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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인' 호공(匏公)에 대한 놀라운 해석
    잃어버린 왕국 '왜' 2021. 10. 2. 05:37

     

    앞서도 언급한 <한일 고대사의 재건축>이란 책을 두 번째 숙독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 책에 천착함은 생각하는 바가 같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바가 같다 함은 기본적으로 고대의 왜인(倭人)은 한반도에 살던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즉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에 등장하는 왜는 일본열도의 야마토왜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세력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물론 각론까지야 같은 수 없겠으나 그래도 무릎을 칠 정도의 명쾌한 해석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자탄(?)을 하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사실들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 내용들을 구구절절히 소개하고 싶지만, 책이 신간인 데다 스포일러의 문제도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함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튼 <한일 고대사의 재건축>은 그만큼 재미있다. 그래서 맛보기라도 몇 개는 소개하고 싶은데, 그 중 하나가 책의 첫머리쯤에 등장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조에 나오는 '최초의 왜인' 호공(匏公)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 장한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이 기사에 대해 '한일 고대사의 로제타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왜 그랬는지 기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봄륨이 어마어마하나 쉽게 읽히는 책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어 교빙하니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중략).... 호공이란 자는 그 족성이 자세치 못하나 본시 왜인으로 처음에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일컬었다.(春二月 遣匏公聘於馬韓, 馬韓王讓匏公曰.... 중략.... 匏公者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繋腰, 度海而來, 故稱匏公)

     

    저자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서, 위 혁거세왕 38년조 기사의 내용이 매우 중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최초의 왜인집단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를 지칭하는 단어로 출발했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대목이기 때문이다. 즉 위 문장은 왜의 본질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음에도 이제껏의 고정관념에 묶여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던 바, 저자는 그래서 이 기사를 '한일 고대사의 로제타석'이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한&middot;중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왜인' 호공. 그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위 문장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어떤 왜인이 박을 차고 대한해협을 건넜기에 '박 호(瓠)' 자를 붙여 호공(匏公)이라고 이름지었다'는 것이었다. 왜=일본열도라는 것이 기존 해석의 전제이므로 호공이 건너온 바다는 당연히 대한해협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독해는 설득력이 없다. 대한해협은 허리에 박을 차고 건널 수 있는 바다가 '절대로' 아니다. 즉 지금까지의 전통적 해석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말이 된다.  

     

    여기서 저자는 "호공은 본시 왜인으로 처음에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은 호공 개인의 출자를 넘어 그의 고향, 즉 왜(倭)의 실체를 증언하는 대목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첫째, 호공이 '박을 허리에 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호공이 건넌 바다는 어디를 말함인가?

    셋째, 바다를 건너기 이전 호공이 살던 고향, 즉 왜 땅은 어디인가?

    넷째, '호공이 본시 왜인이었다'는 언급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의 4가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위의 짧은 '호공 기록'에 오롯이 담겨 있으니, 호공이 '박을 허리에 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첫 번째 질문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저자는 호공의 최대 특징인 박에 주목한다. 호공은 박을 차고 다녔기에 이름도 '박 호(瓠)' 자를 붙여 호공(匏公)으로 불렸다. 신라인이 그 '박'에 주목함은 자신들 신라인과는 행색과 풍습이 달랐다는 얘기다. 즉 이것은 '호공과 그 족속은 바다에서 박을 많이 활용하였다'는 결정적인 특징을 알려주는 대목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박은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쓰는 태왁을 가리키는 말이다. 호공은 그것을 이용해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태왁을 따로 설명할 것은 없다. 태왁은 원래 박의 속을 긁어내 만들었지만 1960년대부터 부력이 좋은 스티로품 태왁으로 대체되었다.
    해녀들은 이 태왁에 의지해 쉬기도 하고 이동하기도 하고 채취한 해산물을 매달아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호공이 건넌 바다는 어디를 말함인가? 우리는 거의가 '왜=일본'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으므로 그 바다는 당연히 현해탄이 되겠지만 이건 틀렸다. 다시 말하거니와 대한해협은 허리에 박을 차고 건널 수 있는 바다가 아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증명했으되,(이를 테면,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경주 땅의 신라인은 호공이 대한해협을 건넌오는 것을 목도할 수 없을 뿐더러 설령 부산 거주민이 그것을 목도했더라도 그 목격담이 경주에 퍼지기는 힘들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고(古)울산만이다. 

