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와 삼각맨션아파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2. 2. 22:03
젊은 세대까지 불어닥친 트로트 열풍 때문일까,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노래가 지금도 애창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그 곡을 부른 배호라는 가수는 이름만 들었지 사실 나도 본 적이 없다. 곡이 발표된 해가 1967년이니 낯이 서는 것은 당연한데, 다만 그해 완공된 삼각지 입체교차로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한때 서울의 명물이기도 했거니와 그 구조물이 철거된 해가 1994년 12월로, 비교적 근자인 까닭이리라. 삼각지 입체교차로는 차량들이 신호 대기 없이 번잡한 교차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회전식 로터리식으로 설계되어 입체 구조물 위를 빙글 돌아 제 방향을 찾아가게끔 만들어졌다. 까닭에 지방에서 올라온 차량들이 이곳에 진입했다 몇 바퀴를 도는 일도 있었..
-
개화기 전기 산업에 관한 복잡다난한 일들과 을지로 한국전력 서울본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30. 19:33
1882년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초대 미국 공사 부임에 대한 답방으로써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른바 보빙사로 불린 그들 사절단은 귀국 후 발달된 서구 문명을 고종에게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는데, 그중에서도 전기불이라는 게 있어 밤이 낮처럼 환하다는 내용은 듣는 이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고종은 밤새 놀다 새벽에 잠들어 낮 3시쯤에 일어나는 지독한 야행성 인간이었던 바, 밤이 낮처럼 환하다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고종은 단박에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조정에서는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전기등 설치를 의뢰하였다. (지금의 제너럴 일렉트릭은 에디슨이 세운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뛸 듯이 기뻐..
-
동반수 반수교에서 흥덕사 · 증주벽립까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20. 23:07
2020년 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성균관과 반촌'이라는 이름의 특별전을 본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때는 빈촌에 대해 잘 몰랐던 때였음에도 3d로 생동감 있게 재현된 반촌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고 감명 깊었다. 그래서 주체 측에 부탁해 아래의 전시 포스터를 한 장 얻어와 방에 붙여 놓고 오랫동안 음미하기도 했다. 반촌은 우리에게 생소한 단어지만 한자로 풀면 금방 이해가 간다. 여기서 반은 '학교 반(泮)' 자다. 즉 반촌은 요즘말로 대학촌이며 여기서 말하는 대학은 당연히 성균관이다. 성균관은 조선 건국 후 곧바로 세워진 교육기관으로, 아래 성균관대학교 탕평비각 앞 표석에는 1398년(태조 7)이라는 설립연도를 각자해 놓았다. 그리고 근자에는 설립 600주년 행사를 갖기도 했지만, 사실 이것은 실소할 일이다..
-
흥덕동천 장경교에서 반궁천 서반수 빨래터까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18. 18:40
장경교(長慶橋)는 종로구 연건동과 이화동 사이 대학로를 흘렀던 흥덕동천의 대표적 돌다리로, 정조가 임금이 되던 해인 1776년 여름, 경모궁(景慕宮)에 행차하기 위해 만들었다. 길이는 10.5m, 폭은 6m 정도였다. '장경'(長慶)은 '경사와 상서로움이 천만년 지속된다'는 뜻으로서, 장생전(長生殿) 앞에 있다 하여 장생전교 혹은 장교로 불리기도 했다. 장생전은 왕실의 관짝을 만들어 국상에 대비하던 관청으로 1444년(세종 26) 설치됐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옛 창경궁 원림(園林)인 함춘원 자리에 경모궁을 지었다. 아울러 경모궁으로 가는 첩경을 가로막은 창경궁의 담장을 헐고 월근문(月覲門)을 내었다. 정조는 매월 초하루에는 이 문을 통해 사도세자를..
-
큰 빛을 보지 못한 시카고학파의 박인준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1. 14. 22:49
1세대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 ~ 1943)은 비교적 알려진 반면 (☞ '종로에 남은 박길룡의 건축물') 박인준(朴仁俊, 1892 ~1974) 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 블로그에서도 '윤치왕과 윤치창이 살았던 가회동 집'에서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니, 편의 대로 옮겨 싣자면 다음과 같다. .... 윤치왕은 1982년 말 여의도 수정아파트에 사는 큰아들 윤도선(서울대 산부인과의)의 집에서 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는데,(향년 87세) 이후 그가 살던 가회동 1-10번지 집은 부근 가회동 1-6번지 윤치창의 집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매입되어 대사관 사택으로 이용되었다. 이 두 집은 1927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의 일원으로 ..
-
계동에 있던 관상감과 남이 장군의 사(死)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0. 8. 00:17
조선후기의 지리지 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계동의 유래는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이던 제생원(濟生院)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훗날 음이 변하여 계생동(桂生洞)이 되었다가 1914년 동명 제정 때 계동으로 등록된 것이다. 제생원은 세조 때 혜민서와 통합되었다. 또 계동에는 국초(國初)에 설치한 천문·지리·기후 등을 관찰하는 서운관이 있었다가 마찬가지로 세조 때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대 계동사옥 마당에 있는 관천대(觀天臺)는 조선시대 관상감의 흔적이다. 관천대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는 높은 장소'로서 관상감 근무자가 천문을 살피던 곳이다. 과거 이 위에는 간의대(簡儀臺)가 놓여 있었고 소간의(小簡儀)라고 하는 관측기기가 설치돼 있었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간의대를 오르기 위한 계단이 있었다..
-
간송 전형필과 필적했던 고미술품 애호가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10. 6. 01:16
앞서 강화도 고려산 최우 무덤에서 나온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고려청자의 최고봉', '청자의 왕중왕'으로 불리는 이 매명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에게 넘어갔고 다시 간송 전형필이 거금 2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쌀 1가마가 16원,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천원이던 시절이었다. (☞ '최충헌, 최우,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것')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 아파트 2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이 매병은 2013년 500억원의 보험료가 책정됐다) 1940년 간송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할 때 지불한 1만원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자세히 보면 이 매병에는 도굴꾼의 탐침봉(도굴꾼들이 땅을 짤러보는 데 쓰는 쇠꼬..
-
덕수궁 돈덕전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9. 30. 18:24
2023년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에 대해 쓰려하는데, 처음부터 고민에 빠졌다. 경운궁 돈덕전이 맞는가, 덕수궁 돈덕전이 맞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덕수궁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건축광 광해군이 새로운 궁궐을 신축하며 '국가의 기운을 드높이는 궁'이라는 의미로서 작명했다. 이후 이 궁궐의 이름은 내내 경운궁이었으나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며 머물 때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킨 후 경운궁에 살게 했는데, 이때 명칭을 '덕망 높이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의 덕수궁으로 바꾸었고 고종황제의 호칭도 '덕수궁 이태왕 전하'로 바뀌었다. 훗날의 순종은 대한제국 멸망 후 창덕궁에 살게 하고 '창덕궁 이왕 전하'로 호칭했다. 황제 폐하에서 '왕 전하'로 격하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