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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영제국이 시작되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4. 21:49

     

    영국은 비록 세계 경략에의 출발은 뒤졌지만 스페인의 무적 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한 후로부터는 그야말로 욱일승천하여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까지 전 세계 인구의 약 ¼에 해당하는 4억 5천 8백만 명의 인구와, 지구 육지 면적의 ¼에 해당하는 3천 5백만 km²의 땅을 차지하여 다스리게 된다.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그들의 영토에는 동 서 어디든 해가 떠 있으므로) 대영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영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로서 본토 면적은 24만 km²로 22만 km²의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하다.(남북한 포함) 그런데 그 나라 국민의 유전자는 뭐가 우수했는지 전 세계를 호령하는 나라가 되었고,(지금은 미국과 호주를 비롯한 과거의 식민지들이 거의 독립하였지만 아직도 전 세계의 공용어는 저들의 말 영어이다) 우리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 뒤쳐진 그저그런 나라였다가 지금은 그보다는 좀 낫지만 여전히 그저그런 나라의 하나로 남아 있다.(우리는 늘 '눈부신 경제발전'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건 그만큼 우리나라의 과거가 형편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불어 더 나을 수 있는 나라가 정체해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반면 일본은 그와 같은 영국을 주목해왔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그 나라를 한번 배워보자. 일본도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지만 저들을 배워 따라 하면 우리도 세상의 패자(覇者)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 전후 일본 선진 사상가들의 생각이었다. 사실 일본은 조선과 같은 쇄국 정책을 취했어도 17~19세기의 200년 동안 나가사키 항을 통해 서양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인 까닭에 우리나라 조선처럼 서양에 완전 깜깜이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에 두려움 속에서도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고, 보다 빠르게 서양문물을 흡수할 수 있었다.(당시 페리 제독은 협상 테이블에 나온 일본인들이 너무도 유창하게 네덜란드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다)

     

     

    19세기 나가사키 항

    일본 막부는 쇄국주의 속에서도 인공섬 데지마(그림 아래의 부채꼴 모양의 섬)를 네덜란드에 할양, 217년 간(1641-1859)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도 네덜란드와 데지마를 오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인으로, 1666년 조선을 탈출한 그는 이곳 데지마를 통해 본국으로 귀환활 수 있었다. 그림에서 보이는 배들은 모두 네덜란드의 상선들이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토 히로부미는 1863년 영국으로 건너 간 최초 5명의 영국 유학생(이른바 장주 5걸) 가운데의 한 명이었다.(그는 런던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그가 영국으로 떠날 때의 짐은 1862년 발행된 오류투성이의 영일 사전 1권과 잠옷 1벌 뿐이었다고 한다) 일본 내에서 이또 히로부미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일본 근대헌법(메이지 헌법) 초안 작성, 일본 국회의 양원제 도입, 을사늑약과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 등은 모두 그가 영국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최초 영국 유학생의 사진
    이른바 '장주 5걸'이 런던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들은 모두 일본 근대화의 주인공이 된다. 오른쪽 위가 이또 히로부미다.  

     

     

    앞에서도 말했듯 조선이 패망의 길을 걸은 것은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졌기 때문이니 이는 당대의 조선에 그 시대적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인물이 없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니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이렇게 역설했다. 

     

     '일본이 영국을 배워 부강해져 지금은 동양의 주인이 되려 하고 있소. 지금 구라파(歐羅巴)에서 영국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뿐인즉 우리는 프랑스를 배워 부강해져야 하오.'

     

    사실 프랑스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군에 의해 패퇴했는데, 이후 이 일은 한동안 유럽 외교관들 사이에서 망신거리의 화제로서 도마에 올려졌다. 강국 프랑스가 듣보잡 조선이란 나라에 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프랑스가 달라진 건 없었고, 그 나라는 이후로도 내내 동양에 관심을 기울였던 바, 우리가 당시 프랑스를 배워 벤치마칭했다면 필시 역사는 달라졌을 것인데, 불행히도 김옥균의 개혁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프랑스 유학 1호 인물인 홍종우에 피살되었다. 홍종우는 부강한 조선보다 개인의 영달을 더 바란 인물이었다)

     

                 

    김옥균(1851-1894)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 1장을 올려보았다. 김옥균은 1884년 청나라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가 지속되자 이를 기화로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이후 일본을 떠돌던 그는 상해로 건너갔다가 1894년 3월 28일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되는데, 위 사진은 그가 그해 3월 상해로 떠나기 직전 일본 나가사키 항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말하자면 죽기 전 가장 최근의 얼굴로 그의 나이 44살 때의 것이다.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진 후 한강 양화진에서 육시되어 이처럼 목이 내걸렸다. 함께 걸린 '대역부도 옥균'의 글씨는 홍종우가 직접 쓴 글씨라 한다.

     

     

    처음부터 주제가 빗나갔다. 다시 지브로올터 해협으로 돌아가 얘기해보자. 

