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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 진짜 얼굴 - 진영(眞影) 논란에 종지부를 찍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 20. 06:13

     

    명성황후의 사진이 매우 귀한 탓에, 또 그나마 진위(眞僞)가 불분명한 탓에 지금껏 조선의 마지막 국모의 얼굴은 미궁에 휩싸여 있다. 명성황후의 사진이 귀한 데는 통설이 분분한데, 나는 일제가 그녀의 사진을 모두 없앴기 때문이라 여기고 있다.(아다시피 일제는 일본 낭인들을 동원해 조선의 국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아무튼 그 때문에 아직도 진영(眞影) 논란의 계속되고 있는 바, 나는 오늘 그 소모적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마음에서, 더불어 새로운 제안을 하고픈 생각에서 아래의 책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을 게재하게 되었다.(이 책은 과거 청계천 고서점에서 구입했다)

     

     

    이규완 저 '조선사천년 비사'
    저자 이규완은 일본 무관학교를 졸업한 14명의 청년 무관, 자칭 14장사 중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여 박영효의 휘하에 있다가 김옥균을 소개받으며 갑신정변에 투신하게 되는데, 박영효와 달리 김옥균은 자신을 환대해 그와 밥을 같이 먹고 한 일본 속에서 자며 국사를 논한 얘기, 그와의 팔씨름에서 일부러 져 준 얘기 등이 삽화로써 실려 있다.

     

    이 '조선사천년 비사'라는 책은 김옥균을 따라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이규완이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격동의 구한말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역사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의 한 챕터('갑신대란·난의 회상기')에는 자신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개화파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갑신년(1884)의 쿠데타, 이른바 갑신정변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정변이 과정을 자세히 서술돼 있는데, 위의 저자 사진 주변의 글에는 그 44년 후인 정묘년에 옛 일의 회상하며 책을 썼다고 돼 있는 바, 탈고가 1927년임을 알 수 있다. 

     

     

    책에 실린 김옥균의 사진(당 33세)
    책에 실린 박영효의 사진(당 24세)
    책에 실린 서광범의 사진(당 23세)

     

    또한 이 책에는 '갑오 동학란 잡기'라는 제목으로 동학혁명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는데,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이 난을 일으키기 전,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으며 그와 함께 국사를 암중모색했다는 역사서에 없는 흥미로운 사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책 70쪽 '임오군란 회상기'에 게재된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이 문제의 사진은 같은 챕터의 흥선대원군 사진에 이어 등장한다. 

     

     

    책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명성황후'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거의 확실한  명성황후의 사진 /  위의 사진과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찍은 사진으로 보이며(1866~7년경)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건판 사진이다.(한미사진 미술관 소장. 16.3 x 10.7cm)

     

    사실 이 책에는 그리 많은 사진이 실려 있지 않아서, 인물 사진으로는 위에서 말한 사진과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초대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사진 등이 전부이다. 이것을 보면 저자는 인물 사진의 선정에 신중을 기했음을 알 수 있는 바, 위의 명성황후 사진이 진본임에 힘이 실린다. 앞서 말한대로 저자는 김옥균 등의 인물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자이다. 따라서 그가 직접 명성황후를 만났을 가능성은 적다 하더라도 그녀에 관한 많은 자료들(사진이나 풍문)을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잘 알려진대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명성황후의 집요한 살해 공작으로 결국은 피살되어 한강 양화진에 목이 내걸린다.(* '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영 제국이 시작되다' 참조) 나머지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대부분 죽거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저자도 회고담에서 갑신정변의 후일이 순탄치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시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당의 화살을 피하기 힘들었음을 알 수 있는 바, 명성황후가 죽기 전까지는 그녀의 향배에 대한 이목을 거두지 못했을 성싶다.(본인은 이를 근거로 위 사진을 명성황후의 진영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또 위의 사진은 당대 외국인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영국인 이사벨 비숍 여사를 비롯한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얼굴은 길고 이마는 높고 코는 가늘며, 야무진 입과 아래 턱에는 결단력과 개성이 드러난다..... 광대가 튀어나왔으며, 눈썹은 아치 모양에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났다.....'

