이어 현장에 나타난 미우라 공사는 명성황후의 사망을 확신하였던 바, ③의 장소, 혹은 옥호루에 유기됐던 시신은 미우라의 명령에 따라 건청궁 밖 녹산에서 불태워진다. 미우라는 그에 앞서 장안당의 고종을 찾아가 명성황후의 폐위 공표와 친일내각에의 조각(組閣)을 협박했는데, 그 옆에는 일본군이 데려온 흥선대원군이 멍하니 서 있었다.
무뢰배들은 증거를 남기지 말라는 미우라의 명령에 따라 장작 위 불붙은 시신 위에 계속 석유를 부어대다 오전 9시 반쯤 현장을 벗어났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훈련대 제 2대대장 우범선이 궁궐을 순시하던 중 타다 남은 유골을 발견하여 향원정 연못에 버리려는 것을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가 혹시 왕후의 것인지 모른다 하여 이를 수습해 멀리 북악산 오운각 서쪽 봉우리에 묻었다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는 명성황후 시신에 대한 모욕건으로, 이때 무뢰배들은 명성왕후를 찌른 후 강간을 자행하고 그러다 사망에 이르자(한 여섯 명째에 이르러) 나머지 15명 정도는 시간(屍姦)했으며, 또 그짓이 끝난 후에는 전원이 모두 한번씩 시신에 칼을 꽂고 젖가슴까지 도려냈다는 차마 믿기 힘든 이야기에 대한 확인이다.
이 이야기가 나온지는 사실 꽤 오래로 1964년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建太郞, 1905-1077)가 <민비사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 그 시발점이다. 이후 1966년 이와나미(岩波書店) 출판사에서 <일한합병소사(日韓合倂小史)>라는 책을 내며 이 믿지 못할 이야기가 퍼졌고, 1988년 일본의 유명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가 <민비살해(閔妃殺害)>라는 책을 내며 다시 불씨를 지폈는데, 결정적으로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때) 이 이야기의 근원이라는 이른바 <에조 보고서>가 세상에 나옴으로부터였다.
<에조 보고서>는 을미사변 후 조선정부 내부(내무부) 고문이라는 명예직을 지닌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라는 자가 일본 법무장관 스에마쓰 가내즈미(末松謙澄)에게 명성왕후 시해에 관해 별도로 올린 장문(長文)의 리포트로서, 을미사변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이 담겨 있다.(에조는 민비시해 사건에 관여했고 건청궁 곤녕합까지 들어갔던 장본인이기도 하나 강간이나 시간은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그 전문(全文)을 읽어보니 소문과 달리 <에조 보고서>에는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하지만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있는 바, 판단은 여러분께서 내려보시길 바란다.
殊に野次馬連は深く內部に入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刃傷を及し且つ裸体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右は士官も手傳へたるも主として兵使外日本人の所爲に系るものの如し大凡三時間余を費して右の荒仕事を與したる後....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우스우면서도 또한 분노할 일)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시신을) 태워 없앴는데 이 광경은 차마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습니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 또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하는데, 이상은 (조선 훈련대) 사관의 도움을 얻기도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의 소행인 듯합니다. 대략 3시간 쯤 이런 짓을 저지른 후.....<에조 보고서> 문제의 부분
<민비암살>
1988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재조명한 위 책의 저자 쓰노다 후사코는 <에조 보고서>를 인용하며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었던 일본인으로 설명했다. ※표지 사진은 명성황후가 아님
<황태자비 납치사건> 첫번 째 에디션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모티브로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쓴 김진명은 이 소설에서 <에조 보고서>를 국내 최초로 알렸다.(초판 발행 2001년) 하지만 이 책은 일본 정부의 간섭으로 일본에의 역수출이 금지됐고, 이에 김진명은 더욱 강한 임팩트를 담은 아래 책을 새로 출간했다.
<신(新) 황태자비 납치사건>
김진명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 난징 대학살'을 모티브로 새로 쓴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두번 째 에디션 격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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