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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촌 한 동네에 살던 혁명의 주역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5. 4. 21:40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써 외면 하는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萩)시는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야마구치현까지는 부산에서 약 215km이다. 다만 직항은 없어 전통의 부관페리를 타고 밤 10시에 출항하면 다음 날 아침에 7시에 시모노세키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관부연락선이라고 불렸던 부관페리는 부산과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서 한 자씩 따 붙였다. 시모노세키에서 차로 갈아타고 북쪽으로 약 1시간 30분을 가면 하기시 죠카마치(城下町, 성밑 마을)에 이른다.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항
    시모노세키~하기시
    하기시 죠카마치 풍경

     
    1874년 스스로 해체한 하기 성(城)과 이어진 죠카마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유명한 요시다 쇼인(1830~ 1859)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다. 요시다 쇼인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 일본에 도착해 개항을 요구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강대국 미국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고 미국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밀항을 위해 시모다(下田)에 정박 중이던 페리의 흑선에 잠입했으나 페리의 거절로 수포로 돌아갔다.
     
    쇼인은 막부에 의해 체포되어 쓰가리무라(束荷村)와 하기의 형무소에서 1년 반가량 형을 치렀다. 그곳에서 그는 다방면에 걸친 방대한 양의 책을 미친 듯이 읽었다. 그리고 출옥한 후에는 1856년부터 숙부가 운영하던 작은 서당 쇼카손주쿠에서 동네 청년들 가르치기 시작했다. 세계가 변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동참해야 한다는 선각자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약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을 교육했으나 그 아래서 후학이 92명이나 배출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야마구치현의 자산이자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1830년 하기의 하급무사 가정에서 태어난 쇼인은 6세 때 숙부 다마키(玉木文之進)로부터 신학문과 병학을 배웠다. 아울러 천재성도 겸비했던 듯하니, 11세의 어린 나이에 번주(藩主) 앞에서 병법서 <무교전서(武敎全書)>를 강의하였으며, 19세에 번(藩)의 학교인 명륜관(明倫館)에서 병학과 해외정세에 대해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막부시대라는 시대적 어둠을 걷어내고 새날을 밝히려는 선구자였으나 안세이 사건(安政大獄)에 연루돼 1859년 10월 에도에서 처형되었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 쇼카손주쿠는 소나무 아래의 시골 서당이라는 뜻이다.
    쇼카손주쿠의 내부 / 요시다 쇼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에게 배운 학생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당시 그가 살던 초가집(茅葺, 가야부키)은  죠카마치에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쓰가리무라라는 빈촌(貧村)에 위치한다. 그는 1841년 10월 22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리스케(利助), 아버지의 이름은 쥬조(十藏)이며, 성은 하야시(林)라고 하나 명확치 않다. 무사계급이 아니면 성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인데, 리스케가 9살 때 아버지 쥬조가 후사가 없던 이토 나오에몬이라는 사람의 양자로 들어가며 가장 말단 무사인 아시가루(足輕)에 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토라는 성도 생겼다. 
     
     

    하기시 죠카마치
    재현된 이토 히로부미의 초가집

     
    이토 역시 배우고 싶은 마음에 쇼카손주쿠의 문을 두르렸다. 쇼인은 받아주기는 했으되 입실(入室)해 함께 공부할 수는 없었다. 하급무사인 까닭이었다. 이토는 문밖에서 귀동냥을 하며 배웠지만 그렇다고 덜 들은 것은 없었으니 시나브로 시야가 밝아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야마가다 아리토모, 미우라 고로, 가스라 다로, 소네 아리스케를 만났다. 모두 메이지 유신에 앞장서 일본을 개혁한 자들로서 조선 침탈과도 뗄 수 없는 자들이다. 
     