     

    그리고 위의 사진은 명성황후 얼굴이 최초로 등장한 책 이승만의 '독립정신'(1910년)에도 실렸으며, 이후로도 박은식의 '한국통사(1917년)' 등에도 같은 사진이 게재된 바 있다.(따라서 위 사진은 이후 오랫동안 명성황후의 진영이라고 의심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1975년 이후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명성황후의 진영이라고 하는 사진들이 발견되면서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아래 사진은 그 대표적인 두 가지이다. 

     

     

    1975년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뒤몽'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

     

    명성황후 진영 논란에의 불을 지핀 위의 사진은 1904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잡지 '르 뚜르 뒤몽'의 조선 기행문 'La Coree'에 딸린 인물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이 사진이 조선의 황후로 소개되었던 바, 한때 이 사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성황후의 진영으로 판명되어 국정 교과서에까지 실렸었다.(하지만 당시에도 버선발 차림의 격식 등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이 사진은 1894년 미국에서 발간된 잡지 '드모리스트 훼밀리 메거진(Demorist's Family Magazine) ' 11월 호에 전재(前載)된 사진임이 밝혀졌고, 사진 속 주인공도 '시중드는 조선 왕비의 상궁(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으로 명시돼 있었다. 이어 이 사진의 출처가 조선을 위해 봉사한 선교사 호머 헐버트의 '한국 견문기' 초고임이 밝혀졌던 바, 지금은 그저 해프닝으로 인식되고 있다.(그럼에도 당시의 지대했던 사진의 파괴력은 지금도 그 힘을 발휘해 여지껏 이 사진을 근거로 한 같은 머리 모양새의 모습이 명성황후의 얼굴로 활용돼 진다)

     

     

    '드모리스트 훼밀리 메거진'에 실린 같은 사진

     
    다음으로 세상을 달군 사진은 1893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잡지 '피가로 일루스트레' 10월 호에 실린 '조선의 왕후, 민씨(Min, Roi de  Coree)'라고 하는 사진이었다. 부채를 들고 있는 다소 표독스러운 표정의 이 사진 역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하지만 이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찍힌 것임이 문제가 되었고,(그 배경으로 인해) 옷차림도 황후의 것으로 보기에는 격이 낮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후 이 사진의 출처가 1891년 미국 국립미술관이 발행한 보고서 '코리아 컬렉션'임이 밝혀졌고, 거기에는 사진 속 주인공이 '궁궐에서 시중 드는 여인(Korean serving woman in the palace)'으로 소개돼 있었던 바,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2010년 한국에 소개됐던 '조선의 황후 민씨'의 사진

     

    명성황후 진영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타 국적 불명 형상의 사진들도 몇 차례 언론을 탔다. 하지만 여기서 그 사진들을 일일이 게재하는 것은 불필요할 듯하며, 명성황후의 공과를 여기서 열거함도 적당치 않을 듯하다. 명성황후가 당시의 조선을 어떻게 이끌었든 그녀는 분명 조선 궁궐 침실에서 일본 무뢰배의 칼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고, 그 시신마저 조선의 궁궐 뜰에서 불태워졌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명성황후는 추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이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은 목격자였던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 의해 증언되었고,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 그리고 시해에 가담했던 자들의 회고록 및 보고서 등에 기록돼 있다. 이 중 일본측 자료를 종합해 분석해보면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 대본영(大本營)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대장과 야마가다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신이 주도했고 그 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따라서 이제껏 우리가 주범으로 여겼던 주한일본공사 미우라는 단지 종범이었으며 명성황후를 가장 먼저 찌른 미야모토 다케다로(宮本竹太郞) 소위는 그야말로 단순한 하수인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V')

     

     

    러 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이 설계 건축한 독립문
    명성황후를 살해에 가담한 한 성신문사 소속의 무뢰배 / 조선국 일본공사 미우라 고조의 사주를 받은 이들은 조선의 국모를 무참히 시해하고 그 시신까지 불태웠지만 이들 중 처벌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저 이들에게 협조한 조선인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만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인 자객에 의해 피살됐을 뿐이다.
    에조 보고서(부분) / 차마 필설로 옮기지 못할 천인공노할 기록이 담겨 있다.

