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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에서 발견된 동진한 왜(倭)의 흔적
    잃어버린 왕국 '왜' 2022. 4. 10. 16:51

     

    작년(2021년) 12월 전남 나주 봉황면 고속도로 건설 현장(광주-강진 간 고속도로)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었다. 관계 당국의 설명에 따르면 고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이고 발굴조사를 하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와 양식은 알 수 없다. 이상이 무덤에 관한 전부인데, 이후 사진을 몇 장 입수했지만 이렇다 할만한 것은 없었다. (문화재청에서 추가 조사를 한 뒤 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를 열어 보존 방안을 확정할 예정이라 한다)

     

     

    발견된 전방후원분의 위치와 사진

     

    영산강 유역의 고대 무덤들, 특히 전방후원분이 왜(倭)의 무덤임을 주장하고 있는 나로서는 특이할게 없는 발견이다. 이것이 전방후원분이고 영산강 평야 주변의 구릉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하류 유역의 같은 세력이 축조한 무덤으로 여겨지는 것인데, 다만 영산강의 왜가 북쪽으로 세력을 넓힌 증거라는 데 의미를 둘 수 있겠다. 

     

    그런데 지난 2월 15일, 경남 산청(생초면 어서리 산93-1번지 태봉산 능선 자락)에서 왜(倭)계 무덤이 발견되었다. 혹한 속에서 이 무덤을 발굴한 극동문화재연구원은 엠(M)32호분이라 명명했고, 이어 "훼손 없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고분이라는 점, 가야 유적인 생초고분군에서 백제식 무덤이 처음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고분"이라고 설명했다. 곧이어 몰려든 각계의 중견 고고학자들도 입장도 다르지 않았으니, 수순대로 다음과 같은 것을 궁리했다. 

     

    고대 왕국 백제의 영역은 동쪽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갔을까? 충청·전라도 넘어 경상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을까? 가야를 직접 지배하며 신라와 대치했을까?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 가야 고분과는 판이한 양식의 그 무덤을 당연히 백제의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도 무리가 아닐 것이 무덤은 송산리형 백제분과 유사한 궁륭형 천장의 굴식 돌방무덤 (횡혈식 석실고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면, 봉토 지름은 13m로서 외부와 통할 수 있는 연도가 있었으며, 연도는 길이 2.4m, 너비 0.8m, 높이 1.1m 규모였다. 안의 묘실은 길이 2.8m, 너비 1.7m, 면적 4.85㎡로 작았고 (2평도 안 됨) 천정은 아치형으로 좁혀지며 평석(平石)의 쐐기돌로 마감된 형식이었다. 

     

    말한 대로 M32호분은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었다. 하지만 부장품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니 관은 이미 삭아 없어졌고, 나온 것이라고는 목관에 쓰인 관못과 작은 손칼이 전부였다. 다만 발굴 당시 발견된 문비석(막음용 돌) 3개로 봐서 한 사람을 장사 지낸 뒤 추가로 두 사람이 더 묻힌 것으로 추측되었다.

     

     

    M 32호분의 외부
    연도
    묘실
    천정

     

    그렇다고 논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인근 산성에서 백제계 유물인 기와가 출토된 점과 부여 송산리 형식을 띠는 전형적인 백제 분묘 구조란 점을 들어 백제 세력이 산청까지 진출한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한 반면, 김낙중 전북대 교수와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그렇기는 하지만 주거지나 토기 등 다른 결정적인 백제인의 유물들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 대가야 세력이 당시 우호세력이던 백제 장제문화 영향을 받아 축조된 무덤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두 견해의 공통점은 M32호분을 5~6세기 무덤으로 간주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백제가 475년 웅진으로 천도한 뒤 다시 중흥한 무령왕(재위 501~523) 치세와 일치하므로 백제의 세력이 대가야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가야 지역에서 느닷없이 백제계 이형(異形) 무덤이 출현했으니 그렇게 생각됨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시 한반도에 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일일 터, 앞서 말한 영산강 유역의 왜가 대가야를 침입한 증거로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유적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간과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서 말한 왜의 지도를 다시 게재하자면,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그 남쪽이 역시 왜와 접해 있다.(馬韓在西南與倭接 弁韓在東 弁辰在辰韓之南其南亦與倭接) - <후한서> 동이전 
    한은 대방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과 서는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瀆盧國與倭接界) - <후한서> 동이전
    * 바다를 보고 마주하고 있으면 접(接)이나 계(界)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접'은 '접해 있다'는 뜻이고 '계'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데, <일본서기>에는 위 무덤이 발견된 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왜, 그 외 여러 나라의 다툼이 잘 그려져 있다. 우선 그 내용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513년 (계체 천황 7년) 11월,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 사라(신라)의 문즉지(汶得至), 안라의 신이해(辛已奚)와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나란히 세우고 은칙(恩勅, 은혜로운 조서)을 내렸던 바, 기문(己汶)과 대사(滯沙)를 백제에 주었다. 이 달에 반파국이 즙지(檝支)를 보내 진귀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의 땅을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끝내 주지 않았다. 
     

    * 백제의 유력한 귀족의 성씨인 진모씨(眞慕氏), 즉 진씨(眞氏)로 추정된다. 가야연맹의 하나인 반파국(伴跛國)이 백제 영역인 기문(己汶)을 공격하여 빼앗자, 513년(무녕왕 13) 6월 그는 장군 주리즉이(州利卽爾) 및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 혹은 위의사이마기미(委意斯移麻岐彌) 등과 함께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를 데리고 왜에 파견되어 갔다. 대가야의 방해를 무릅쓰고 시도한 그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 문화적 욕구가 강한 왜의 세력을 이용하여 기문과 대사를 백제의 영토로 확보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14년 3월, 반파가 자탄과 대사에 성을 쌓아 만해와 연결하고 봉수와 군수창고를 설치해 일본(왜)에 대비하였다. 또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 추봉(推封)에 연결하였다. 이후 군사와 병기를 모아 신라를 공격하여 남녀를 약취하고 촌읍을 약탈하였다. 그들 흉적이 가는 곳에 남는 것이 드물었고 포악사치하고 괴롭히고 살상하니 상세히 기록할 수 없는 지경이다. 

