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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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 동네에 살던 혁명의 주역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4. 21:40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써 외면 하는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萩)시는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야마구치현까지는 부산에서 약 215km이다. 다만 직항은 없어 전통의 부관페리를 타고 밤 10시에 출항하면 다음 날 아침에 7시에 시모노세키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관부연락선이라고 불렸던 부관페리는 부산과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서 한 자씩 따 붙였다. 시모노세키에서 차로 갈아타고 북쪽으로 약 1시간 30분을 가면 하기시 죠카마치(城下町, 성밑 마을)에 이른다. 1874년 스스로 해체한 하기 성(城)과 이어진 죠카마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유명한 요시다 쇼인(1830~ 1859)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다. 요시다 쇼인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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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밤섬)에서 일어난 엽기적 살인사건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3. 08:26
앞서 1편(☞ '한강의 무인도 밤섬')에서 채 설명을 못했으나 밤섬이라는 지명은 와우산에서 본 모양이 밤톨처럼 생긴 데서 유래됐다. 당시에는 한자어인 율도(栗島)로 불렸다. 지금 보면 밤보다는 땅콩처럼 생겼으나, 과거 섬이 작았을 때는 밤톨처럼 보였을 것이니 아래 심사정의 그림에서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마(馬), 판(判), 석(石), 인(印), 선(宣)씨의 5개 희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앞서 말한 대로 배를 만들고 누에를 치며 생계를 이었다. 주민들은 길이 18m의 장도릿배, 15m 정도의 조깃배, 12m 정도의 늘배 등을 만드는 배 목수 일을 했다. 이들의 기술은 꽤 뛰어났던 듯, 상류인 단양·영월에서부터 하류인 김포·강화도에서까지 배를 만들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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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무인도 밤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5. 2. 23:09
한강의 밤섬은 지금은 무인도이며 들어갈 수조차 없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던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천여 명의 주민들이 고깃배 제작과 함께 누에를 치고 약초를 재배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하는데,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섬 전체가 뽕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밤섬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이 버드나무와 뽕나무 군락이다. 1968년 섬을 폭파하고 뽕밭을 싹 밀어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를 만들었음에도 다시 섬이 생기고 뽕밭을 이룬 것을 보면 자연의 힘이란 정말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밤섬에는 1960년대 말까지도 78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마포 창천동 와우산 기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고,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다이너마이트 폭발 굉음과 함께 섬은 폭파되었다. 당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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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동·재동·미동초등학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4. 29. 21:40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는 서울 종로구 운현궁 부근에 자리한 서울교동초등학교이다. 교동초등학교는 서구식 근대교육을 위해 1894년 9월 18일 관립교동소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그때가 으악! 고종 31년이다. 초기 재학생 수가 130~150명 정도로 적지 않았는데, 필시 교동향교에서 공부하던 학동들이 옮겨왔을 터이다. 교동향교는 교동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유서 깊은 향교였으나 결국 그해 폐교되어 사라졌다. 안타깝지만 교동향교의 훈장님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을 듯싶다. 관립교동소학교는 1906년 관립교동보통학교, 1941년 경성교동공립국민학교, 1947년 서울교동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가 1996년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두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는 재동 헌법재판소 건너편에 자리한 서울재동초등학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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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의 명동과 임인식의 가회동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4. 29. 00:03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임인식, 정범태, 한영수, 홍순태, 황헌만, 다섯 명의 사진작가가 찍은 서울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기획전 이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되고 있다. (2024년 4월 26부터 6월 30일까지) 임인식과 한영수 등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라 이번에는 빨리 전시회를 찾았다. 한남동 라니서울에서 개최되었다가 어제 끝난 한영수 작품의 전시회 'INNOCENCE: 순수의 시간'은 차일피일하다 그야말로 막차를 탔던지라 이번 전시회는 서둘러 나섰던 것이다. 차제에 말하자면 'INNOCENCE: 순수의 시간'은 기존에 알고 있던 한영수의 세계가 아닌 초현실을 다룬 전시회여서 이색적이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잠시 썰을 풀자면 내가 한영수를 알게 된 것은 아래의 '폭우 속의 청계천' 때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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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부군당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4. 25. 06:48
용산 원주민으로 짐작되는 연세든 사람에게 부군당(府君堂)의 위치를 물어보면 모두가 잘 알고 있을뿐더러, 더러는 어느 부군당을 찾느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용산에는 그만큼 부군당이 많다는 뜻이니 대충 짚어봐도 이태원, 동빙고동, 서빙고동, 한남동 등에 있다. 용산구 용문동 고개에 있는 남이장군 사당이나 보광동 오산중·고등학교 부근의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도 부군당에 속한다. 까닭에 용산에만 유독 부군당이 많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것은 서울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신당(神堂)이라 더욱 그러한데, 2008년 용산문화원에서 펴낸 이라는 책에는 각 부군당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에 관한 설명은 따로 없다. 하긴 용산문화원이라고 그 이유를 알 리 없을 터, 사실 부근당이라는 단어의 유래나 뜻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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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왕과 윤치창이 살았던 가회동 집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4. 23. 06:58
반계 윤웅렬의 나머지 두 아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순서대로 둘째인 윤치왕(尹致旺)부터 말하자면 그는 1세대 해외유학파 의사로서 1919년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의학부(Faculty of Medicine)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영국 왕립아동병원 정형외과 의사로 근무하다 귀국하였다. 언뜻 보자면 요즘 어떤 의학도의 프로필인 듯하지만, 그가 유학을 갔다는 1919년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95년 전이다. 그가 유학했다는 글래스고 대학교의 사진은 시대감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윤치왕은 돌아와 세브란스 의전 교수(1927~1944년)와 제2대 세브란스 병원 원장(1938~ 1939년)을 역임했으며, 제1대·2대 대한산부인과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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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윤웅렬과 그 아들 윤치호가 살던 집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4. 22. 06:15
반계(磻溪) 윤웅렬(尹雄烈)은 1840년(헌종 6) 아산에서 지중추부사를 지낸 윤취동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웅렬은 후취에게서 난 서자이기는 하나 본부인의 불임으로 인해 얻은 아들인지라 적자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윤취동의 나이 마흔에 얻은 자식인지라 더욱 애지중지했는데, 연이어 동생 영렬(英烈)이 태어났다 (먼저 말하자면 윤영렬의 손자가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이다) 형제는 의가 좋았고, 또 힘이 좋아서 동네 어깨로 행세하였던 바, 내친김에 둘 다 무과를 보아 입격했다. 윤웅렬은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이후 아버지 윤취동이 고종에게 뇌물을 주어 별기군 부교관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을 꼬이게 만들었으니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별기군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