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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계탑에 얽힌 굴곡진 기억과 역사 - 사바틴이 만든 경복궁 시계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5. 25. 22:56

     

    지금은 잊힌 거리 풍경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리에서 행인이 다른 행인에게 시간을 물어보는 일이고, 둘째는 자동차를 탄 사람이 차를 세우고 길가의 사람에게 자신이 찾고자 하는 장소를 묻는 일이다. 이 두 가지는 시계와 내비게이션의 보급으로 사라지게 되었는데,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함께 사라진 풍경 중의 하나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내 어릴 때만 해도 시계는 제법 귀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가진 자와 안 가진 자로 나뉠 수밖에 없었으니, 안 가진 자가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시계를 찬 사람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계를 찬 사람에게는 무슨 사회적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했을까,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시간을 물었을 때 불친절한 답변을 들은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민족에게는 나눔의 DNA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정에서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1시간마다 알려주는 라듸오 시보와 괘종시계, 혹은 탁상시계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 내 방 책상 위에 있던 자명종 시계를 가져갔다. 요즘도 복고풍으로 많이 생산되는 아래와 같은 시계로, 양쪽 종을 세게 때려주는 기계 장치 덕에 알람 효과는 요즘의 그 어떤 디지털시계, 혹은 전자시계보다 효과적인 문명의 이기였다. 

     

     

    oldies but goodies desk watch

     

    지금 기억나는 것은 처음으로 도둑을 맞은 집안의 반응으로, 어머니는 "아이고, 가져갈 게 없으니 그거 하나만 가져간 모양이네. 혹, 도둑이 우리집이 그렇다는 거 소문내면 어쩌지?"라며 엉뚱한 걱정을 했고, 아버지는 "그래도 괘중시계는 놔두고 가 다행이지 뭐냐"하며 오히려 도둑에게 고마워했다. 언급된 괘중시계는 때가 되면 나비모양의 도구로 힘겹게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큰 벽시계였는데, 크기가 크기도 했지만 워낙에 오래돼, 가져가라고 포장을 해줘도 아니 가져갔을지 모를 물건이었다. 

     

    어릴 적에도 박물관에 기증할만한 시계라고 여겼던 그 괘중시계는 이민을 가기 위해 집안 물건을 처분할 때 사라졌다. 당시는 남미 이민 붐에 이어 미국 이민 러시가 일어난 때라 우리 집도 들썩였던 것 같다. 동창이자 동네 친구였던 강일서도 그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우리 집은 희망자 여러 명의 돈을 거머쥔 한인 미국변호사가 (진짜 변호사인지 브로커인지 지금도 불분명한) 잠적하는 바람에 다 쌌던 짐을 풀러야 했다. 

     

    우리나라에 기계식 시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가져 온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유럽에서 건너온 회중시계 같은 것을 가져왔을 것이다. 공공재적 성격의 시계탑은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전각 앞에 설치했던 시계탑으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1888년에 착공하여 1892년 무렵에 완공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사진 1장만 남아 있다. (☞ '대한제국 황제폐하의 건축가' 사바틴과 그의 건축물)

     

     

    경복궁 시계탑 / 요즘 말하는 앤틱풍으로 의외로 세련됐다.
    체코 여행가 스탄코 브라즈의 사진에 담긴 집옥재 / 1901년
    스탄코 브라즈가 신무문에서 경복궁 안을 찍은 사진 / 왼쪽 끝에 시계탑이 보인다.

     

    '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는 뜻을 지닌 집옥재는 경복궁 북쪽 담장 신무문 부근의 전각으로 고종의 서재로 쓰이던 곳이다. 집옥재는 좌우로 팔우정(八隅亭)과 협길당(協吉堂)을 거느렸고, 그 앞으로는 보현당(普賢堂), 가회정(嘉會亭) 및 이를 둘러싼 담장과 행각이 있었다. 사바틴이 설계한 시계탑은 그 행각 안에 세워졌는데, 1895년 10월 8일 아침, 바로 옆 건천궁에서 명성황후의 시해를 직접 목도한 사바틴이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탑 안의 시간를 확인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이후 일제강점기, 일대의 전각과 행각이 모두 회철되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이곳은 1979년 전두환 신군부가 12.12 반란 모의를 벌였던 굴곡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바로 이곳에 청와대 경비 임무를 지닌 30경비단 건물이 있었고, 전두환 일당은 장세동 대령이 단장으로 있던 이곳 30경비단에 모여 쿠데타를 모의했다. 당시 반란을 막고자 고군분투했던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처럼 포를 쏴 반란군을 제압할 생각도 했었는데, 실제로 실행되었다면 필시 집옥재는 박살났겠지만 신군부의 반란은 보기좋게 분쇄되었을 터이다.  

