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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 호텔과 정동구락부(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9. 30. 23:52
서울 정동은 구한말 개화기 때의 풍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개인적으로는 그곳의 이도 저도 아닌(과거도 아니고 현대도 아닌)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래 지도에서처럼 덕수궁 옆 돌담길로 접어들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오고 조금 더 걸으며 옛 이화학당 터, 손탁호텔 터, 옛 미국공사관 자리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경향신문 자료인데 그래서인지 경향신문사도 표시돼 있고 그 옆에 옛 러시아공사관과 미국대사관도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니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된 경운궁의 부속건물인 중명전도 볼 수 있고,(미국대사관저와는 담 하나 사이로 고종이 그곳으로 도망갔다가 쫓겨난 적도 있다) 붙박이 영국대사관, 외톨이가 된 경운궁 양이재(養怡齋), 뷰티풀한 대한성공회회관, 구세군 중앙회관, 대한민국 연극의 산실 정동극장 · 세실극장 건물과 주변의 에조틱한 분위기도 눈을 즐겁게 한다.
아울러, 결국은 도망간 고종이 1년 동안이나 머문 아관(俄館, 러시아공사관)까지의 파천(播遷)길이 '고종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돼 한말(韓末)의 고단한 황제의 역정(歷程)을 직접 밟아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위의 지도에서 그것들이 배제된 것은 아마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속의 정동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유진 초이가 근무하던 미 공사관은 애기씨가 다니던 학당과 5분 거리였다"는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다.
그 '미스터 선샤인' 속 글로리호텔의 모델이 된 손탁호텔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고 그저 표석 하나만이 덩그러니 서 있지만 분위기 있던 글로리호텔 마담 쿠도히나의 이미지는 아직도 기억 속에 삼삼하다. 드라마에서는 친일파 이완익의 딸로 나오나 실제로는 뼈 속까지 애국자인 여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모델이 된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Marie Antoinette Sontag, 1854-1922)은 어땠을까? 그녀도 대한제국을 사랑한 애국자였을까?
이름이나 고향으로 보면 그랬을 개연성이 있다. 그녀는 1854년 프랑스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는 그리 생소하지 않은 곳이니 예전 교과서에 실렸던 알퐁소 도데의 애국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지방이다. 소설에서처럼 독일과 프랑스 남부 국경인 알자스-로렌은 본래 프랑스 땅이었지만 1870년 보불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합병된다. 이에 따라 손탁의 국적도 독일로 바뀌나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반환되었을 때 손탁도 프랑스 국적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름에도 역사의 흔적이 여실하니 본명은 안토아네트 존타크(Zontag)이고 <대한매일신보>에도 "덕국(德國,독일) 여인 손택(孫澤)양"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손탁·Sontag으로 불려졌고 자신도 그쪽을 선호해 '손탁'이라는 한국 이름을 썼다. 드라마와 다른 것은 글로리호텔은 쿠도히나가 죽은 남편의 재산으로 장만한 것이지만 손탁호텔은 대한제국시절 고종이 그녀에게 하사한 땅에 지어진 것으로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손탁은 1885년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독일 국적의 손탁이 러시아공사와 동행한 것은 베베르의 처남이 손탁의 제부였기 때문이었다.(윤치호 일기에서는 "미스 손택’은 베베르 처남의 처형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손탁은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관심이 지대했던 명성황후의 배려로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국인 빈객을 접대하는 궁내부 황실전례관(Hofzeremonienmeisterin)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후 손탁은 황제 부부의 실질적인 서양요리사 역할을 하였는데, (1896∼1909년) 고종에게 커피 맛을 알게 해준 -그래서 커피 중독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손탁은 입국 후 베베르 공사 부인과 함께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다가 다시 '공사관 맞은편 가옥', 이어 고종이 하사한 정동 1번지 1호 저택(대지 78평)으로 옮겼다.(베베르가 멕시코 공사로 전임된 까닭에) 고종은 아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후 아관파천 당시 많은 편리를 봐준 손탁에게 그 공로를 치하하여 정동 16번지 저택을 다시 하사했다.(1898년 3월 16일/'러시아공관 좌변양관 하사증서')