     

    다행히도 조선에도 인물이 있어, 훗날 안중근 의사는 이같은 일제의 만행을 단죄하였다.(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법정에서 그의 죄 15개를 들어 공박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대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였다. 을미사변의 정점에 이또가 있음을 정확히 본 것이다) 그리고 안 의사의 거사 광경은 당시 하얼빈 역사에서 이토 히로부미 방문을 촬영한 러시아 기사 코프지에프의 필름에 생생히 담겼다. 그러나 지금은 이 역사적 광경을 볼 수가 없다. 훗날 이 동영상 필름을 입수한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하는 장면을 잘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 코콥체프와의 회담을 위해  러시아 지배지였던 하얼빈을 방문한다. 그의 방문 목적은 러 시아의 만주 지배 계획을 빵꾸내는 것이었지만, 그 전에 몸뚱이가 빵구나고 만다. 화살표가 이토  히로부미로, 사진은 그가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열차에서 내려오는 모습인데, 바로 이 직후 안중근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오래 전 KBS에서 스페셜 다큐를 방영한 바 있다. 그리고 결론으로 여순감옥 사형장 근처에 묻힌 안 의사의 시신과 함께, 따로 존재할 가능성이 짙은 저격 장면의 원본 동영상을 찾아야 한다는 간절한 외침을 담았다. 이후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한 '원본 영상 찾기 운동'이 벌어졌지만 지금은 시들해진 상태이다. 하긴 그게 10년 전의 일이니..... 차제에 말이거니와 이제는 명성황후 진영에 대한 관심은 그만 묻고 그 시선이 안 의사 의거 동영상 찾기에 모아졌으면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11월 21일자 기사를 통해 '한 러시아인(코프지에프)이 촬영한 이 활동사진에는 안중근이 뛰어나와 7연발 단총으로 이토를 저격하는 광경과 이등박문 및 비서관 등이 쓰러지는 장면이 정밀히 찍혀 있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이후의 여러 보도 매체를 통해 이 필름의 국제간 거래 소식이 전달되었던 바,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동영상의 또 다른 복사본, 나아가 원본이 보관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영상을 찾는 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개연성이 짙은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는 일보다도 훨씬 쉬울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에서 자신의 유해를 고국에 묻어달라고 했다. 자신은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고국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며..... 하지만 그의 유언은 현실로 옮겨지지 못했다. 그의 묘소가 성지(聖地)화 될 것을 우려한 일제가 시신을 유족들에게 건네지 않은 채 은밀히 사형수들의 합동묘지에 묻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북으로 나뉜 해방 후의 어수선한 정국에 그의 유해는 결국 외면당해버리고 말았다. 

     

    그간 남북한의 유해 찾기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만시지탄이 우러나는 시점이었다. 그동안 묘지 인근의 지형지물들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묘지터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하니 현실적으로 유해 찾기는 더욱 불가능해 보이는 바, 안 의사의 유언을 받드는 길은 오직 그의 의거 동영상을 찾는 일밖에 없을 듯하다.

     

     

    러시아 기사에 의해서 촬영된 필름의 끝 부분 /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역에 들어오고 이후 그를 맞기 위해 도열한 일본 거류민들과 러시아 군인들의 모습이 이어지지만, 이후 안중근 의사의 저격 모습과 이토가 쓰러지는 장면, 그리고 안 의사가 '꼬레 우라!(한국 만세)'를 외친 후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되는 13분 8초 간의 필름은 삭제되고 아래 쪽 안 의사가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는 장면이 나타난다.(화살표가 안중근 의사임)
    이토  저격 직후의 안중근 / 안 의사가 입고 있는 반코트는 10월 22일 하얼빈의 중국인 상점에서 산 것으로, 그는 이토가 도착하기 4일 전 이미 하얼빈에 와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새 옷을 산 것은 거사 당일 이토에의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체포 과정이 거칠었던 듯 코트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일본 국회헌정자료실에 보관돼 있는 사진으로, 당당함과 의연함, 그리고 큰 일을  치른 자 답지 않은 편안한 여유까지 느껴진다. 생의 모든 숙제를 마친 자의 여유로움이랄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안 의사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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