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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가야 무덤은 한반도 왜인(倭人)의 것
    잃어버린 왕국 '왜' 2022. 5. 21. 02:10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왜식(倭式) 무덤은 우리나라 고대사학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다. 그 골칫거리는 1991년 3월, 5세기말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발굴되며 일층 심각해졌다. 이 무덤은 일차 도굴이 되었음에도 도굴꾼들이 흘리고 간, 혹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물들이 출토돼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이어령 선생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굴꾼의 검거를 재촉한 희대의 사건이기도 하다. 

     

    * 도굴범들은 그로부터 2년 6개월 뒤 검거되었으나 상태가 좋은 대부분의 유물은 이미 처분된 후였는데, 그 유물이 65점이 넘는다고 알려졌다. 아래는 2021년 광주국립박물관이 공개한 수습된 주요 유물들이다. (이 무덤에 대해서는 작년에 일차로 언급한 적이 있다. '임나'와 '왜'ㅡ 왜 '왜'를 두려워하는가?)

     

     

    찰갑옷
    쇠투구
    뚜껑 달린 그릇
    굽다리 접시
    피장자의 지위를 말해주는 유리구슬
    피장자의 지위를 말해주는 금동관
    피장자의 부숴진 관과 장식물 / 관재는 무녕왕릉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특산의 금송(金松)이었다.

     

    함평 신덕고분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무덤의 규모와 예상 부장품이 공주 무령왕릉에 맞먹는 규모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한성을 떠난 백제가 웅진(공주)에 정착했을 무렵인데, 영산강 유역에서 무령왕릉과 맞먹는 규모의 고분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고분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봉분을 가진 무덤)이라는 점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전방후원분은 일본 특유의 옛 무덤양식이다. 그래서 이로 인하여 신덕고분은 발굴 조사 보고서가 작성되지 못했다. 솔직히 당시의 발굴자인 국립광주박물관은 조사 보고서를 작성할 엄두도 못 내고 쉬쉬하기 바빴으니, 만일 이 사실이 공개된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고대 왜(倭)의 한반도 남부지배설인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제공되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작년 '임나'와 '왜'ㅡ 왜 '왜'를 두려워하는가? 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 발굴보고서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1년 9월 겨우 나왔다. 보고서는 신덕고분의 위치·자연환경·조사 경위를 설명하고 무덤 내부 구조와 출토 유물을 상세히 소개했는데, 한국 학자 외에 일본 연구자 3명의 논고도 게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무엇은 없었으니, 그곳에 실린 학자들은 한반도 남부의 왜식 무덤들에 대하여 지금껏 주장되던 것들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말만 빙빙 돌리는 지경이었다. 

     

     

    전방후원분의 형태와 주구가 뚜렷한 발굴 당시의 신덕고분
    일본 다이센릉(大仙陵) 고분 / 외관 525m, 봉분 길이 305m, 후원(後圓)의 지름 249m, 높이 34m의 세계 최대 무덤이다. 닌코구(仁德)천황(257-399)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5세기경 축조된 고분으로 실제 주인공은 알 수 없다.
    단장된 신덕고분

     

     
     
    1. 마한 수장 무덤 설

    5세기말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 수장이 일본 규슈 지방의 왜와 통교하면서 왜 무덤 양식의 영향을 받은 장고분(=전방후원분)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앞서 말한 대로 5세기말은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 한성이 함락된 후이다. 이후 백제는 남부 지역인 마한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게 되었던 바, 마한 토착세력은 이에 대응하는 입장에서 왜와 통교하였고 그때 왜의 묘제를 받아들여 썼다는 것이다.

     

    2. 영산강 유역의 왜관(倭館) 직원 무덤설

    무덤 주인공이 아예 일본인이라는 주장으로, 영산강 유역의 왜(倭) 무역센터 직원의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 왜관과 같은 곳이 백제 땅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에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을 채용해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백제 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 관료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 왜인(倭人) 설은 현재 가장 유력한 주장으로 통용되고 있다.

     

    3. 귀향한 마한인 설

    5세기 후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한반도계 사람들 중 가야인들이 왜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격변기에 북규슈에 살고 있던 마한 출신 이주민이 망명객의 신분이 되어 본향(전남)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이다. (솔직히 이건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잘 안 간다)

     

    이중 그럴듯히 여겨지는 주장이 있다면 나 역시 받아들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없다. 나로서는 그저 애쓴다는 생각이 들 뿐이니, 왜가 본시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 일본 열도로 건너간 세력으로 간주하면 영산강 유역에 나타나는 일본식 고분은 물론이요, 앞서 말한 경남 고성 송학리의 왜식 고분의 수수께끼도 깨끗이 해결될 수 있다. 학계에서는 2002년의 정밀 발굴로서 고성 송학리 고분이 왜식 전방후원분이 아닌 쌍분 형식의 무덤으로 밝혀졌다고 자화자찬식으로 말하고 있으나 쌍분 고분에 3개의 봉우리를 얹은 것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렇다면 (경남 송학리 고분이 왜식 전방후원분이 아닌 쌍분 형식의 무덤이라면) 최소한 원형복원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과거 일본의 임나일본부를 의식해 3개 봉우리 고분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분을 만든 부끄러움을 반추하기 싫을 것이기에....