그곳은 본래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트(Daniel Lyman Gifford)가 살던 곳으로 방 다섯개의 양관(洋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898년부터 1902년까지 손탁은 이 집을 '손탁빈관(孫澤賓館)'이름의 사저 겸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했다.(1902년 4월 9일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의 편지에는 "손탁의 집에 묶으며 일품요리를 맛보았고, 벨기에 영사와 프랑스 공사 비서도 거기서 만나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식사했다"는 내용이 있다/손탁빈관 자리는 지금 캐나다 대사관 부지임)
손탁의 게스트 하우스는 서양 외교관들 및 이른바 정동구락부 멤버들(주로 친미·친러파 정치인)의 회합 장소로 애용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의 왕래가 늘자 손탁은 고종이 하사한 또 다른 땅인 정동 29번지(대지 1,184평)에 내탕금(內帑金, 왕실 사유재산)으로 25개의 객실을 갖춘 2층 양관의 '한성빈관(漢城賓館)'을 신축했다.(고종은 손탁에게 모두 세 차례 부동산을 하사했다) 설계는 제물포구락부, 러시아공사관, 경복궁 관문각을 건축한 러시아인 사바틴이 맡았으며 1902년 10월 완공됐다.
신축된 한성빈관은 요즘으로 치자면 5성급 호텔이었다. 아울러 그것이 내탕금으로 건립되었으니 조선정부의 영빈관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경영주와 소유주는 엄연히 손탁이었다. 하지만 손탁이 이곳이 고종이 하사한 땅과 돈으로 지어졌음을 망각하지 않았으니 호텔 2층 전체를 국빈 전용 객실로 사용했고, 아래층에는 일반 외국인 객실 ,주방, 식당, 커피숍을 두었다. 그리고 명칭도 한성빈관, 즉 'Seoul Guest house'를 고집했다. 다만 사람들은 편의상 '손탁호텔'이라 불렀는데 1909년부터는 그것이 정식 이름이 되었다.
(손탁호텔이 서울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당시 서울에는 호텔이 꽤 있었으니 정동의 서울호텔, 경우궁 대안문 앞의 팔레 호텔, 서대문정거장 앞의 스테이션 호텔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손탁호텔은 최고급 호텔의 성가를 잃지 않았으니 훗날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과 마크 트웨인,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도 이곳에 묶었다.(윈스턴 처칠과 잭 런던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한 종군기자로,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을사조약을 압박하기 위해 왔다)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한 1909년, 손탁 역시 궁내부 황실전례관 직책에서 물러나고, 호텔도 팰리스 호텔의 주인인 보에르(J. Boher)에게 매각한다. 그리고 그해 8월 29 독일 총영사가 열어준 송별 파티를 마지막으로 정든 호텔과 24년간 몸담았던 코리아를 떠나게 되는데, 당시 양자로 삼았던 한국소년 한 명을 데리고 9월 5일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녀가 귀국 인사차 황실을 방문했을 때 궁내부에서는 전별금을 주었고, 순종은 은잔을 하사했다.(대한매일신보 8월 31일 기사)
그녀가 돌아간 후 손탁호텔은 경영이 나빠져 보에르는 1917년 호텔을 이화학당에 매각했다. 이화학당은 그것을 기숙사로 사용하다 1922년 교장의 이름을 딴 교사(校舍) '프레이 홀'(Frey Hall)을 신축했으나 이후 전쟁과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2004년에 건립한 '이화 100주년 기념관'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 건물 주자창 앞에 손탁호텔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손탁은 프랑스 칸에 살다 1922년 7월 7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칸 시립천주교 묘지에 '조선황실 서양전례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라는 이름으로 묻혔다. 오래 전, 그녀가 귀국할 때 데리고 간 한국소년의 후예가 핏줄을 찾겠다고 한국을 방문해 이태원에 묶고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후 별다른 소식이 이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필시 소득없이 돌아간 듯싶다. 그녀의 사후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엠마 크뢰벨 저/독일 레겐스부르크대 김영자 번역)라는 책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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