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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에 살았던 박영효·임종상·백남준·박수근·배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7. 8. 23:33
창신동 봉제골목의 연결 도로인 창신4길은 이제 베트남인의 거리가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창신동 봉제산업의 맥을 동남아인이 이었기 때문인데, 이제는 베트남인 할머니, 한국인과 베트남인 부부, 그리고 그들의 혼혈 자제 3대를 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자가 친정 엄마를 데려온 경우이다. 그러니 대림동 · 가리봉동 ·구로동의 연변거리는 오죽하겠나 싶은데, 다만 그들은 겉모습으로는 표시가 안 된다. (사실 그래서 무섭다)
아무튼 지금은 그렇게 이방인 마을이 된 창신·숭인동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성북동과 더불어 도성 출입 쉬운 대표적 성저십리 마을이었다. 이번에 위의 사실을 동시에 느끼는 재미난 경험을 하였던 바, 베트남인 남녀가 담배 피우는 창신4길 음식점 앞을 지나다 문득 출현한 흥인지문과 조우했다. 창신동과 숭인동은 이렇듯 도성과 가까운 곳이었던지라 고관대작의 큰집들이 즐비했다. 까닭에 나와 같은 마니아에게 있어서는 근현대사를 움직인 유무명 인사의 자취를 찾는 묘미가 없지 않다.흥인지문과의 조우
가장 먼저 찾아본 곳은 박영효의 별장 상춘원(常春園)이다. 상춘원은 지금의 숭인1동 195번지 롯데캐슬 천지인아파트 일대를 자치하고 있던 박영효의 10,165평 대저택이다.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 금릉위가 된 후에는 종로 관훈동의 저택에서 살았는데 갑신정변 실패 후 나라에 몰수당했다. 이에 망명 생활을 접고 돌아온 후에는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낸 숭인동의 옛집을 구입했고 이곳에 양관(洋館)이 딸린 대저택을 지어 1915년 11월 17일 낙성식을 가졌다.
1916년 김리교 신자인 박영효가 자신의 저택 상춘원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을 접대하는 모습 상춘원 내 양관(洋館) 일동정(一東亭)
이후 박영효는 조선총독부 어용 자문 기관이자 귀족 기관인 중추원 의장이 되었고, 상춘원은 귀족들만 드나든다고 하여 귀족회관으로도 불렸는데, 얼마 후 자금력이 좋은 천도교가 인수해 본부로 삼았다. 박영효가 이 집을 선뜻 내준 것은 천도교 측에서 제시한 금액에도 끌렸지만 옛 위세의 회복과 더불어 관훈동 집을 되찾았기 때문으로, 이 무렵 세조 시절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과 동호 저자도(楮子島)도 제 것으로 만드는 수완을 보였다.
옥수동 전망대에서 본 저자도 / 건너편 현대아파트를 지으며 토사 채취로 사라진 섬 저자도가 되살아나고 있다. 한명회의 압구정은 건너편 현대아파트 11동 앞에 있었다.
상춘원을 구입한 천도교는 이곳을 본부로 삼아 3.1운동을 계획했다. 3.1운동 후 손병희는 주모자로 붙잡혔다가 풀려난 후 이곳 상춘원에서 1922년 5월 19일 사망했는데, 이후 상춘원은 김성수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로 넘어갔다가 해방 후 해체되며 사라졌다.
동묘역 2번 출구 100m 전방 상춘원 터 표석 동묘역 10번 출구 부근의 롯데캐슬 / 부근 금릉슈퍼의 간판이 금릉위 박영효를 연상케 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임종상의 집이다. 임종상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서는 고리대금업자로 소문 자자하던 자였다. 임종상은 당대 경성에서 세금을 두 번째를 많이 내던 사업자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국방비도 두 번째로 많이 헌납한 사람이었다. (최고 헌납자는 화신상회 박흥식이었고, 최고 헌납단체는 조선예수교장로회였다) 까닭에 어린아이들도 그 이름을 알 정도였는데, 그가 살던 집이 창신동 641 지역에 있었다. 많은 필지 분할이 이루어진 지금도 지도를 검색하면 창신동 641은 넓은 부지가 검색된다.