    약간만 언급하자면, 야마가다 아리토모는 대본영 육군대신으로 명성황후 시해의 밀명을 내렸으며,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는 주(駐)조선일본공사로 와 1896년의 을미사변을 실행했다. 가스라 다로는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내며 1905년의 을사늑약을 주도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장본인이며, 소네 아리스케는 이토에 이어 2대 조선통감이 된 자로서, 경주 석굴암 안에 있던 작은 석탑을 훔쳐간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우리의 귀에 익은 이노우에 가오루(내·외무대신, 조선공사) 데라우치 마사다케,(육군대장, 초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조선주차군사령관, 조선총독) 고무라 쥬타로(조선공사, 외무대신)가 모두 동시대의 아마구치현 출신인 바, 어떻게 그렇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지 신기하기조차 한데, 더 나아가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는 죠슈(야마구치현의 당시 이름) 5걸로서 영국에 유학해 근대 일본의 반석을 닦았다.  
     
     

    쇼카손주쿠의 밖에서 공부하는 이토 / 하기시(市) 이토 히로부미 기념관의 미니어처
    젊은 날의 이토 / 죠슈번 하급무사 시절이다.
    죠슈 5걸 / 유학생 5인이 런던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들은 모두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된다. 오른쪽 위가 이또 히로부미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토는 런던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그가 영국으로 떠날 때의 짐은 1862년 발행된 오류투성이의 영일사전 1권과 잠옷 1벌뿐이었다. 그는 돌아와 죠슈번을 개혁하고, 나아가 메이지 유신을 견인하며 일본을 근대화시켰다. 일본제국헌법(메이지 헌법)의 초안 마련과 일본 국회 양원제 도입, 일본의 산업화, 을사늑약과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 등은 모두 그가 영국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나머지 인물들도 귀국해 번국(藩國) 개혁에 착수했다. 그들은 국가의 힘은 무사(사무라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고 알았기에 백성들 개개인에 대한 교육에 힘썼고, 계급 차별 없는 등용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실용노선을 일본 중앙정부에 요구해, 내전을 벌이면서까지 관철시켰다. 이것이 곧 1868년 메이지 유신이었다. 
     
    일본은 이 메이지 유신으로써 제국주의 행(行) 막차에 탑승할 수 있었으며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것을 주도한 자들의 대부분이 야마구치현 시골 동네에서 나온 자들인데, 동시대에 이와 같은 인물들이 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거듭 놀랍다. 거짓말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다. 부러운 마음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인데,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거의 동시대에 조선 한성의 북촌에서도 있었다.
     
    우선 재동에는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가 살았다. 알려진 대로 박규수는 <연암집>과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일찍 개화된 자였다. 그는 북촌에 살며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을 지도했으니,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된 박영효는 당시를 회상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의 신사상(新思想)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채에서 나왔소. 나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내 백형(박영교)은 재동 환재(박규수) 대감 집에 모이곤 했소. 우리는 <연암집>에서 양반귀족들을 공격하는 연암의 글로부터 평등사상을 배웠소." ('박영효씨를 만나다', 이광수 1931년 <동광>19호)
     
    그 재동 박규수의 집 담 하나 너머가 홍영식의 집이었다. (당시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근방의 홍현(紅峴)에는 김옥균과 서재필이 살았으며, 멀지 않은 안동별궁 부근에는 서광범의 집이 있었다. 이들은 박영효의 할아버지이자 대표적 개국론자였던 박규수에게 사사하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는데, 그들은 모두 반가의 자식들로서 같은 동네에 모여 살며 '개화'(開化)했다. 
     

    직접 박규수 문하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박지원과 박규수의 문집을 읽고 이용후생(利用厚生)론 대외개방론에 눈을 뜬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도 이웃인 가회동에 살았다. 이토가 교육받고 교류했던 야마쿠치현 하기시와 비슷한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양반이었으며 대부분 과거에 급제한 신진관료들이었다. 낮은 사무라이들이 중심이었던 일본보다 더 나은 조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이 주모자로써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홍집과 어윤중이 고종의 분풀이로써 타살(打殺)당하며 조선의 개혁은 영영 끝장나고 말았던 바, 생각할 수록 안타깝고 비통하기 이를 데 없다. 
     
     

    재동 헌법재판소 내의 박규수 집과 홍영식 집의 표석
    박규수 집 뜰에 있었다는 재동 백송
    백송 옆 계단
    헌법재판소에서 보이는 백악산
    헌법재판소 뒤의 한옥
    홍현 김옥균 집터
    혁명의 주역들이 환담을 나눴을 김옥균 집 부근의 느티나무
    그들 개화파들이 살았던 가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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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