     

    앞서 말한대로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이후 스페인으로부터 지브로올터를 할양받는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이는 당대 유럽의 모든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고, 나아가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지속된, 어쩌면 세계 제 0차대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큰 전쟁으로 그 기간도 무려 14년이었다.(1701-1714) 그러한만큼 모든 책과 인터넷에서의 설명도 복잡하고 긴 데, 알기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700년,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죽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가까웠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병약했으므로 그의 죽음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죽기 전부터 모든 유럽 국가의 시선은 온통 스페인에 쏠려 있었으니 그에게 후사가 없던 까닭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와 혈연이 있는 나라 중의 하나가 스페인을 합병하게 될 터인데, 그의 혈연은 현재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아내인 누나와, 현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아내인 여동생이었다. 그 두 나라가 스페인을 눈독들임은 당연했고, 다른 나라들도 그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움은 당연했다. 어떤 나라가 됐든 새로운 거대 제국이 탄생하게 될 터, 이제 유럽의 세력 판도는 새롭게 짜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은근히 신성로마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제 그 이름뿐 사실상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로이센 등으로 사분오열된, 지는 해의 나라였다. 반면 프랑스는 여전한 강국이었고 두 나라는 국경 또한 연접돼 있었다. 게다가 국왕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 불릴만큼 강력한 전제군주였고 호전적이기도 했던 바, 그 두나라가 합쳐 이룩하게 될 새로운 라틴 제국인즉 다른 나라에는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 뻔했다. 특히 루이 14세의 칩입으로 크게 홍역을 치룬 네덜란드는 그 향배에 더욱 민감했다

     

    그런데 결론은 프랑스였다. 카를로스가 죽으면서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계승한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당연히 크게 환호하였으나 다른 국가들은 쌍수를 들어 반대하고 나섰다. 새롭게 만들어질 아래와 같은 거대 제국인즉 상상만해도 끔직한 것이었고, 거기에 두 나라가 가진 아메리카 식민지까지 염두에 둔다면 그 시너지가 더욱 배가될 것이었다. 이제 곧 그 거대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될 네덜란드와, 세상의 새로운 패권을 꿈꾸는 영국은 그 두 나라의 합병에 가장 크게 반발한 국가였다. 

     

     

     

     

    이에 곧 영국과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끌어들인 반(反)프랑스 동맹을 형성하였고, 포르투칼 등의 다른 주변 국가들도 야금야금 끌어들였다. 그리고 1701년 마침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던 바,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라는 14년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프랑스는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전선을 형성하며 싸우게 된 셈이었다. 영국은 이와는 별도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자군의 막강 해군력을 앞세워 빠른 공격을 개시했다. 국제적으로 프랑스를 압박하여 조속한 항복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 영국의 계산이었던 바, 이제 전쟁은 지역과 국경을 가리지 않는 그야말로 세계 대전으로 비화하였다.(전장의 분포 지역은 아래와 같다)

     

     

    하지만 프랑스는 의외로 강했다. 프랑스는 유럽의 거의 전 나라와 맞서 싸우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식민지 전선에서는 우세하였다. 이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는 영국의 의도는 어그러지고 전선은 교착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힘이 부쳤을까, 프랑스는 1706년 토리노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차츰 밀리기 시작했던 바, 루이 14세는 1708년부터 전쟁 종결을 모색하고 나섰다. 스페인 국왕 자리를 스페인 왕가 혈통의 필리페 5세에게 넘기겠다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말로 그를 왕위에 앉혔는데, 실제로는 허수아비 왕을 세운 후 뒤에서 수렴청정하려는 생각이었다. 

     

    동맹국 측에서는 속이 빤히 들여다 뵈는 루이 14세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할 터, 필리페 5세를 즉각 추방하고 신성로마제국 레오폴트 1세의 둘째 아들 카를 6세를 왕위에 앉히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루이 14세가 받아들일 리 없을 터, 잠시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다시 불이 붙었다. 각지의 전선에서 밀리고 있던 루이 14세로서는 마뜩치 않은 진행이었겠으나 다행히도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스를 지지하고 있었고,(프랑스를 지지한다기 보다는 신교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를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또 프랑스 국민들도 일치동참하자는 국왕의 눈물겨운 호소에 성금을 내며 도왔던 바, 어렵사리 전쟁을 꾸려갈 수 있었다. 다만 이대로 가면 머잖아 수도 파리에까지 적이 처들어 올 터, 전쟁을 계속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은 필요할 듯보였다. 

     

    그런데 그즈음 하나의 변수가 생겨났다. 전쟁 중인 171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죽고 장남인 요제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 역시 갑자기 죽고 말았던 바, 그의 동생인 카를 6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원래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왕으로 내정돼 있었고, 게다가 동맹국 측에서 요구한 스페인 왕위 내정자였다. 따라서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그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이 세 나라의 국왕이 되게 되는 셈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모르겠으나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바라는 그림이 아닐 터, 전쟁은 갑자기 종전(終戰)의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말하자면 전쟁의 명분이 사라졌던 것이었다.

