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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진승의 나비 그림과 석주명·박경리의 나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5. 24. 22:03

     

    금번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기념전시회'(5.1~6.12)에 나온 회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었던 그림은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의 '추협고촌'(秋峽孤村)과 고진승의 나비 대련(對聯, 한 쌍을 이루는 족자 그림)이다.

     

    노수현은 앞서 말한 심전(心田) 안중식의 제자로 젊어서는 스승의 화법을 답습해 관념적 공간이 제공되는 장식적 화풍의 산수화를 그렸으나 1920년경부터는 원근법이 가미된 적막감 도는 독자적인 산수화를 추구했다. 아래의 '추협고촌'은 그 대표적인 그림으로서, 늦은 가을날의 고요한 산촌 풍경을 흑백으로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는 이 그림으로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으나 이후 '추협고촌'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번에 세상에 다시 나왔다. 길이 170cm에 이르는 대작이다.  

     

     

    심산 노수현의 '추협고촌'
    '추협고촌'에 몰입된 또 다른 관람객 / 중앙일보 사진

     

    조선 후기 화가 남계우(1811~1890)는 이름 대신 아예 '남나비'(南蝶)로 불릴 정도로 나비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번 간송미술관에 걸린 '석죽호접'(石竹蝴蝶)'과 '자원호접(紫苑蝴蝶)'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석죽화(파랭이꽃) 및 자원화(개미취꽃)와 어우러진 나비의 군무(群儛)는 남계우 나비 그림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20세기 초의 곤충학자 석주명(1908~1950)은 남계우 그림 속 나비들의 종(種)을 식별하고 암수까지 구분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이는 남계우의 나비 사생이 그만큼 사실적이었음을 대변한다. 

     

     

    남계우의 '석죽호접'(왼쪽)과 '자원호접' / 각 29.5x122.4㎝
    '석죽호접'의 부분
    남계우의 또 다른 그림 '화접도'

     

    반면 남계우의 제자였던 고진승(1822~?)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번에 그의 그림이 세상에 나왔다. 아래의 '금전화접(金錢花蝶, 금잔화와 나비)'과 '심방화접(尋芳蝶, 꽃 향기를 찾는 나비)'이 그것으로, 특히 이 대련은 고진승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남계우가 나비의 군무를 그렸다면 고진승 그림 속의 나비는 확실히 외롭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으로써 나비의 고고한 세계를 표현했던 바, 작가가 추구했던 인생관이 드러나 보인다.

     

    사실적 관찰에 있어서는 고진승도 스승에 뒤지지 않았으니, 그는 유리 항아리에 여러 종류의 나비를 잡아 넣어두고 그 생태를 관찰해 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에 고진승은 스승 남계우의 '남접'에 비견돼 '고접'(高蝶)으로 불렸다고 한다. 

     

     

    고진승의 나비 대련 '심방화접'(왼쪽)과 '금전화접' / 각 22.6x116.8㎝
    '금전화접'의 부분

     

    나비에 대해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석주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평생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고 분류한 세계적인 나비 연구가로 흔히 '나비박사 석주명'으로 불린다. 석주명에 대해 말하기 앞서 ' 미국 지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지질학자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William Morris Davis, 1850~1934)의 한국에서의 일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참고로 그는 세계 최초로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찾아낸 사람이다.

     

    1932년 몽골을 탐험한 모리스는 경성을 경유해 일본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초행길의 한반도 트립이어서 경성과 개성을 착각하여 그만 개성역에 잘못 내리고 말았다. 별수 없이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했던 모리스는 개성의 여기저기를 구경하러 다녔는데, 그러던 중 송도고등학교 박물관에 들렀다가 그곳에 전시된 엄청난 양의 나비표본을 보게 된다. 그 표본들에 감탄한 모리스는 주인공을 찾았고, 이 학교 박물교사(생물교사)였던 석주명과 대면하게 된다.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
    석주명

     

    석주명은 1908년 대한제국 평양에서 출생했다. 1929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업학교 농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 곤충학 권위자인 규슈대학 오카지마 긴지 교수의 권유로 한반도 나비를 연구하였고, 이후 개성 송도고등학교 박물교사로 재직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수 만 마리의 나비표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즈음, 위에서 말한 모리스의 조력으로 미국 동물학회와 표본 교환 등을 하게 되고, 193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박물관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보조받게 된다. 

     

    이어 1940년에는 영국왕립학회의 지원도 받았으며,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회' 의뢰로 <조선산 나비접류 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을 펴내며 일본학자들을 누르고 명실공히 아시아 최고의 곤충학자로 떠오르게 된다. 일제 지배 하의 조선인 학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서를 발표하고 일본인에 앞서는 곤충학자가 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한국의 나비에 대해 일본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내렸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학자들에 의해 900종 이상으로 분류된 한국산 나비의 종류를 248종으로 정리한 일이었다. 일본학자들이 '신종 발표'의 성과에 집착해 분류한 동종이명(같은 종에 붙은 다른 이름)의 나비 844개를 퇴출시킨 것이었다. 석주명의 나비 채집과 연구를 위한 피나는 노력 및 그에 관한 일화는 출간된 단행본 서적들마저 책 한 권에 담기를 벅차했던 바, 여기서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평생에 걸쳐 채집한 나비 75만 마리 표본 가운데 60만 마리 표본을 스스로 불태운 얘기는 꼭 하고 싶다. 

