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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공중시계 앙부일구와 일성정시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5. 28. 23:40

     

    앞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1888년에 착공하여 1892년 무렵 완공한 경복궁 집옥재(集玉齋)시계탑 대해 말한 바 있다. 언급한 대로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탑이나 엄밀히 말하자면 공공재적 성격의 것은 아니다. 시간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건청궁에 살던 왕과 왕비, 그리고 관리나 나인 정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각을 알 수 있는 시계탑 자체가 세워진 것만으로도 그 가치 매김은 충분하다.

     

     

    경복궁 시계탑
    1898년 <La Corée, indépendante, russe ou japonaise>의 삽화 / 신무문 오른쪽으로 시계탑이 보인다.
    물론 지금은 시계탑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종군화가 그림 속의 시계탑 / 청일전쟁 개전에 앞서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조선군의 전투를 그린 그림이다. 오른쪽으로 시계탑(색칠한 부분)과 신무문이 보인다.
    시계탑이 있던 집옥재 앞마당

     

    그렇다면 조선에는 그전에는 공중시계가 아예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 16년(1434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공중시계가 설치됐다고 말하고 있으니 바로  앙부일구(仰釜日晷)라 불리던 해시계이다. 앙부일구라는 말을 풀이하자면 '하늘을 우러러보는(仰) 가마솥(釜)의 해 그림자(日晷)'로서, 문자 그대로 솥에 비치는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끔 만든 기구이다.

     

    제작 시기는 세종조로, 세종대왕은 이천과 장영실로 하여금 해시계를 만들게 한 후 궐내의 보루각(報漏閣)과 흠경각(欽敬閣) 등에 두었다.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왕래가 많은 궐 밖의 혜정교(惠政橋, 현 종로 광화문우체국 부근에 있던 다리)와 종묘 앞에도 설치하여 백성들도 시간을 인지해 활용하게 하였는데, 아울러 농사에도 보탬이 되도록 시계의 수영면(受影面, 해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는 시각선과 함께 절기선을 두었다.

     

     

    창경궁 앙부일구 / 바깥지름 35.2cm, 안지름 24.3cm, 높이 14cm로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궁박물관 소장 앙부일구(보물 845호)의 모사품이다.

     

    아래의 <세종실록>에는 그와 같은 세종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나니, 시계의 시각을 글자로 표시하지 않고 12지신상 동물그림을 새겨 넣었다고 돼 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서, 설치된 날은 세종 16년(1434년) 10월 2일이었다. 

     

    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일영(日影해 그림자)을 관측하였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김돈(金墩)이 명(銘)을 짓기를, "모든 시설(施設)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 물시계)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지름에는 둥근 톱니를 설치하였으니 자방(子方, 밤 11시에서 새벽 1시를 가리키는 방향)과 오방(午方,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를 가리키는 방향)이 서로 마주 보았다.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 12지신)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경복궁 사정전 앞의 앙부일구
    흠경각 / 앙부일구·옥루를 비롯한 과학기구가 설치됐던 곳이다.
    종묘 앞의 일영대 / 앙부일구를 놓았던 대석이다.

     

    그런데 밤이면 해가 없으니 시간을 알 수 없지 않았을까?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은 또 "임금이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 밤낮으로 기상 상태를 알기 위해 천체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해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했는데, 이를 완성해 보고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세종대왕은 밤에도 별을 보고 시각을 측정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라고 명했던 바, 그 결과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시계가 되는 멀티워치 일성정시의가 완성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일성정시의'
    '일성정시의'를 바라보는 관람객 / 서울문화 IN 사진
    복원된 '일성정시의'
    '일성정시의'의 구조와 설명문
    '일성정시의'의 사용법

     

    일성정시의는 세종 당시 총 4개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전해지는 실물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 2021년 6월, 통칭 핏맛골이라 불리는 서울 종로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일성정시의 부품인 세 개의 고리가 출토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상설 시장인 시전행랑(市廛行廊)이 있었던 한양 중심지역이었는데, 발견된 세 개의 고리, 즉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별의 이동을 측정하는 고리) ·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해시계용 고리) ·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 별시계용 고리)은 아래 <세종실록>의 기록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바퀴의 윗면에 세 고리[環]를 놓았는데, 이름을 주천도분환 · 일구백각환 · 성구백각환이라 한다. 그 주천도분환은 밖에 있으면서 움직이고 돌며, 밖에 두 귀[耳]가 있는데 지름은 두 자, 두께는 3분, 넓이는 8분이다. 일구백각환은 가운데에 있어 돌지 아니하고, 지름은 1척 8촌 4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밖의 것과 같다. 성구백각환은 안에 있어 움직이고 돌며, 안에 두 귀가 있는데, 지름은 1척 6촌 8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안팎 고리와 같다. 귀가 있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세 고리의 위에 계형(界衡)이 있으니.... 

     

     

    잘게 잘린 채 포개어진 상태로 발견된 '일성정시의'
    오른쪽 조각이 '일성정시의'다.

     

    발굴팀은 처음에는 이 출토품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발굴팀은 조각들에 눈금이 새겨져 있는 것을 알고 혼천의를 복원한 이용삼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명예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 명예교수는 그것이 세종 때 제작된 일성정시의라는 것을 확인한 후 실물을 직접 본 데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명예교수는 "일성정시의는 매년 동지 자정에 주천도분환을 한 눈금씩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0.25일을 보정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4년에 한 번씩 1일을 추가하지 않고도 윤일 오차를 방지했다. 당시 조선에서 정밀하게 365와 4분의 1도만큼 정밀하게 눈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구다"라며 극찬했는데, 일성정시의를 본 영국의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 교수 역시 "서양에도 없는 과학기구"라며 놀라 마지않았다는 후문이다.

     

    발견 당시의 '일성정시의' 주천도분환 눈금
    수습돼 맞춰진 조각들
    청주 초정행궁 앞에 재현된 '일성정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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