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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석의 신도비를 지은 박세당과 석천동 수락폭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5. 17. 06:37

     

    1637년 2월 24일(정축년 음력 1월 30일) 추운 겨울날, 찬바람 부는 송파 삼전나루 수항단(受降壇, 항복을 받는 단상) 아래서 조선의 임금 인조가 무릎 꿇려졌다. 청나라의 침입을 맞아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농성하던 인조가 결국은 성을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나와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해야 했던 것이다. 삼궤구고두례는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으로, 1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3번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총 9번의 대가리박기를 완성하게 된다. 

     

     

    남한산성 우익문 / 인조가 항복하러 나온 남한산성의 서문이다.

     

    이렇게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태종은 군사를 물려 제 나라로 돌아갔고, 조선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워야 했다. 문제는 만대(萬代)의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치욕적인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으니, 정축년 3월 20일에 당대의 문장가 4명이 추려졌다.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이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후보 사퇴의 상소를 올렸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 4명은 꼼짝없이 비문을 찬출(撰出)해야 했으나, 이경전은 병을 구실로 차일피일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조희일은 일부러 개판으로 써 제출해 고역을 모면했다. 이에 장유와 이경석의 글이 청나라로 보내졌는데, 장유는 내용 중의 인용문이 마뜩지 않다 하여 탈락되고 이경석의 글을 보완해 새기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예문관 부제학 이경석은 자신이 비문을 짓게 된 일을 한탄하여 "글 쓰는 법을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有悔學文字之語)"고 했지만 결국은 악역을 담당해야 했다. 비석은 1639년 11월에 완성해 12월 8일 삼전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에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 식량이 떨어졌을 때 청태종이 공격하지 않고 항복하기까지 기다려준 일, 항복을 받아주고 예물을 하사한 일, 지난 날 광해군 때 후금(청나라의 전신)군을 치러 온 강홍립의 군대를 다치지 않고 돌려보내준 일이 기록됐다. 

     

    더불어 정묘호란 때 까불고 세폐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청태종이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말미를 준 일, 강화도를 도망갔던 빈궁과 왕자 등을 포로로 잡았으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여 돌려보내 준 일, 나라가 멸망할 수 있었음에도 종묘사직을 보존케 해 준 일 등을 칭송해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찬(讚)했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만물을 익게 하고 키우시는데, 황제께서 그걸 본받아 위엄과 은덕을 함께 베푸셨도다. 황제께서 조선을 정벌할 때 십만 대군으로써 맹호출림의 기세로 오셨도다. 참전 군사들은 서역 사막의 군사들로부터 북방민족들까지 망라되어 창을 들고 덤비니 그 기세가 매서웠도다. 그러나 황제는 매우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렸으니 그 열 줄의 글은 준엄하고도 자애로웠다. 처음에는 어리석어 알지 못해서 근심을 끼쳐드렸으나 황제께서 명철하신 명을 내리시니 마치 잠 속에서 깨어난 듯하도다. 우리 임금께서 삼가 승복하여 신하를 거느리고 항복하니 이는 황제의 위력이 무서워서만이 아니라 큰 덕에 귀의하였음이리라.

     

    그 갸륵한 마음을 황제께서 칭송하시니 은택과 예우를 흡족히 하시고 얼굴을 펴고 무기를 거두셨도다. 게다가 준마와 경쾌한 갑옷을 하사하시니 장안의 모든 남녀가 그 덕을 노래하였다. 우리 임금이 한양으로 돌아간 건 황제의 배려였고, 또한 군대를 거두어 우리 백성을 살리시니 흩어진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농사지으라 권고하셨도다. 국가는 옛 모습을 되찾고 사직은 새로워지니 마른 뼈에 살이 다시 붙고 얼었던 풀뿌리가 봄을 만났음이다. 드높은 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삼한이 존속함은 오직 황제의 덕이기 때문이도다.