     

    그는 연구에 더 몰두하고자 34세 때 송도고등학교 박물교사를 사직하고 경성제대 의학부 생약연구소 촉탁이 됐다. 그리하여 교직을 떠날 때 "표본을 관리할 사람이 없는 마당에 표본을 남겨둘 경우 오히려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며 학자적 사명으로써 그것들을 스스로 불태웠다. (이때 그는 나비들을 위한 위령제도 함께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나머지 15만 마리의 표본이 보관된 서울 남산국립과학박물관이 한국전쟁 중 폭격을 맞으며 그 또한 모두 불탔던 바, 지금 한국에 남은 그의 표본은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된 나비 32종의 원형 액자 표본이 유일하다. (※ 석주선기념박물관은 본래 단국대학교 부속 박물관이라 불렸으나 한국복식사와 민속학계의 권위자인 난사 석주선 선생의 업적과 기증을 기려 석주선기념박물관으로 개칭하였다. 석주선은 석주명의 누이동생이다)

     

     

    송도고등학교 박물관에서 나비를 연구하는 석주명 / 그는 학교 박물관에서 아예 숙식까지 했고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줄여 연구했으며, 화장실에 갈 때만 책상 앞을 떠났다는 게 제자들의 증언이다.
    나비 표본을 불태우는 석주명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사라진 서울 남산국립과학박물관 / 조선통감부 및 총독부로 쓰였던 이 건물은 광화문 총독부 완공 후 은사기념과학관으로 전용됐고 해방 후 국립과학박물관으로 쓰였다.
    모두가 기억하기를 원치 않아 하는 그 공간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된 국내 유일의 석주명 나비표본 / 그는 '호랑나비를 비롯한 수많은 나비들의 이름을 명명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석주명이 사용한 영문타자기 / 영국왕립아시아학회로부터 영문논문을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석주명의 어머니 김의식은 기르던 황소를 팔아 이 영문타자기를 구입해준다. 이것으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를 쓴 석주명은 그 첫머리에 '평생토록 나의 연구를 변함없이 도와주신 어머니의 영전에 바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석주명은 폭격으로 나비 표본이 사라졌을 때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채집한 나비이며, 그 표본을 지키려 피란도 가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그때 스스로를 매우 불행한 학자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그보다 훨씬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비 표본의 전소로 비탄에 잠겨 있던 석주명은 1950년 10월 6일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신당동 집을 나섰다. 9.28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들이 물러난지 채 열흘도 되지 않은 때였다. 급한 마음의 그가 빠른 걸음으로 충무로 4가에 이르렀을 때, 까만 염색 군복을 입은 술 취한 청년들과 시비가 발생했다. 그들 무리와 교행 중 부딪힌 듯했다. 이에 서로 언성이 조금 높아졌는데, 그때 무리 중의 누군가가 석주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놈, 인민군 장교 같다!"

     

    석주명의 몸에 밴 억센 평안도 사투리를 주목한 듯싶었다. 그러자 무리 중의 또 다른 한 명이 석주명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에 다급해진 석주명이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아니요! 나는 나비학자 석주명이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하지만 상대가 나비학자 석주명을 알 턱이 없을 터, 곧 총소리와 함께 석주명이 쓰러졌다. 무리들은 쓰러진 상대를 바로 옆 개천에 밀어 넣고 사라졌고, 며칠 후 가족은 그곳에서 거적때기가 덮인 부패한 시신을 마주했다. 세계적인 곤충학자 석주명은 그렇듯 허무하게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42살이었다.  

     

     

    석주명의 백두산 나비 채집단
    석주명의 제주도 나비 채집단
    제주도에서 나비를 채집할 때의 석주명 / 깜둥이가 따로 없다. 실제로 학생들은 그를 깜둥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1938년에 찍은 석주명-김윤옥 부부의 사진 / 나비에 미쳐 살던 석주명은 끝내 김윤옥과 해로하지 못했다. 석주명은 제자 결혼식 주례사에서 "신랑은 나처럼 불행한 남자가 되지 말라"고 말했다.

     

    나비에 대해 한 사람만 더 추가해 말하겠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를 모티브로 한 소설 <나비야 청산(靑山) 가자>를 썼지만 결국 미완으로 끝났다. 2003년 작업을 시작한  <나비야 청산 가자>는 해방 이후 주인공 해연의 가족사가 <토지>에 이어지는 형식으로써 연재되다가 2007년 말 폐암이 발견되며 늦춰졌다. 박경리는 자신이 고령임을 들어 치료를 거부하고 집필을 지속하였으나 뇌졸중 증세가 겹치며 2008년 5월 5일 사망하였고, 소설도 원고지 442장만을 채운 미완으로 마감되었다. 

     

    앞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박경리는 해방 후 주안염전 관리 책임자로 부임했던 남편 김행도를 따라 인천으로 와 금곡동 주안염전 사택에서 신혼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는 이때 인천에서의 2년이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공산주의자였던 남편 김행도가 붙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박경리도 남편의 옥바라지를 위해 1949년 말 서울로 와야 했는데 김행도는 한국전쟁 중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행방불명되었다.

     

     

    1949년 금곡동 때의 가족사진 /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친정엄마임. (토지문화재단 자료)
    박경리 가족이 살았던 금곡동 동네

     

    <나비야 청산 가자>에서는 다분히 그때의 경험이 담겼을 것이다. 그런데 박경리 선생은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그래서 좌익의 시각으로 해방 이후의 정국을 그린 조정래의 <아리랑>과는 또 다른 세계를 그리며 좌익에 경도된 민중과 지식인들을 깨우칠 내용이 기대되었지만, 불행히도 세월은 우익의 편에 서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내에는 박경리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데,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2012년 서울 롯데호텔 앞에 푸시킨 동상이 세워진 데 대한 교류의 형식으로 우리 정부가 세운 것이다.

     

     

    20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박경리 선생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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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