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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도(밤섬)에서 일어난 엽기적 살인사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5. 3. 08:26

     
    앞서 1편(☞ '한강의 무인도 밤섬')에서 채 설명을 못했으나 밤섬이라는 지명은 와우산에서 본 모양이 밤톨처럼 생긴 데서 유래됐다. 당시에는 한자어인 율도(栗島)로 불렸다. 지금 보면 밤보다는 땅콩처럼 생겼으나, 과거 섬이 작았을 때는 밤톨처럼 보였을 것이니 아래 심사정의 그림에서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마(馬), 판(判), 석(石), 인(印), 선(宣)씨의 5개 희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앞서 말한 대로 배를 만들고 누에를 치며 생계를 이었다.
     
    주민들은 길이 18m의 장도릿배, 15m 정도의 조깃배, 12m 정도의 늘배 등을 만드는 배 목수 일을 했다. 이들의 기술은 꽤 뛰어났던 듯, 상류인 단양·영월에서부터 하류인 김포·강화도에서까지 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또 '배 제작술을 배우려면 밤섬으로 가라’라는 말이 있었다고도 하니, 이들의 생활은 당대 백성들에 비해 꽤 유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료인 목재를 조달해야 했을 것이니 번외의 상행위도 빈번했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시대 화가 심사정(1707 ~ 1769)이 그린 밤섬 / 당시 밤섬은 서호8경의 하나였다.
    1964년에 찍은 밤섬
    최근 드론으로 찍은 사진
    점점 커지는 밤섬 얘기를 앞서 1편에서 다루었다.
    2024년 서강대교 위에서 찍은 사진
    2024년 여의도 쪽 사진
    밤섬의 내부
    영화 '김씨 표류기' 속 밤섬
    밤섬주민 옛 생활터 표석 / KOCIS(대한민국 홍보문화서비스) 사진

     
    근거는 전혀 없는 얘기이나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말했던 율도국이 혹 이 섬을 모티브로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 시대 이 섬은 분명히 이상향에 가까웠을 것이니 적어도 빈곤과 도둑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서로 간에는 도둑질을 할 이유가 없었고, 외부와 단절된 섬이라 도둑이 들어 올 일도 없었다.  
     
    그런데 중종 28년인 1533년, 이 평화로운 섬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그것도 매우 끔찍한 살인이었으니, 시신은 목이 끈으로 졸린 채 얼굴이 흉하게 파손되고 국부에는 막대기가 꽂혀 뽕나무 아래 유기되었다. 살해된 사람은 여자로서 주민은 이닌 것으로 판명됐다. 다만 피해자가 이곳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죽은 후 시신이 이곳에 유기되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보고를 받은 중종은 사안을 중하게 보고 승정원에 삼성교좌(三省交坐)로 의심나는 자를 끝까지 추국하라 명했다. 삼성교좌란 세 관청이 임금의 특지를 받고 죄인을 교대로 추국하는 일로서, 세 관청은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를 말한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내무부, 법무부, 경찰청이 모두 사건에 투입된 셈이었다. 얼마 후 살해된 여인의 신원과 사건의 대강이 밝혀졌으니 중종실록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판의금부사 김근사 등이 아뢰기를, "율도(栗島, 밤섬)의 유기된 시체는 반드시 대갓집의 사나운 부인이 투기하여 죽였을 터인데, 세 겨린(切隣, 이웃)이 알지 못합니다. 노비들에게 고발하도록 하라고 하문(下問)하셨기 때문에 신들이 <대명률(大明律)>을 보니, 노비와 품팔이하는 사람은 모반(謀叛)·대역(大逆) 외에는 자기 주인의 일을 고발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우리 나라의 전례를 상고해 보아도 이런 예가 없으니, 이제 전례를 만들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풀어보면, "피해자는 불륜녀로서 본부인에 의해 살해된 듯하다. 아마도 본부인이 노비들을 시켜 은밀히 처리한 듯하여 이웃들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자세히 알려면 노비들을 추국해 살인을 교사한 상전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에는 모반과 같은 역모죄를 제외하고는 노비가 상전을 고발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바, 새삼 전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덮자'는 것과 진배없는 말이었는데, 다만 다른 집의 노비나 공노비가 범인을 고발해올 경우는 면천해 양인(良人)이 되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이런 뜨뜨미지근한 대책이 해법이 될 리 없을 터,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고 사건도 유야무야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자를 잡는 데 있어서도 신분이 문제가 됐다. 하지만 신분으로 인해 당해야 되는 억울함이 어디 한 두가지였겠는가? 신분 차별이 없다 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혹간은 그런한 데 말이다. 그래서 생각이 미쳤거니와 앞서 말한 부군당(府君堂)이 비단 강을 오가던 뱃사람들이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당의 용도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용산의 부군당')

     

    즉 신분의 제약에서 오는 억울함을 소원(訴願)하는 장소로도 쓰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니, 그것이 아니라면 힘없는 그들은 어디 가서 원풀이을 했겠는가? 
     
    그 부근당이 밤섬에도 있었다. 지금은 마포구 창천동 와우산 중턱에 옮겨졌는데, 앞서 말한 대로 1968년 2월 10일 밤섬이 폭파되며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와우산 기슭으로 강제 이주당할 때 함께 옮겨온 듯싶다. 지금 밤섬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흩어졌지만 밤섬 부군당과 도당굿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어 매년 1월 2일 이곳에서 굿이 행해진다. 
     
     

    와우산 밤섬부군당
    부군당 담벼락의 안내문
    옛 밤섬부근당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사당
    밤섬부근당은 이와 같은 모양새였다. / 사진은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의 민속사당이다.
    반대쪽에서 찍은 사진
    2009년 마포구 밤섬보존회 주최로 밤섬을 방문하는 실향민들
    2016년 밤섬을 방문하는 실향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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