그의 집은 대지 2만1000여㎡(약7000평), 건평 1300여㎡(400여평)의 규모로 창신궁이라 불리었는데, <동아일보> 1924년 7월 21일 기사에 따르면 임종상은 30만 원을 들여 대저택을 지어 궁궐처럼 단청을 하고 첩을 두고 살았다.(좋은 기와집 한 채가 1천 원이던 시절이었다) 근방에는 한일은행 창업자 조병택, 해동은행 중역이었던 김성환, 을사오적 이근택의 아들로서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이근호, 순종비인 순명효황후의 남동생으로 궁내부 특진관을 지낸 민영린 등 친일파 부호들의 집이 즐비했으나 그중에서도 임종상의 집 창신궁이 단연 으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창신궁에 관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1924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창신궁 창신동 641 일대 일대는 슬럼화돼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 보이는 건물은 창신제일교회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집터이다. 창신동 그의 집터에 들어선 현재의 백남준기념관은 소박한 크기로서 과거 백남준이 살던 때는 그의 집 대문이 이만했을 것이다. 우연찮게도 과거 그의 집 대문이 바로 현재의 백남준기념관 부근에 있었는데, 대문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본채가 나왔을 정도로 큰 집이었다. 이에 그의 집은 '큰 대문집'으로 불렸다. 내부가 보이지 않고 오직 거대한 솟을대문만이 보이는 이 집을 동네 사람들이 보이는 그대로 호칭했던 것이다. 당시의 집 규모는 9917㎡(3000평)로, 주소는 창신동 197번지였다.
지금 백남준기념관 지번이 197-33이니 창신동 197번지 한 필지 땅이 33개 이상으로 쪼개져 나왔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게 쪼개져 팔린 땅에 지어진 집들이 지금도 보이는데, 백남준기념관도 서울시가 2015년 백남준 집터의 한옥을 매입해 2017년 3월 개관한 것이다. 1932년 경성부 서린방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창신동 197번지에서 1937년부터 1950년까지 성장기를 보냈다.
백남준기념관 백남준기념관 부근의 옛집 당시의 흔적이 남은 것이 신기하다.
백남준은 일제강점기에 서울 서린동 지금의 서린호텔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백낙승(1886~1956)이라는 사업가였는데 본명보다는 시라카와 라쿠쇼(白川樂承)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먼저 백낙승을 언급하자면, 포목상 백윤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니혼 대학과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한 후 1924년 대창직물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조선 최초로 인조견 직물을 생산했다. 이후 태창직물의 제품을 만주로 수출하며 큰 부를 축적했는데, 일본의 대기업도 만주 수출에 있어서는 태창을 창구로 이용해야 할 만큼 위세를 떨쳤다.
