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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폐하의 건축가' 사바틴과 그의 건축물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2. 8. 19. 06:40
구한말 이 땅에는 호기심의 눈을 두리번거리는 많은 서양인이 다녀갔다. 그 가운데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3명의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서슴없이 묄렌도르프와 호머 헐버트와 사바틴을 들 것이다. 그들은 국적도 직업도 다르고 방문 목적도 각각이다. (묄렌도르프와 헐버트는 이미 소개했다)
그중 사바틴은 정말로 우연한 기회에 오게 됐다. 상하이에서 듣게 된 조선 해관원(세관원)을 모집하다는 소문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건축가로서 화려한 시기를 보냈고, 을미사변 때는 무장해제된 조선 시위대 부대장으로서 무력하게 명성황후 시해를 지켜봐야 했다. 그는 그렇듯 뜻하지 않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서 구한말 격랑의 한가운데 섰다.
그의 인생은 자못 파란만장하니 23살에 조선에 오기 전까지 만을 짧게 피력해도 그렇다.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은 1860년 1월 1일 우크라이나 풀바타 주(州) 루브니 시(市)에서 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요즘 뉴스에서 많이 듣는 격전지 하르키우와 인접한 도시다. 사바틴은 어릴 적 아버지가 재혼하는 바람에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계모는 그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이에 그는 14살이 되던 1874년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샹트 페테르부르크로 가 삼촌에게 의탁했다.
예술 계통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왕립예술아카데미에 진학했으나 다른 학생들과 달리 기본 교육이 없었던 까닭에 따라라기가 벅찼다. 말하자면 예체능 과외 없이 예대에 진학한 모양새였다. 학비 외의 부대비용도 많이 소요됐다. 이에 그는 예술아카데미 1학년을 마친 후 건축학교로 적을 옮겨봤지만 기대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학비의 송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 뛰어들었으나 졸업장이 없는 까닭에 막노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곳이 아니라 생각한 그는 건축 현장을 나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러시아 해군 양성소에 입대했다. 그후 항해사가 되어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로 임관하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한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무연한 만을 채우고 나와 러시아 개인 상선을 탔고, 이후 여러 나라를 떠돌던 중 상하이에서 조선 해관원(세관원)을 모집하는 묄렌도르프 일행과 운명적인 조우를 했다. 23살의 우크라이나 청년은 그렇게 조선에 오게 되었다. 1883년 9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사바틴은 조선에 와서는 인천 해관 건축물을 설계하고 공사에 참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우선 그들이 일할 해관을 지어야 했던 것인데 바로 여기서 그의 숨은 실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본업인 해관 승선세관감시원으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해관 건축물 설계 및 제물포항 부두 축조공사에 관여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닥친 제물포항 개발공사에 뛰어들게 되었다. 우연찮은 또 다른 인생유전으로, 그는 여기서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그의 졸업여부를 문제 삼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제물포는 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한 항구로, 각국조계장정 체결(1884)에 따라 국제항으로서 급격히 변모하고 있었다. 사바틴은 그 중심에 서서 인천항을 설계해 갔다. 그는 1888년 조선에 온 프랑스의 여행가 샤를 루이 바라가 말한 "경탄할 광경에 넋을 잃을 정도로 내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경관의 항구"(<조선종단기>)에 스카이라인을 그려나갔다. 아래는 그가 설계했거나 건축에 참여한 인천의 주요 건축물들이다.
이어 그는 자신의 재주를 수도 한성으로 넓혀갔다. 당시의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가 1890년 본국 인사경리국으로 보낸 아래 문서의 내용은 사바틴이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입증하였음을 보여주는 증명서 같은 것이다.
"이 청년은 한성에 있는 조선 왕궁에 조선의 왕을 위해 아름다운 2층짜리 건물을 지은 인물로 원래 직업이 건축가는 아니지만, 주로 독학을 통해 건축술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한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베베르가 말한 "조선 왕궁에 조선의 왕을 위해 지은 아름다운 2층짜리 건물"은 경운궁(덕수궁) 내에 세워진 구성헌(九成軒)을 말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구성헌은 조선 왕궁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이었다) 이어 그는 경운궁 내에 정관헌ㆍ중명전ㆍ돈덕전 건물을 설계하거나 건축했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는 경복궁 건천궁 내에는 관문각이라는 3층 건물을 지었다. 사바틴은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원칙주의자 건축가로서, 국내 기록에는 '살파정'(薩巴丁), 혹은 '살파진'(薩巴珍)이라는 표기로 등장한다.
그는 1890년 완공된 러시아 공사관의 건축(1885~1890)에도 관여했다. 러시아 공사관은 국내 외국 공사관 건물 중 가장 큰 규모로서, 최초 설계안은 러시아 건축가 류바노프가 설계하였으며, 일본인 하도급자인 치오고가 견적과 도면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예산상의 이유로 최초 설계안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사바틴이 예산과 설계를 수정하여 공사를 완료하였다. 사실 이는 무명의 사바틴에게는 황감한 대역사였으니, 앞에서 말한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전폭적 신뢰와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사바틴은 1902년 10월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Marie Antoinette Sontag)의 손탁호텔도 건립했다. 앞서 '손탁 호텔과 정동구락부'에서 말한 바대로 미스 손탁은 러시아공사(대리공사 겸 총영사)를 맡았던 베베르의 인척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호텔 건립도 의뢰받았을 것이다. 그는 이에 앞선 1896년 독립협회로부터 독립문의 설계를 의뢰받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개선문을 본뜬 설계를 그렸는데, 공사감독을 맡은 조선인 목수 심의석이 중국인 조적공들을 고용해 이듬해 11월 20일 완공시켰다.
사바틴은 독립문을 설계한 후 다시 인천으로 가 영국인 사업가 홈링거가 세운 무역회사 홈링거 양행 사옥을 건립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만국공원 조성 사업에 관여하고, 인천 거주 외국인 사교클럽인 제물포구락부 건물을 완공시키는 등,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역사에 남을 근대건축물들을 건립한다.
스스로를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건축가'라 칭했던 자부심 강한 그의 마지막 작업은 영국인 존 레시널드 하딩이 설계하고 영국 메이플사가 시공한 덕수궁 석조전 건립에 조선인 목수 심의석과 함께 참여한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러일전쟁 후 조선을 떠나며 석조전의 완공을 보지 못했고, 고종황제 역시 입주하지 못했으니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는 황가(皇家)는 물론 나라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이와 같이 근대조선에 큰 족적을 남긴 사바틴은 러일전쟁(1904~5년)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며 조선을 완전히 떠나게 되는데, 1895년 을미사변(일제의 조선 왕비 살해사건)의 목격자로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러시아측 보고서인 <베베르 보고서>에 따로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한국을 떠나 후 만주 선양에서 대규모 주택개발업을 벌였으나 큰 실패를 맛보았다. 이후 선양에 가족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성 외유를 떠났다가 1921년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우랄 산맥, 혹은 돈 강 일대에서 객사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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