     

     

    무덤이 발견된 산청 생초고분군(●) /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작한 문제의 지도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에서 발견한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가야시대 봉화대
    장수군 동촌리에 복원된 반파 가야고분 (제19호분)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는 장수군 지역이 가야 단일 정치제 반파국(伴跛國)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기문(己汶) 지역을 둘러싼 전운이 감돌고, 드디어 515년 2월 반파 · 왜 · 백제의 3국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 달에 사도도(沙都嶋, 섬진강 상의 모래섬으로 추정됨)까지 이르는 반파인이 왜에 원한을 품고 제 힘을 과신한 나머지 포악한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물부련(物部連)이 수군 5백 명을 거느리고 대사강(帶沙江, 섬진강)으로 직행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문귀(=저미문귀) 장군은 신라를 경유해 나아갔다. 4월, 물부련이 대사강에 머문지 엿새째, 반파가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공격하여 옷을 벗기고 물건을 빼앗고 장막을 모두 불태웠다. 물부련 등은 두려워 도망하였는데,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문모라(汶慕羅)에 정박하였다. 

     

    是月 到于 沙都嶋 傳聞伴跛人懷恨衝毒 侍强從虐 故物部連率舟師五百 直指帶沙江 文貴將軍自新羅去 夏四月物部連 於帶沙江停住六日 伴跛與師往伐 逼脫衣裳 劫掠所齊 盡燒帷幕 物部連等 怖畏逃遁 僅存身命 泊汶慕羅

     

    이 싸움의 승패가 어찌 됐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반파국이 있던 장수 일대가 결국은 백제의 땅이 되었으므로 백제 · 왜 연합군이 승리하였음은 확실한데, 반면 문제의 고분이 있는 산청 지역은 왜가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합병하면서 (新羅打滅任那官家: 일본서기) 왜는 산청 지역을 상실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왜가 일본열도로 축출되는 원인으로 작용됨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학계에서 위에서 발견된 산청의 왜(倭) 무덤을 백제의 것으로 여긴 데 대해서는 앞서 경남 송학리 왜 무덤을 다른 세력의 것으로 둔갑시킨 일과 같은 고의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학계는 경남 송학동의 전방후원분을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를 의식해 이도 저도 아닌 무덤으로 만든 예는 분명히 있다.

     

    왜가 본래부터 한반도에 있다가 일본열도로 옮겨간 세력이라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여전히 왜가 일본열도에서바다를 건너 와 신라를 침략한 세력이라고 여기고 있으므로 (百殘新羅舊是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 광개토대왕비)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 차제에 다시 강조하거니와 위 광개토대왕비의 이른 바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우리의 속민으로 이때까지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신라 땅에) 오니 (태왕께서)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왜를 깨뜨리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 옳다.

     

     

    광개토대왕비의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파주 오두산성
    오두산성의 위치 / 391년 광개토대왕이 수군을 동원해 공격한 백제의 요새이다.
    전방후원분이 3개의 봉우리를 가진 무덤으로 변신한 경남 고성 송학동 무덤
    원래는 전방후원분이었던 고성 송학동 무덤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가 그린 송학동 무덤 그림
    위 고분의 위치 (●)

     

    1914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조사된 고성 송학동 고분군은 중앙의 전방후원분으로 인해 일본이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활용되었다. 해방 전까지 17기가 존재하던 송학동 고분군은 문제의 1호분을 중심에 두고 작은 봉토분이 서측에 4기, 동측에 2기, 모두 7기가 분포하고 있다. 지금은 당연히 가야의 고분으로 치부되고 있으나 실은 왜식 고분으로, 가운데 전방후원분(지금 3연봉이 된)은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고분들도 모두 왜인 무덤으로 짐작된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중앙 고분은 1999년과 2000∼2001년까지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시굴과 발굴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다. 그 결과 중앙 고분은 66m에 이르는 큰 고분으로 그 안에 여러 개의 무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밝여졌다.(편의상 2~5묘 / 위 야쓰이 세이이치 그림 참조) 가운데 5.6 x 2.6 x 2.4m 규모의 5묘 북측에 조성된 2묘는 6.7 x 2.0 x 1.58m의 대형 굴식돌방무덤으로, 서쪽 단면 가운데 길이 3.15 x 1.0 x 1.48m의 연도가 있었는데, 연도 및 돌방 내부 전체에는 붉은색으로 채색이 돼 있었다.*

     

    * 앞서 '또 다시 발견된 한반도 왜왕의 무덤'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붉은 색 주칠 무덤은 일본 야요이시대 이래 고분의 전형적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남쪽의 3묘 역시 입구를 서쪽에 둔 궁륭형의 대형 굴식돌방무덤으로, 규모는 길이 10 x 1.4 x 2.5m이며, 이번에 발견된 산청 돌방 무덤과 같은 세장한 형식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번에 산청에서 발견된 백제식 무덤은 백제 장수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송학동 지역에서 북쪽 산청으로 진출했던 왜 장수의 것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송학동 고분에서는 일본의 고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통형기대(筒形器臺) 등이 발견되었던 바, 한반도 남부 왜의 문명이 일본열도로 전해졌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송학동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
    규슈 사이토바루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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