     

    저자는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당시의 지형 및 경주 인근 내륙에서 발견된 창녕 비봉리 패총과 선사시대 목선(木船) 등을 들어, 또 울주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잡이 그림 등을 들어 당시의 바다가 울산의 내륙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호공이 건너온 곳은 강한 파도치는 바다가 아닌 육지로 둘러싸인 내만(內灣)이었을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건너기 만만한 곳은 아니므로 박을 이용해 도해(渡海)해 귀순했는데, 이 특이하고도 용감한 도해 방식으로 인해 호공이라는 이름이 신라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창녕 비봉리 패총의 위치
    창녕 비봉리 패총에서 발견된 8천년 전의 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창녕 패총의 배
    창녕 비봉리 패총 및
    울주 반구대 암각화는 바다가 아닌 내륙에 있다/문화재청 사진
    울주 반구대 암각화 위치
    책의 저자는 고대에는 반구대 일대까지 바다였다고 말한다.
    배마다 10~20명이 타서 작살을 내리꽂는 광경이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 고래잡이 그림

     

    ~ 내가 다른 카테고리에서 주장하고 있는 글을 하나 끼워 넣자면, 이와 같은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착각은 성서 출애굽기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영도 하에 바다를 건너가는 유명한 대목이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바다를 홍해로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일 삼각주의 늪지대였다. 구약성서에는 그들이 건넌 곳이 '얌 수프'(yam suph)로 기록돼 있는데, 굳이 해석하면 '갈대 바다'이다. 

     

    그런데  고대 히브리어에는 바다라는 단어가 없었다. 이에 바다나 호수나 늪이 모두 '얌'(yam)으로 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같은 착각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얌 수프를 건너 호렙산(시나이산)를 경유해 광야로 나아가는 엑소더스의 루트(아래 지도)를 봐도 그들이 건널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가 제자들을 만났던 갈릴리의 작은 호수가 '갈릴리 바다'로 일컬어지는 것 역시 '얌'으로 표기된 까닭이다. 

     

     

    엑소더스 상의 히브리인들의 탈출 루트

     

    어휘의 결핍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오류는 <삼국사기> 해석에서도 발생했다. 예를 들자면 위의 '내만'(內灣)이나 '내해'(內海) 같은 단어가 있었다면 대한해협까지 튀지는 않았을 텐데, 고착된 개념 대로, 또 관성 대로 해석하다 보니 호공이 졸지에 바다를 건넌 예수 같은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관점을 달리하면 '바다를 건너기 이전 호공이 살던 고향, 즉 왜 땅은 어디인가?' 하는 세 번째 물음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니 저자가 밝힌 왜 땅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이렇게 보면 세 번째 질문, 호공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저절로 답이 나온다. 고(古)울산만 남쪽의 어느 해변이다. 이곳은 영남알프스 산악의 동쪽 사면으로 넓지 않은 해안평야지대가 형성돼 있다. 농경도 비교적 활발하지만 동해바다를 끼고 있어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였고 일찍부터 동해북부 해역은 물론이고 남해안, 일본영도와 교류하였던 지역이다. 넓은 세계를 알고 있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호공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남울산·부산 일대가 한일 고대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고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질문, 즉 호공은 본래 왜인이었다'는 기록의 의미를 살펴보자. 위의 기록처럼, 귀순자가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부른 것일 뿐 그는 성도 이름도 없다분명한 것은 왜인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널 수는 없으므로 그는 적어도 일본열도 출신은 아니다. 따라서 초기신라인(또는 신라 건국 이전의 진한인)들이 말한 초기의 왜인은 고울산만의 남쪽, 구체적으로는 남울산과 부산 일대에서 해척(海尺)일을 하던 사람들을 말한다고 저자는 결론 내린다.

