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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경대사탑비가 말해주는 임나일본부
    잃어버린 왕국 '왜' 2021. 10. 5. 23:58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는 신라시대에 임나(任那)를 명기한 완형의 석비 하나가 존재한다. 바로 진경대사탑비로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 심희(審希, 856-923)를 기려 세운 비석이다. 이 탑비는 원래 경남 창원의 봉림사터에 진경대사탑과 일습으로 있었으나 일제가 1919년 전국 폐사지의 탑과 탑비 등을 경복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전돼 와 함께 전시되다 보전처리 중이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진경대사탑만 전시돼 있다. 

     

     

    봉림사 진경대사탑
    경복궁 국립박물관 시절의 사진

     

    봉림사는 앞서 '태안사 적인선사탑과 신라 구산선문'에서 언급한 대로 신라 하대 선종의 도량인 구산선문 중의 하나이다. 심희는 이 절에서 주석하며 선풍(禪風)을 떨쳤다. 진경대사 심희는 68세 되는 923년 입적했으며 탑비는 이듬해인 934년(경명왕 8)에 왕이 직접 글을 써 세웠다. 진경대사는 그만큼 이름난 고승이었다는 얘기다. 탑비에는 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첫머리에 그의 조상에 대한 언급이 있다.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이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번역은 이렇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요,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여기서 신김씨(新金氏)는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와 황복사비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는 성씨로, 신라 사회로 편입된 새로운 김씨인 가야김씨(김해김씨)를 오리지널 신라김씨(경주김씨)가 차별화하여 부른 말이다. 따라서 김심희 대사의 본관은 김해김씨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또 그의 먼 조상이 흥무대왕, 즉 김유신이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아들이 무력이고 그 아들이 서현이며 그 아들이 바로 유신이기 때문이다.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 / 1964년 황룡사구층목탑 심초석 안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의 명문으로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부터 중수에 이르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고대 탑지(塔誌) 중 최고의 가치를 평가받고 있으며 이 명문에 신김씨(新金氏) 2명이 등장한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의 이름이 새겨진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 / 그는 진흥왕의 척경 전쟁에 종군해 한강 유역을 다스리는 성주가 된다.
    김유신의 증조부 구형왕의 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문은 草拔聖枝(초발성지)인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다' 쯤이 되는 이 단어를 지명으로 보느냐, 인명으로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위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이에 대한 부담을 피하려 했는지 그저 두루뭉술하다)

     

    이에 대해 앞서 언급한 <한일고대사의 재건축>의 저자 장한식은 과감하게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종발성(從拔城)의 다른 표기'로서 임나(任那)의 수도로 보았다. 즉 '초발(성)의 성스러운 가지=임나의 왕족'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초발'과 '종발'은 발음도 비슷할 뿐더러 실제로 광개토대왕비문에 임나는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거기에서 종발성은 임나가라의 수도 비슷한 곳으로써 따라 등장한다. 그 부분의 문장은 아래와 같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인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이 물러갔다. 이에 왜적의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을 곧 복속시키고 안라 사람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 

     

    하지만 본인은 초발성지를 인명으로 보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해석했다. 

     

    대사(大師)의 이름은 심희(審希)요, 속성은 신김씨(新金氏, 김해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 초발성지(草拔聖枝)이다. (임나는)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의 먼 조상(遠祖)인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에게 투항하였다. 오산(鼇山, 구지봉)과 접수(鰈水, 너른 바다)의 정기를 타고 난 (흥무대왕은)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이 되어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였으며..... 

     

    이 경우 임나와 금관가야는 뿌리가 같은 김수로의 후손이 세운 나라이기는 하되 별개의 국가가 되며, 심희는 금관가야가 아닌 임나국의 후손이 된다. 다만 임나가 신라에 투항해 병합된 것은 같은데, 여기서 임나를 괴롭히던 이웃나라 군사(隣兵)는 필시 왜(倭)일 것이다. 대부분 '隣兵'을 신라군대라고 해석하나 이건 매우 부자연스럽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비문의 저자는 신라의 경명왕으로, 그는 위 문장에서 자신의 나라를 아국(我國)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자신의 나라를 '이웃 군대'로 표현했다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왜국은 자신의 속국이던 임나가 신라에 귀속된 일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왜는 541년 4월, 속국이던 안라(安羅)와 가라(加羅)와 다라(多羅)의 군사를 징발하고, 백제의 성명왕(성왕)과 연합해 임나를 되찾아 재건하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물론 이상은 <일본서기> 흠명천황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임나가라와 안라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다라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 나라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전제는 왜 역시 임나와 신라의 이웃 나라(隣兵)로써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됐던 가야특별전 지도에서의 가라국과 다라국 / 나름 근거를 가지고 제작된 지도이나 각계의 큰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코로나와 맞물리며 결국 개최가 중단되었다. 국명·지명 자체가 <일본서기>의 것이고 '왜' 역시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선전장에 다름아닌 꼴이 되고 말았다.
    봉림사가 있던 창원시의 한 공원에 진경대사탑과 탁비를 복제해 놓았다. / 창원문화해설사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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