그와 같은 기업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백남준이니 어릴 적부터 부러울 것이 없었겠는데, 아비가 대한제국 마지막 외무대신의 집을 구입해 재축한 창신동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재학 중이던 1949년 전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하며 학교를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하였고 이후 도쿄대학교 문과부에 진학해 미술사학 및 미학을 전공을 했으며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백남준은 동경대 졸업과 함께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 등에서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행위미술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때까지는 무명 예술가축에 속했으나 1974년 세계 최초로 음악·비디오 복합 예술인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타이틀의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세계를 선보였고, 이후 이 새로운 장르로써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백남준이 1996년 만든 설치 예술 작품 '달에 사는 토끼' / 백남준아트센터 창신동 백남준 거리의 색바랜 '달과 토끼'가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말해주는 듯.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에 필적할 만한 예술가 또 한명이 창신동에 살았다.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백남준보다 일러주는 박수근(1914~1965) 화백이다. 그는 대한민국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꼽히며 '국민화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굵직한 선과 묘한 질감으로 묘사된 당대의 생활 풍속도는 매우 독특하고 아름다운데 그것이 독학으로 이룬 세계라는 것이 더욱 경이롭다.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그는 1952년 6·25 전쟁통에 홀로 남한으로 피란 내려왔고 이후 춘천, 군산, 서울에 족적을 남겼다. 그가 서울에서 살던 곳이 바로 창신동이다.따라서 양구, 춘천, 군산에는 각각 그를 기리는 미술관이나 기념관 같은 것이 세워졌으나 서울은 비싼 땅이라서 그런지 그런 것이 없다. '골목 안'을 비롯해 우리가 아는 그의 유명한 그림들은 대부분 창신동 한옥의 이른바 '마루 아틀리에'에서 그려진 작품임에도 말이다. 그 집은 박수근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마련한 18평짜리 한옥으로, 그는 그곳에서 12년 간 지금의 대표작들을 그렸다. 지하철 6호선 동묘역 내에는 그의 집터 출구 표시까지 돼 있다. 그렇게 6번 출구로 나가면 그의 집터가 나오고, 5번 출구로 나가면 '골목 안'을 풍경을 접할 수 있다.
지하철 내 표지판 노상의 박수근 집터 표지판 / 박수근의 집 '마루 아틀리에' 사진을 입체적으로 넣었다. '골목안' / 캔버스에 유채, 80.3x53㎝ 지금은 이렇다. / 해장국집 옆 낙지집이 박수근 집터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 뿐 더 이상의 무엇은 없다. 아쉬움에 좀 더 찾고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예 뒤편 완구 거리를 한 바퀴 돌기가 일쑤인데, 그러다 제 제자리로 와 양평서울해장국집으로 통하는 작은 골목길을 들여다보면 아래와 같은 팻말이 서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또 유홍준이 문화재청장 시절 썼다는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는 손 글씨를 운 좋으면 발견할 수 있다. 정말로 그것뿐이다.
해장국집 좁은 골목 골목 입구 안내판 유 청장이 쓴 글씨도 색이 바랬다. 이 오래된 흑백사진 위쪽에는 남한에서 재회한 부인 김복순 씨와 아이들이, 아래쪽에는 박 화백과 아내와 와 둘째 딸 인애가 있다. 창신동 집 '마루 아뜰리에'에서 찍은 사진이다. 인애는 11살 때 병사했다. 뭔가 허전하다고 느꼈다면 길을 되돌아와 롯데캐슬 천지인아파트 갈 건너편 낙산냉면 집에 가서 시원한 냉면 한그릇을 먹으며 배호의 노래를 들을 수도 있다.(화요일은 휴무) 이곳이 바로 전설의 가수 배호가 살던 집터이다. 배호에 관해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와 삼각맨션아파트'에서 따로 언급했다. 그 위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내가 다닐 뻔했던 창신초등학교가 나온다. (나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 ○○번지이다)
창신국민학교는 그 무렵의 학생수가 122학급에 1만166명였다고 하는, 전에도 기록된 바 없고, 앞으로는 더더욱 생겨날 일이 없는 공전절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건너편 하꼬방들이 즐비했던 곳은 이제는 다 정비되었지만 깎아지른 채석장 절개지 절벽은 여전하다. 그 절벽 오르는 길에 법왕사(法王寺)라고 하는 거창한 이름의 작은 절이 있다. 사실 창신초등학교 자리도 1902년(광무 6년) 대한제국 황실에서 세운 창건된 원흥사(圓興寺)라는 국찰이 있던 곳인데, 1910년 망국과 함께 사라졌다.
낙산냉면 앞 안내문 창신초등학교 숭인동 돌산 법왕사 입구 / 고양이 두 마리가 긴장하며 바라보고 있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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