     

    이상 답은 마쳤으나 여기서 등장한 '해척'이란 단어와 함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공과 석탈해왕의 한판 승부를 한번 들여다보자. 우선 '해척'에 대해 말하면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에 나오는 단어로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해변인을 말한다. 그 문장은 아래와 같다.

     

    남해왕 때 가락국의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 수로왕이 신하·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이하며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달아나 계림 동쪽의 하서지촌(西知村) 아진포(阿珎浦, 경주시 양남면 동해안)이르렀다. 마침 포구가에 한 노파가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阿珍義先)으로 혁거세왕 해척의 어미였다.(南解王時 駕洛國海中有舩來泊. 其國首露王與臣民鼓譟而迎将欲留之, 而舡乃飛走至於雞林東下西知阿珎浦 時浦邉有一嫗名阿珎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이 기사는 용성국 출신 석탈해에 관한 것으로서, 이렇게 신라 땅에 도착한 석탈해는 앞서 박을 타고 건너와 신라 땅에 영주한 호공의 세력과 주도권 다툼을 벌인다.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어 칠일 동안 머무르며 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그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 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다음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네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동자가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관청에서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其童子曳杖率二奴登吐含山上作石塚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峯如三日月勢可久之地. 乃下尋之即瓠公宅也. 乃設詭計潛埋砺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 "否", 爭訟不决. 乃告于官, 官曰 "以何験是汝家." 童曰 "我夲冶匠乍岀隣郷而人取居之, 請堀地檢看." 從之, 果得砺炭乃取而居.

     

    위 책의 저자는 동화와도 같아 보이는 <삼국유사>의 이 기록을 호공으로 대표되는 해안인 집단이 탈해의 무리에게 축출당하는 신라초기의 무서운 내전을 상징하는 기록이라고 말한다. 즉 나중에 진입한 세력이 먼저 자리 잡은 호공세력을 제압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대장장이라고 밝힌 탈해의 야철족(冶鐵族)은 선진무기로써 무장한 조직화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탈해가 숯과 숯돌을 이용했다는 것은 철기를 만들 줄 아는 종족이었음을 증거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신라 정계의 핵심으로 진출했던 호공과 그의 '왜인 집단'이 탈해족에게 패배한 사건은 이후 석씨신라와 왜 사이의 오랜 갈등을 야기할 배경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을 상징할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AD 253년 왜인들이 내해이사금의 왕자 석우로(昔于老)를 죽일 정도로 석씨신라와 왜는 오랜 앙금으로 치열하게 다투었다고 말한다. 물론 석씨와 호공 세력까지 싹 쓸어 버리고 권력을 독점한 김씨신라와의 원한은 더 했지만.(이후 신라와 왜는 끊임없는 싸움을 벌인다)

     

    그러면서 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부기하니, '왜'로 불린 동해남부 해안 출신인 호공이 신라의 재상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초기신라가 한편으로는 '왜'와 갈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왜인(해변인) 가운데 일부를 동반자로 받아들여 협력관계를 구축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했다. 혁거세왕이 왜인 출신의 호공을 외교관으로 삼아 마한에 파견한 것도 이와 같은 관계를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다. 

     

     

    석탈해왕릉
    호공의 집이 있었다는 경주 월성터 /문화재청 사진
    첨성대 가는 길의 초기 신라의 것으로 보이는 봉분. 왕릉인지 아닌지 늘 궁금하다. 혹시 호공의 무덤?
    신라김씨가 출현한 계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이곳에 걸린 금궤를 발견해 알린 사람도 호공이다. 새롭게 등장한 김씨 세력과 왜인 출신 호족과의 결탁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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