     

     

    3개의 봉분을 가진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신덕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에 실린 일본학자의 주장도 어설프기는 매 한 가지이다. 이를 테면 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 1호분에서 나온 마구 세트, 구슬과 시신 안치 방식은 백제계 속성이지만, 관과 삼각형 철모는 왜와 백제 요소가 섞여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친한(親韓)파 학자임은 분명하나, 그래서 임나일본부를 주장하지 않고 왜-백제연합설을 지지하는 듯하나, 그럴 경우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임나일본부설은 야마토(大和) 왜가 4세기말~6세기초까지 2세기가량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식민지설인데, 그보다 훨씬 짧게 나타나는 전방후원분에의 설명도 부족하고, 반대로 백제계 속성의 무덤이, 혹은 왜와 백제 요소가 섞여 있는 무덤이 한성백제나 공주의 왕묘보다 크다는 점도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이 주장하는 열도 내의 야마토 왜

     

    문제는 전북 남원지방에서 존재하는 가야 무덤에서도 나타난다. 그전에는 가야 연맹이 낙동강 근방에 머물러 있었기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가야식 껴묻거리가 발굴되는 무덤이 남원 지방에서 출현하자 학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야가 지리산을 넘어 호남평야까지 진출했다는 급조된 주장을 하기 시작했던 바, 이제껏 약소국이라 치부되던 가야연맹은 어느덧 철제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국가로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세력이 돼 있었다.

     

     

    2019년 11월 전북 남원에서 발굴된 가야 무덤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는 남원시 아영면 청계리 산 8-7번지 일대 남원 청계고분군에서 5세기 전반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 31m 길이 가야계 고분을 찾아냈다.
    2021년 남원 월산리 M5호분 출토된 완전한 복발형 투구와 철제 갑옷

     

    그리하여 지금의 전라북도 지방 일대를 지배하던 가야 세력은 어느덧 '전북 가야'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이 생경하게 다가오지는 하지만, 이는 전북 남원시, 장수군 등 7개 시군에서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110여 곳의 가야 유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지금껏 전북 지역에서 발견된 가야 고분은 420개소가 넘는다. 특히 2021년 9월 전북 장수읍 동촌리 산 26-1번지 마봉산 자락에서 발견된 총 83기의 가야 고분은 그 거대한 규모에 언덕인 줄로만 알았다가 뒤늦게 고분으로 판명되어 정밀 발굴과 유적공원화 작업이 이루어진 경우였다.  

     

     

    말 편자, 둥근고리자루큰칼, 은제 장신구 등의 유물이 출토된 전북 장수읍 동촌리 마봉산 고분군
    단장된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 738번지 가야 무덤 /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도 가야 무덤으로 판명되어 단장 중이다.

     

    '전북 가야'의 흔적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니, 그에 앞서서는 남원시 아영면 청계리 산 8-7번지 일대의 고분군에서 5세기 전반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가야계 고분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투구 위 사진) 주변의 무덤들 역시 모두 가야계 고분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낯설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이 정말 낙동강변의 가야 연맹이 지리산을 넘어와 만든 흔적들일까? 

     

    그것들에 약소국 가야 연맹을 들이대기 민망했던 학계는 어느 날 기문국'과 '반파국'의 이름을 붙였다. 남원 운봉고원 일대를 지역적인 기반으로 하는 낯선 세력은 가야의 한 세력인 '기문국'으로서 4세기 말엽에 등장해 6세기 초까지 존속했으며, 장수군과 진안고원 일대를 기반으로 한 낯선 세력은 가야 '반파국'으로서 4세기 말엽에 등장해 6세기 초까지 활동하다 백제에 의해 멸망했다는 주장이었다. 

     

    다분히 궁여지책인 주장이었지만 설명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은 난리가 났다. 이유는 간단했으니 그 반파국과 기문국 등의 이름이 우리나라 사료에는 없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국명이기 때문이었다. (☞ '산청에서 발견된 동진한 왜의 흔적') 그리고 이는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니, 주민들로서는 절대 받아들이기 힘든 노릇이었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살던 땅이 졸지에 고대 일본 식민지였던 땅이 된 셈이었다.

     

     

    기문국 삭제를 촉구하는 남원 4대 종단 성명서 발표 (2021년 11월)
    남원가야역사바로알기시민모임의 문화재청 앞에서의 기문국 삭제 시위 (2021년 9월)
    문제의 지명들 / 국립중앙박물관 가야 특별전에 전시됐던 지도이다.

     

    이 같은 사태를 보노라면 우리의 고대사는 혼란 그 자체이다. 현재 호남 지역 전방후원분은 12곳에 14기가 산재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밖에도 왜식 무덤은 수도 없이 발견되는 형국이다. 그것을 언제까지 가야 무덤으로 치부할 수도 없고(물론 그 안에 가야 연맹의 무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서기>의 것을 빌려와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당국에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고분군을 묶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고 하는데, 어찌 보면 거짓 역사를 세계에 홍보하는 셈이다.

     

    그래서 남원과 합천 주민들은 그럴러면 기문국과 다라국의 이름을 아예 삭제시키고 신청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나 해결책이 없지는 않다. 이것을 한반도 왜(倭)의 것으로 간주하면 이상의 문제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설명된다. 그리고 이것은 팩트이기도 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남원·장수 지역에 돌출된 이식(異式) 고분 역시 영산강 유역 고대 왜인(倭人)들의 북진 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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