     

     

    석촌호수 부근의 대청황제공덕비 / 글씨는 당대의 명필 오준, 각자(刻字)는 신익성에게 돌아갔다가 신익성이 어깨 마비증상을 호소해 이여징으로 바뀌었다.
    뒷면 비문 / 앞면은 만주어와 몽골어로, 뒷면은 한문으로 쓰였다.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야 했던 이경석의 고역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었다. 이경석은 조선 사람이 모두 하기 꺼려하는 일을 맡아 처리한, 쉽게 말해 모두가 피해 가려고만 했던 한 무더기의 더러운 똥을 치운 의인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은 그 노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욕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졸렬한 그 자가 오랑캐 세력을 옹위하여 일신을 보전했던 바, 개도 그가 먹던 음식은 먹지 않을 것이다(則狗不食其餘)"라는, 차마 혼자 해서도 아니 될 말을 좌중에 내뱉었다. 이후 송시열과 그 일당들은 이경석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이경석은 그 모욕을 묵묵히 견디다 2년 뒤인 1671년 문득 졸하였다. 이후 1703년(숙종 29년) 서계 박세당이 이경석 후손의 부탁을 받고 신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나는 그 당시 살지 않았음에도 당대에 붓을 잡을 이, 서계 외에는 없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서계는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재꼈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경서에 이르기를, '노성(老成, 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함)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던 바, 노성한 사람은 중요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노성한 자를 업신여기는 일인즉 천하의 일 가운데 가장 상서롭지 못한 짓이다.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함에 과감한 자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업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인즉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손가.

     

    비문은 다짜고짜 이경석을 업신여긴 자들을 꾸짖으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맺었다.  

     

    위선과 방자함으로 유명한 자가 있도다. 올빼미와 봉황은 애당초 다른 종자이거늘 화를 내며 까불도다. 선하지 않은 자가 군자를 미워했던 바, 무슨 병(病)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일을 돌에 새겨 남겼나니 사람들이여, 와서 (이경석의 처사를) 공경할지어다. (姿僞肆誕世有聞人 梟鳳殊性載怒載嗔 不善者惡君子何病 我銘載石 人其來敬)

     

    그는 송시열을 올빼미에, 이경석을 봉황을 비유하며 이경석을 군자라 칭송하였다. 반면 송시열은 위선과 방자함이 가득한 소인배에 불과하였다. 송시열의 추종자들은 돌아가신 스승님을 모욕했다고 분노하며 박세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더불어 박세당이 저서 <사변록>에서 기존의 성리학과 다른 주장을 하며 주자를 비판한 일까지 소환되었다. 숙종 임금 역시 이에 동조하여 박세당이 지은 모든 비문을 훼철하고 그의 저서들을 태워버리라는 명령과 더불어 유배를 명했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초상
    1975년 후손들이 새로운 신도비(오른쪽)를 건립하며 땅이 묻혀졌던 옛 신도비를 꺼내 세웠다.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이경석 묘소 앞에 위치힌다.

     

    하지만 그 아들 박태보가 유배길에서 먼저 죽은 일, 그리고 고령인 점이 참작돼 유배만큼은 면했다. 박세당은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아들 박태보에 관해서는 앞서 '조선의 드문 선비 박세당 박태보 부자(父子)'에서 자세히 다루었고, 그들 부자를 배향한 수락산 노강서원을 들여다본 적도 있다. 이번에는 박세당이 농사짓고 살던 수락산 서계(西溪)를 좀 더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았다. 맑은 물 쏟아지는 수락폭포의 장쾌한 물줄기가 흡사 박세당의 기개 같고, 유곡(幽谷)이 그의 속내처럼 깊다.

     

    의정부시 장암동 입구에 박세당 고택이 있다.
    그리고 고택 담장 아래로 계류가 흐른다. 박세당은 이 골짜기를 서계(西溪)라 칭하며 아호로 삼았고 자신을 서계초수(西溪樵叟), 집 부근을 석천동(石泉洞)이라고 불렀다.
    석천동 계곡에 박세당이 좋아한 취승대가 있다./ '취승대' 글씨는 그가 직접 썼다. 멀리 수락산 미륵봉이 보인다.
    취승대 바로 옆으로 '석천동' 글씨도 보인다. / 박세당은 <취승대기>에 "집 남쪽에 있는 개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 위의 석대(石臺)를 취승대라 이름하고 음대(陰臺)라고도 불렀다. 사시사철의 즐거움이 모두 이곳에 있다"고 하였다.
    석천동에 자리한 노강서원 / 한강 노량진에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후 이곳에 새로 지어졌다.
    서원 앞 청풍정 터 / 박세당이 강론하던 곳이다.
    청풍정 앞 계곡
    서계가 깊어지기 시작하는 곳.
    계곡 위로 낮달이 떴다.
    당겨 봄.
    수락폭포가 보인다.
    장쾌한 수락폭포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협곡
    낮달이 정상 부근까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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