     

    14년 간 세계의 각지에서 7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통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이는 전쟁의 발발 이유였던 만큼 동맹국 측의 공통요구 사항이었으나 특히 네덜란드의 요구가 강했다)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이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와 섬과 나폴리 왕국의 영토를 내어 받는 조건으로 종전의 합의를 보았는데, 의외로 맹주국이었던 영국의 요구는 소박하였다. 스페인 끝의 작은 반도 땅 지브로올터를 내달라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필리페 5세가 계속 스페인의 왕위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위의 요구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곧 지브로올터에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었으나, 면적은 겨우 5.8 km²로 우리나라의 2~3개 동을 합친 정도였고, 길이와 너비라 해봐야 각각 각각 5 km와 1.3 km에 불과한 작은 땅 덩어리였으니 그저 우뚝 솟은 타리크의 바위와 탁트인 바다 풍경, 바위 절벽에 서식하는 꼬리 없는 원숭이만 이채로운 그런 땅이었다. 하지만 그 장소는  머잖아 스스로 제 가치를 드러내었으니, 18세기 말 혜성처럼 등장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라는 영걸과 함께였다. 1805년 지브로올터 인근 서쪽 바다에서 영국의 국운을 건 대해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국왕(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우는 전대미문의 시민 폭동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이었다. 그리고 그 난세에 한 명의 풍운아가 출현하였으니 포병 초급장교 출신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쿠데타로써 혼란의 프랑스를 잠재운 그는 이어 온 세상을 손에 넣으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이에 그는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던 바, 세상은 다시 전쟁을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야망은 곧 실현될 듯 보였으니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나라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본토를 수호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 풍전등화로서 언제 나폴레옹의 대군이 상륙하게 될는지 몰랐다. 이제 영국이 믿을 것은 자신들의 해군력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군하면 전통의 해양강국 스페인도 결코 뒤지지 않았던 바, 1805년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22척의 영국 함선과,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33척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가 일어난 곳이 스페인 서부 해안 트라팔카르 곶으로 지형의 이용이나 보급면에 있어 스페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넬슨 제독의 기습으로 시작되었으니, 그는 가까이 있는 지브로올터를 믿었다. 넬슨 제독에게 그곳인즉 이기면 돌아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고, 지면 도망가서 권토중래를 꾀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또 전투 중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실제로 5척의 지원이 있었다). 넬슨은 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리하여 영국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으나 지브로올터 해안에서 편히 쉴 수 없었다. 정작 자신은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다. 

     

     

      

    트라팔카르의 위치.

     

    토마스 루니(1759-1837)가 그린 '트라팔카르 전투'.

     

    영국 런던의 트라팔카르 광장. 그 우뚝한 첨탑 위에 넬슨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허레이쇼 넬슨(1758-1805)의 초상과 트라팔카르 광장의 조형물. 영국에는 구국의 영웅이 즐비하지만 그 중에서도 넬슨 장군을 으뜸으로 칭함은 그저 레토릭만은 아니다. 

     

     

    이후로도 지브로올터는 영국의 중요 작전 거점으로, 혹은 방위의 전초선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으니 1, 2차 대전 때의 여러 전투와 작전에서도 그 활용도가 증명되었다(특히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전차 부대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그들을 섬멸시킬 수 있었고, 거꾸로 연합군의 보급을 지원하여 아프리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1869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후로는 대서양은 물론 인도양의 관문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바, 대서양의 작은 섬 나라 영국은 명실공히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지브로올터는 구한말 대한제국의 멸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바, 러일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발틱함대와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해군과의 전투가 그것이다.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 우리나라 동해로 향했던 러시아의 막강 발틱함대는 지브로올터 해협의 진입을 차단당해(당시 영국과 일본이 맺은 영일동맹으로 인해) 멀리 아프리카를 도는 220일 간의 항해라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영국이 장악한 세계 여러 항구에의 기항도 금지당했던 바, 연료인 석탄과 식량마저 구하기 힘들었다)

     

    발틱함대는 그러한 악조건에서 2만 9천 km를 항해하였으니 지구 둘레의 무려 ¾에 해당하는 거리였다. 1905년 5월 27일, 대마도 해상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친 그들을 궤멸시킴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은 어느날 아침, 일부 식자 층의 통곡 속에 정말로 조용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조선 병합을 간섭할 마지막 나라가 없어진 까닭이었다.   

     

     

    발틱 함대의 루트(굵은 실선. 지중해부터 마다가스카르 섬까지의 가는 실선은 2차 보급선의 루트)와 전투가 벌어진 곳.(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네모 박스 안)

     

    동해 해전 당시 침몰하는 러시아 함선의 사진과 그림.

     

     

    타리크의 바위와 꼬리 없는 원숭이. 지브로올터에는 300마리 정도의 꼬리 없는 원숭이와 2만 명 정도의 주민이 산다는데, 이 땅의 주인은 아직도 꼬리 없는 원숭이와 영국이다. 스페인은 이 땅의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으나 영국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말하자면 지브로올터는 21세기의 유럽 식민지인 셈이다.

     

     

     

    지브로올터 고함(Goham) 동굴 등에서는 4만 5천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거주지와 그들이 남긴 소통을 위한 표식이 발견되었다. 원활한 소통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들의 염원이었던 것 같다.(*어느 네안데르탈인의 슬픈 죽음 (II)' 참조)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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