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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면목동에 살던 네안데르탈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5. 20. 00:06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대개 '기록의 유무'에 따른다. 즉 문자의 사용 이전은 선사, 이후는 역사시대로 분류한다. 그중 선사시대는 구석기·중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시대로 나뉘는데 이번에는 그 구분이 '도구'다. 즉 당시의 인류가 타제석기(뗀석기)를 사용했으면 구석기, 마제석기(간석기)를 사용했으면 신석기, 함께 사용했으면 중석기, 구리로 만든 연장이나 무기를 사용했다면 청동기, 쇠로 만들어 썼다면 철기시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살아온 시대를 뭉퉁그려 역사시대로 분류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흔히 한반도의 역사를  35만년으로 칭하기도 한다. 이는 1978년 당시 주한미군으로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병사 그렉 보웬(Greg Bowen)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그가 연천 전곡리에서 구석기 유물을 발견하면서부터 한반도의 역사가 무려 30만년이나 비약됐다. 특히 그가 발견한 아슐리안 양면 핵석기(주먹도끼)는 세계사의 선사시대 이론을 바꾼 대사건이었다. (☞ '세계사를 바꾼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 
     
     

    국립중앙박물관의 주먹도끼 / 돌 하나로 찢고, 자르고, 찍고, 파기 등이 가능했던 구석기시대의 맥가이버 칼이다.
    안내문 / 전곡리 주먹도끼들(Chongoknianaxes)이 발견된 이후 하바드대학 모비우스 교수의 선사시대 지역분류와 아슐리안 석기 이론을 재평가하는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 주먹도끼는 마구잡이로 만든 뗀석기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겠다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구석기시대의 가장 선진화된 도구였다.

      
    그렇다면 서울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언필칭 정도(定都) 600년이라 하니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1392년부터가 서울 역사의 시작일까? 고려가 남경(南京)으로 삼은 1천년 전일까?  백제의 시조 온조가 하남 위례성을 쌓은 기원전 17년일까? 아니면 암사동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던 6천년 전일까?

     

    그간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서울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비약하니 적어도 3만년 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이는 1967년 중랑구 면목동 면목고등학교 인근 택지개발 공사장에서 경희대박물관 팀이 구석기시대 석기유물을 발굴하며 유추한 결과다. 다시 말하겠지만 면목동 선사유적은 서울에서 발견된 처음이자 마지막 구석기 유적이다. 

     

    당시수집된 석기와 석편은 모두 112점에 달하며 이중 석기는 39점으로, 이 유물들을 측정한 결과 3만년 전 이전의 후기구석기 유물로 밝혀졌다. 구체적으로는 양날찍개· 망치 등의 몸돌석기가 28점, 긁개 등의 격지석기가 11점으로, 이 유물들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대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참고로 주요 석기의 사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서울 면목동에서 발견된 후기구석기 유물
    면목동 발견 주요 뗀석기 일람

     

    당시 유물들은 지금의 면목고등학교 아래쪽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으나 이후 곧 인근 택지개발 공사가 진행되며 구석기인들의 생활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굳이 현장을 짚자면 면목본동 주민센터 및 녹색병원에서 면목3·8동 아파트 단지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들은 중랑천에서 어로생활을 하고 망우·용마·아차산에서 수렵생활을 하며 살았던 최초의 서울시민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잊혀진 조상이 되고 말았다. 

     

     

    망우산과 인근 주거단지
    면목본동 방향 도로
    전곡리선서박물관의 한반도 구석기인 / 면목동에 살던 구석기인도 이와 비슷했으리라.
    용마산
    용마산 폭포
    중앙의 50m 수직폭포
    옛 채석장을 동양 최대의 인공폭포로 조성했다.

     

    다만 이 면목동 구석기인들이 우리의 직계조상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필시 아닐 것이다. 3만년 전의 인류가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아종(subspecies)인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일지도 모른다. 쉽게 네안데르탈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1996년 이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분들은 크로마뇽인에 앞서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배웠던 그 종족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 아닌 전혀 별개의 종족으로, 30만년 전에 출현해 3만년 전까지 존속했다. 그러면서 4만년 전에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와 적어도 1만년을 공존하다 멸종했다. 그래서 유명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드물기는 하지만) 두 종족간의 교배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지난 2010년 5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음을 독일 막스프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가 밝혀냈다.

     

    그동안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면밀히 분석해온 막스프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는 진전된 인간 유전자 지도를 바탕으로써 우리 현대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배열이 14% 비슷하다는, 즉 우리 인간에게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는 네안데르탈인과 우리 인류의 직접 조상인 크로마뇽인이 교배를 하였고, 그로 인해 새로운 종이 번식되었음을 의미하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울러 막스프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한반도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즉 중동에 있던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 만나 교배를 하였고, 그렇게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지니게 된 후예들의 일부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이주했으며, 또 일부는 초원의 길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까지 진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은 막스프랑크 연구소 선임 디렉터인 스반테 페보 박사의 주장인데, 그의 주장대로라면 네안데르탈인의 두꺼운 피부와 억센 모발은 이종교배의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만주와 한반도에 살던 현생인류가 극심한 추위를 극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동아시아인은 서유라시아인에 비해 네안데르탈인 게놈이 20% 정도 더 많다)

     

    면목동의 구석기인이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네안데르탈인이거나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가정이지만, 그 마지막 네안네르탈인은 한반도 서울의 면목동에서 군집생활을 하다 멸종했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들이 살았던 서울 유일의 구석기 유적지가 잊혀지는 것은 안타깝다.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면목동 망우산 앞 주거단지
    예전 구석기인들은 이런 곳에 살았다. / 독일 메트만 네안네르탈 박물관
    네안데르탈인 화석 옆에 선 페보 박사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에 비해 조금 뚱뚱하고 조금 거칠게 생겼다 뿐 그리 꿀리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뇌의 용적은 오히려 현생 인류보다 컸다.(오른쪽)  그런데도 그는 현대인의 조상이 되지 못하고 나중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2009년 5월에 이어 최근인 2020년 이탈리아의 한 석기 시대의 동굴에서 예리한 도구에 긁혀진 네안데르탈인의 뼈가 발견되었다. 누군가가 네안데르탈인을 식인(食人)했고 뼈에 붙은 살까지 잘 발라 먹었다는 뜻인데, 그 누구로 지목될 수 있는 집단은 호모 사피엔스밖에 없다. 즉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훨씬 전투적이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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