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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다시 본 북두칠성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4. 4. 20:13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무렵이면 안 의사의 유언을 받들지 못한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늘 가슴 아프다. 그 유언을 상기하자면 아래와 같다.(잠시 사정을 말하자면, 8.15 후 남북이 나뉘었고 그 남북 모두 해방 후의 복잡한 정국을 수습하느라 유해 송환에 차일피일하였다. 그러다 뒤늦게 남북합동의 대책팀이 꾸려져 안 의사의 유해 송환을 기도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을 늦었으니 여순감옥 사형수 매장지였던 곳은 상전벽해되어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 안중근 의사 유언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내가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이유를 앞서 '민족의 얼, 북두칠성(II)'에서 짧게 언급한 바 있다.


    ~ 나라가 이런 꼴이었던 바, 결국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 망국의 길목에서 한 사람의 지사(志士)가 출현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주었으니 바로 안중근(1879-1910)이었다. 그는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선진교육을 등한시한 때문이라 여겨 1906년 평안도 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고 천주교 계열인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였으나, 그것이 너무 늦다는 생각에 결국 무장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1907년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8년 특파독립대장 겸 러시아 지구군사령관으로서, 함경북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시켰다. 이어 1909년 만주 하얼빈에 잠입,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다지기 위해 러시아 내무부 장관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온 이또 히로부미를 그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였다. 그 역사적 쾌거를 이룬 안중근 의사의 아명(兒名)과 자(字)가 응칠(應七)이다. 태어날 때 배에 7개의 점이 있었으므로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난 아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견강부회라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저 북두칠성의 민족적 정기를 이어받아 이룬 쾌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여순 감옥에 수감된 그 해 12월 13일부터 이듬해인 1910년 3월 15일까지 자서전격인 옥중 수기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를 쓰고 그해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역작이었던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그때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긴 것인데 그것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3월 26일 여러 언론에서도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던 바, 이제는 모두 유해 찾기를 포기한 듯싶다. 하긴 그것이 110년 전의 일이요, 지금은 유해가 묻힌 장소가 아파트 단지로 변했으니 노력이 소용이 없을 법도 하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감옥



    마지막 면담을 하는 안중근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해 사형 후 그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몰래 암매장하였다.



     여순감옥은 지금 박물관 겸 대련시 근대사연구소가 되었다.



    안 의사가 묻힌 여순감옥 사형수 매장지



    안중근 의사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보다시피 대규모 아파트 단지 부지가 되어 수풀이며 언덕이 싸그리 밀어졌다. 그것도 2008년에 촬영된 사진이니 벌써 10년도 넘은 일인 바, 지금 그곳에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을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사실 이제는 희망마저 날아간 셈이다. 그래서 해마다 서거일이면 죄송스런 마음을 감출 길 없는데,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동영상이라도 찾고자 노력했지만(☞ '명성황후 진짜 얼굴 - 진영논란에 종지부를 찍자') 역시 거둔 것은 없다.


    그런데 김 아무개가 소개한 정 아무개란 중국교포는 왜 아무런 연락 없이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내가 사기를 당한 것인가? 발품을 꽤 팔았고, 마음 고생은 했지만 금전적으로 손해본 것은 없으니 사기당했다고 할 수는 없을, 그 황당한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다.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학교 선생을 한다는 정 아무개는 내게 안중근 의사의 안 알려진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필름이냐 물었더니 그건 말할 수 없다고 하는 품새가 전형적인 중국 장사꾼이었다.(하지만 그는 분명 조선족이다) 아무튼 일단 만났는데, 60줄에 가까워 보이는 이 중늙은이는 안중근 의사의 자료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대뜸 독립운동을 한 사람 중에는 북한사람이 훨씬 많다는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아마도 안중근 의사의 고향이 황해도임을 말하려는 뜻이리라 좋게 이해했지만 이 양반이 또 다시 남북한을 운운했다.


    안 되겠다 싶어, 청산리 전투의 주역 김좌진 장군은 충청도 홍성 사람이고 윤봉길 의사는 예산 사람이라고 받아치자 갑자기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 듣다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그때는 남북한이 나뉘기 전인데 남한 사람, 북한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저 이데올로기가 다를 뿐, 같은 한민족인데 왜 남북한을 갈라 편을 듭니까? 아니, 그보다 그와 같은 얘기를 하는 저의가 대체 뭡니까? 뭐 다른 뜻이 있냐, 이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나가자 정 아무개 선생은 갑자기 낯빛이 벌개지며 "다른 뜻은 무슨 다른 뜻입네까? 거저 력사가 그렇다는 거이지"하더니 다시 연락하겠다며 휙하니 일어서 나가버렸다. 싱겁게도,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접촉이었다. 이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다리던 한참 동안은 뭔가에 홀린 듯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특별히 손해본 것은 없었음에도 그간 마음 설랬던 것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했다. 김 아무개와 정 아무개 모두가..... 지금은 '살면서 누구나 한 두번 쯤은 겪게 되는 이상한 일'로 정리했지만 이맘때 쯤에는 꼭 그 일이 생각난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심란할 즈음에 마음을 달래주는 사진 한 장을 만나게 되었다. 사진작가 김진석이 러시아 연해주의 작은 도시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를 배경으로 찍은 북두칠성 사진이었다.(김 작가는 고려인의 자취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1년 넘게 사진 작업을 해왔다고 하는데, 안 의사의 어릴 적 이름이 안응칠이란 점에 착안해 안 의사의 상징인 '단지동맹비' 위에서 빛나는 일곱 개의 별을 어렵사리 사진에 담아냈다고)



    '단지동맹비' 위에 빛나는 북두칠성

    안중근을 비롯한 11명의 지사는 이곳에서 손가락을 끊어 국권회복을 맹세했다.



    '단지동맹비' 위에 빛나는 북두칠성

    이 사진은 <연합뉴스>가 작가의 동의를 얻어 독자들이 알아보기 쉽게 포토샵을 이용해 하얀 선을 그은 것이다. 오른쪽 바닷가 쪽으로 크라스키노 시의 불빛이 빛난다.


    '단지동맹비'의 위치



    숭의학원 내에 있는 우리가 잘 모르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



    동상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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