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국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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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사카오 탁본이 됐든 주운태 탁본이 됐든.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13. 00:27
앞서 중국인 금석학자 잉씨(榮禧)가 광서 8년(1882) 임오년에 산동 사람 변단산(卞丹山)을 고용해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만족할만한 탁본을 얻은 사실을 말한 바 있다. 이때 얻은 탁본은 필시 석회가 덧입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떴을 것인즉 일본인 학자 이케우치히로시(池內宏)*는 이것을 유명한 역사 매거진 에 소개하며 '정확한 것임'을 더불어 강조했다. * 동경제국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이케우치 히로시는 독일 랑케 사학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엄격한 실증주의와 사료비판을 추구한 학자였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주관적 편견이 우선 작용하였던 바, '조선반도' 북부에 거주하는 예맥족을 '만주민족'으로 인식하였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 역사에 편입시키기는 했으되 중국 이주민이 세운 국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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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이 실재하는 <해동역사>와 광개토대왕비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8. 00:11
앞서 몇 차례에 걸쳐 강조했거니와 우리가 동북공정'과 같은 중국의 역사왜곡 작업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것은 이를 반박할 만한 '우리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현실이니,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대한민국 고대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한서(漢書)》,《삼국지》 을 위시한 중국 측 사서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 다시 말하려는 '임나일본부'설도 그러한즉 일본 학계가 그와 같은 학설을 주장하는 것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저들의 역사서인 에 그와 같은 내용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저들의 주장에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저 '지어낸 엉터리 이야기',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 같은 비논리적인 대응뿐이다. 한마디로 는 위서(僞書)라는 것이다. 그런데 는 백제인이 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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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후연(後燕) 및 왜(倭)와의 싸움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6. 00:49
광개토대왕은 즉위년인 391년(영락 1년) 7월에 백제를 공격해 석현 등 10성을 빼앗고, 이어 10월에는 군사를 7개 방면으로 나누어 수군으로써 관미성(關彌城, 파주 오두산성)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켰다.(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域四而蛸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攻擊二十日乃拔 / ) 백제도 곧 반격을 시도하여 392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고, 393년(아신왕 2년) 8월에 백제장군 진무(眞武)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미성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395년 시마무렌 강 유역의 비려를 정벌한 광개토대왕은 396년(영락 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왜'와 백제를 토벌하였다. 396년 광개토대왕의 수군 원정은 391년의 수군 원정과 달리 멀리 영산강에 상륙했다. 관미성 수군기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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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로 잘못 해석되고 있는 고성의 왜(倭)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3. 00:35
최근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의 내부 사진을 공개하며 이를 소가야 왕국의 것으로 설명하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면서 소가야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으로, 에는 고차국(古差國)으로, 에는 고사포국(古史浦國), 에는 고자국(古自國)으로 나온다고 설명하였다. 표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나라일 것이라는 한국 학계의 지배적 견해를 반영한 기사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튼 지금 이 지역은 소가야의 영역으로 굳어진 듯하다. 그런데 이 소가야의 무덤군이라는 송학동 고분은 다른 가야제국의 무덤과는 달리 왜(倭)의 양식이다.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고 천장에 붉은 칠을 한 무덤양식은 일본 규슈지역에서만 110여 기가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2000년 8월 동아대박물관이 송학동 고분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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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제국(新彌諸國)과 왜가 백제에게 양도한 임나4현잃어버린 왕국 '왜' 2023. 6. 9. 22:04
1976년에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발견된 덕흥리벽화고분은 남·북한과 중국·일본에 모두 뜨거운 감자였다. 무덤의 주인공인 진(鎭)이 본래 고구려 사람이냐,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냐 하는 논쟁에서 아무도 이렇다 할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내내 그러한 상태이다. 덕흥리 고분은 피장자와 축조연대(AD 408년, 광개토대왕 18년)가 모두 확실한 드문 무덤임에도 그렇듯 처리가 힘든 이유는 피장자 진이 다스렸던 치소(治所) 때문이다. 무덤 안에 기록된 묵서명에 따르면 그가 역임한 관직은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로서, 마지막 치소인 유주는 지금의 북경지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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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왜 연합군이 맞붙은 비사벌 대전잃어버린 왕국 '왜' 2022. 12. 25. 17:08
6세기 중엽, 신라는 비사벌(比斯伐)을 침공했다. 비사벌은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는 경상남도 창녕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불사국(不斯國), 에 따르면 비자발(比自㶱)국이 있던 곳이다. 의 설명은 보다 구체적이니, 왜(倭)는 신공황후 49년(AD 369년) 비자발국을 비롯한 임나 7국을 정벌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망라하자면 비자발, 남가라(南加羅), 녹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이었다. 이 일대는 우리고대사에서 흔히 가야라 불리고 있으며, 그중 비화가야(非火加耶)라고 불리기도 하는(〈삼국유사〉 5가야조 /〈삼국사기〉 지리지 화왕군조) 비자발국의 흔적이 창녕 고분군으로 남아 있다. 6세기 비사벌을 침공할 때의 신라는 과거 왜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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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강수(强首)도 왜국 사람이었을까?잃어버린 왕국 '왜' 2022. 8. 1. 23:53
강수(强首)는 (제46권 열전 제6)에 등장하는 인물로 흔히 설총,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불린다. 강수는 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있는데, 이름이 본명 우두(牛頭)가 아닌 강수로 소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하 ) 강수는 중원경(中原京, 충북 충주) 사량부 사람으로 아버지는 석체나마(昔諦奈麻)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이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았는데 아이가 정말로 머리 뒤쪽에 툭 불거진 뼈가 있었다. 석체가 아이를 안고 당시의 현자라고 알려진 이에게 가서 물었다. (※황복사비편 등에 따르면 '나마'는 관직명이다) “이 아이의 두골이 이렇게 생겼는데,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나쁩니까?)" 현자가 답했다. "내가 듣기로 신농씨(神農氏)는 소의 머리 모양이었고, 고요(皐陶)는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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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가야 무덤은 한반도 왜인(倭人)의 것잃어버린 왕국 '왜' 2022. 5. 21. 02:10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왜식(倭式) 무덤은 우리나라 고대사학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다. 그 골칫거리는 1991년 3월, 5세기말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발굴되며 일층 심각해졌다. 이 무덤은 일차 도굴이 되었음에도 도굴꾼들이 흘리고 간, 혹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물들이 출토돼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이어령 선생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굴꾼의 검거를 재촉한 희대의 사건이기도 하다. * 도굴범들은 그로부터 2년 6개월 뒤 검거되었으나 상태가 좋은 대부분의 유물은 이미 처분된 후였는데, 그 유물이 65점이 넘는다고 알려졌다. 아래는 2021년 광주국립박물관이 공개한 수습된 주요 유물들이다. (이 무덤에 대해서는 작년에 일차로 언급한 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