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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낙산아파트와 아직 남은 회현제2시민아파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7. 11. 23:29
예전의 서울시 아파트는 대부분 산 위에 있었다. 1968년 6월 18일 이 땅 최초의 시민아파트 단지였던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시민아파트가 그랬고, 1968년 남산자락에 건립됐다 2003년 철거된 회현제1시민아파트가 그랬고, 1970년 마포 와우산 위에 세워졌다 붕괴된 와우시민아파트가 그랬다. (☞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이어 1971년 산자수명한 인왕산 계곡에 세워졌다 2011년 철거된 옥인시범아파트가 그랬고, 1972년 건설돼 부촌의 대명사로 쓰이다 2021년 폭파 철거된 남산외인아파트가 그랬고, 1970년초 지금의 낙산 한양성벽 자리에 있던 동숭동 시민아파트와 창신·숭인동의 판자촌을 밀어내고 건립됐다 2000년 철거된 낙산시민아파트가 그랬다.
산중턱의 금화시민아파트 철거된 남산외인아파트에 관한 신문보도 남산외인아파트 철거 장면 이상의 아파트들은 모두 대규모 공공주택 건립 정책의 일환으로 지어진 아파트이지만 격은 좀 달랐다. 이를 테면 2021년 폭파 철거된 남산외인아파트는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많았고, 그러한 편법을 동원할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이 살던 부자 아파트였으며, 인왕산 아래 옥인시범아파트의 경우도 제법 잘 사는 사람들이 입주했다.
당시 밀어붙이기 행정으로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현욱 서울시장은 1970년 4월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어서인지 옥인시범아파트를 건설하며 '시범'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앞으로 아파트는 이곳을 ‘시범’ 삼아 튼튼하게 지어라"고 한 말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특별히 잘 지어졌는지 당시로서는 제법 높은 분양가가 형성됐고, 이에 좀 가진 사람들이 입주하게 되었는데, 그 잘 사는 아파트가 연탄을 때던 '연탄 아파트'였다는 사실이 앞뒤가 맞지 않는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일 뿐이니 1980년대 초 형성된 개포동 개포주공아파트의 경우도 '연탄 아파트'였다. 요즘도 가끔 안평대군의 저택 비해당이 위치했다는 서촌 옛 수성동 계곡을 찾곤 하지만 이곳에 즐비했다는 옥인시범아파트에의 상상은 여전히 생경하다.
계곡 물소리 요란했다는 옛 수성동 계곡 / 기린교와 비해당이 있었던 곳(추정) 그 계곡에 지어진 옥인시범아파트 단지 겨울 수성동 계곡과 복원된 기린교 돌다리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속의 기린교 서울시가 1968년 12월 주택난 해소와 판자촌 정비를 목적으로 계획한 '서민아파트 2000동 건립 계획'에 포함된 창신·숭인 지구 아파트 역시 산자락에 지어졌던 바, 이름도 낙산시민아파트였다. 서울의 초기 아파트들이 산 위에 지어진 까닭은 우선 땅값이 쌌기 때문이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다 밀어내도 보상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 보상을 받은 사람은 그 낮은 지가로 인해 적어도 서울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다.
1970년대 초 창신동 무허가 건물이 철거된 땅에 낙산시민아파트 28개 동이 지어졌다. 그로 인해 이곳 창신·숭인동 일대는 더욱 인구밀도가 높아졌던 바, 당시 들리는 말로는 출근길이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골목을 내려올 정도라고 했다. 지금은 낙산시민아파트 28개동과 동숭동 낙산(洛山)자락 시민아파트 25개동(동숭시민아파트 18개동+동숭시범아파트 5개동+기자아파트 2개동)이 헐린 그곳에 4만 6000여 평 규모의 낙산공원이 조성됐는데, 이곳 역시 예전에 산비탈 아파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쉬 연상되지 않는다.
2000년 철거 직전의 낙산시민아파트 낙산시민아파트 /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사진 동숭시민아파트 / 공동주택연구소 사진 낙산공원에 복원된 옛 한양도성 성벽 낙산공원에서 본 낙조
서울에 남은 마지막 남은 시민아파트이자 최초의 시범아파트인 서울 회현제2시민아파트는 뜻밖에도 아직 굳건하다. 말한 대로 2년 앞서 지어진 회현제1시민아파트는 벌써 20년 전에 철거되었다.(현 중구회현체육센터 자리) 반면 1970년 완공된 회현제2시민아파트는 매년 연내 철거의 말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꿋꿋하게 서 있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 3번 출구 쪽으로 나와 남산자락을 오르게 되면 보이는 붉은 벽돌 흰색 벽의 아파트 단지가 바로 회현제2시민아파트다.회현제2시민아파트가 보인다. 회현제2시민아파트는 서울시가 이곳에 있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고 확보한 자리에 1970년 5월 완공됐는데, 당시로는 흔치 않은 디귿(ㄷ) 자 구조로 지어졌다. 까닭에 언뜻 여러 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동이며, 10층 건물에 총 352세대이다. 전 세대가 52㎡(16평)로 방 두 개, 화장실과 주방 거실이 있는 구조로서, 지금으로서는 좁아 보이지만 한때는 고소득 연예인이 많이 살아 '연예인 아파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었다.
ㄷ자 구조의 회현제2시민아파트 위에서 내려본 중정 건물이 꺾이는 곳 이 아파트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6, 7층 설치한 구름다리다. 이 다리는 고층에 사는 입주민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설계됐는데, 남산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살려 마치 평지에서 연결된 1층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만일 6층과 7층으로 연결되는 이 구름다리가 없었다면 고층에 사는 주민들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립주택이나 다세대 원룸주택에도 설치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이 금석지감을 느끼게 하지만, 그때만 해도 엘리베이터는 고급 오피스 빌딩에만 설치됐고 일반 건물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이 아파트는 대한민국 최초의 중앙난방방식 아파트였으며, 각 세대마다 수세식 화장실이 딸려 있어 큰 인기를 끌었다.
준공 무렵의 사진 / 구름다리가 강조 된 사진이다. 구름다리가 이런 식으로 건설됐다. / 위키백과 사진 6층으로 연결되는 구름다리 뒤쪽의 7층으로 연결되는 구름다리 7층 다리는 이미 위험 경고등이 들어와 있다. 이 아파트도 앞서 말한 창신동 재개발과 같이 전임 시장과 현직 시장이 교체되며 재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는 케이스다. 여기는 원래 오세훈 시장에 의해 '2004년 이후 철거'가 획정된 상태였지만, 2016년 당시 박원순 시장이 리모델링을 거쳐 청년 사업가와 예술가를 위한 주택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발표하며 꼬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입주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로 진통이 시작되었고, '토지임대부'라는 회현제2시민아파트의 특성(아파트 토지는 시의 소유이고 건물 지분 일부만 입주민들이 가진 구조)으로 보상 문제가 복합해지며 지금껏 최고령 시민아파트로서의 나이를 더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서울시의 재개발 의지가 확고한 바, 더 이상의 나이는 먹지 않을 듯싶다.(현재 남은 가구는 30세대 미만이라고 함) 아래 사진은 아파트의 여기저기를 찍은 것이다.
6층 구름다리 교육청 건물 쪽으로 본 구름다리 아래에서 본 모습 어두운 복도 실내 계단 바깥에서 본 모습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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