     

     

    을미사변의 현장 건천궁 옥호루
    중국풍으로 지어진 집옥재
    북궐도형에서의 시계탑 위치 / 빨간 점이 시계탑, 파란 칠한 곳이 집옥재, 노란 칠한 곳이 건천궁이다.
    30경비단 부대 건물과 충정훈련 모습 / 충정훈련은 시위 진압 훈련이나 30경비단이 직접 시위 진압에 나선 적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계탑은 서울시 연건동, 지금은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쓰이는 옛 대한의원 첨탑에 설치된 것이다. '대한의원 시계탑'은 1908년 건물의 준공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1981년 전자식 시계로 대체되었다가 2014년 본래의 기계식으로 복원되었는데,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기계식 탑시계로 알려져 있다. 대한의원은 1907년 3월 착공되어 1908년 11월 준공되었으며,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되었다가 1928년 경성제국대학 부속의원을 거쳐 광복 이후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되었다.

     

    그밖에 신촌로타리 시계탑과 청량리역 시계탑 등도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한 유물로서, 최루탄 포화 속에 아득하던 신촌로터리 시계탑은 진즉에 사라졌지만, 약속 장소의 대명사로서 MT의 설렘을 안고 모이던 청량리역 시계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과거 이곳을 종종 약속장소로 삼은 기억이, 아가씨·아주머니의 맹렬한 호객 행위에 이리저리 피해가며 친구를 기다리던 기억과 함께 떠오른다. 그네들의 일터였던 청량리 588은 끈질기게 존속하다 2018년경 사라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라는 긴 이름의 고층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섰다.   

     

     

    서울대학교 의료박물관으로 쓰이는 대한의원 건물
    1969년 6월 4일 신촌로터리 시계탑 준공 당시 모습

     

    아래 인천광역시 중구 해안동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앞의 시계탑은 언뜻 경복궁 시계탑에 앞서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시계탑으로 여겨진다. 물론 착각이니 이 시계탑이 설치된 때는 최근인 2010년이다. 그와 같은 착각을 불러오는 것은 인천이라는 도시 자체가 근대 1호의 건축물이나 유물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도 하지만, 바로 뒤 구(舊)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에 편승한 바 크다. 이 건물이 서 있는 장소는 과거  항구로부터 일본조계지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앞의 '인천 개항의 기억' 시계탑

     

    1883년 제물포의 개항과 함께 그해 4월 우편기선 미쓰비시회사(郵便汽船 三菱會社)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가 위 장소에 세워졌다. 이후 이곳은 미쓰비시 공동운수회사와 합병되어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가 되었고, 1886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출장소는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이 건물은 광복 후에도 계속 해운회사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인천문화재단 산하의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이 되었는데, 리모델링 과정에서 1888년 건립이 기록된 상량목이 발견됨으로써 현재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 중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개전에 앞서 인천항에 상륙하는 일본군 / 왼쪽 노란 색 테두리 안이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옛 일본조계지였던 인천 해안동 매립지에 위치한 개화기의 여러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전시·창작·예술작업 공간으로 활용되는 장소의 총칭이다. 시계탑 뒤 건물은 인천아트플랫폼의 기획 · 관리을 맡는 본부 사무실로, 화강석으로 처리된 상·하인방, 천장의 석고몰딩, 현관 포치 상부의 페디먼트 장식 등에서 당시의 건축양식을 옅볼 수 있다. '인천-개항의 기억'이란 이름의 시계탑은 인천아트플랫폼에 소속된 한 예술가가 세운 것으로, 시계 숫자판 안에는 인천 개항일 등을 알리는 숫자가 숨어 있으며, 아래의 전광판에서는 개항 이후의 인천의 굴곡진 역사가 영상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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