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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손탁은 러시아 스파이였을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5. 14. 03:14
앞서 1편을 쓴 후 오랫만에 후속기(記)를 올린다. 이번에는 '미스 손탁은 러시아의 스파이였을까?'라는 제목을 달아보았다. 어쩌면 그것은 1편 '손탁 호텔과 정동구락부(I)'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정동 구락부'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기 전, 우선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러시아와 일본과의 치열한 외교 공방전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놀랍게도 조선을 자국의 보호 아래에 두려는 (아직은 점령이 아니다) 러시아와 일본과의 각축전은 조선의 개항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러시아와 일본이 맞붙은 1904년까지의 30년 동안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니 더욱 놀랍기만 하다)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 양국이 수호조약을 교섭 중일 때 러시아주재 일본공사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는 이미 미래를 예측했는지 향후 조선에 주재할 일본공사로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강력히 천거했다. 하나부사 정도는 되어야 향후의 조선에서 러시아에 맞설 수 있다고 여긴 것이었다.
하나부사는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수학한 해외유학파로 국제감각이 있는 자였다. 그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에노모토와 자주 향후의 극동 문제를 논했는데 당시의 ‘조선정책론’이 점수를 딴 듯하였다. 이에 하나부사는 1876년 수교한 조선의 첫 주한일본공사로 부임하였고 1877년부터 3년 동안 서해안 답사와 측량작업을 하였다.
그는 그 결과로써 인천만(灣) 제물포(지금의 중앙동, 항동 일대의 포구)를 개항장으로 요구하였다. 그리고 김홍집 내각과의 끈질긴 밀땅 끝에 결국 제물포 개항을 관철시켰다. 제물포의 개항은 향후 수도 서울의 점령을 위한 교두보를 놓은 것과 마찬가지 일이었으니 그는 일본 외교관으로서 120%의 성과를 달성한 셈이었다. (☞ '제물포 화도진과 장도포대')
하지만 향후 조선에 영향력을 끼친 나라는 일본도 아닌 청나라였다. 개화기 조선에서 신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임오군란과, 구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갑신정변의 양난(兩難)에 조선의 국왕 고종은 전통적 상국(上國)인 청나라의 군사를 불려 들여 사태를 진압했고, 이후 양국의 관계는 과거의 형식적 속국에서 실질적 속국 관계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과, 감국대신(鑑國大臣) 원세개가 얼마나 개짓을 했는가를 앞서 1, 2, 3편을 통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누리던 원세개는 그 권력에 취했는지 일본의 공격에는 전혀 대비가 없어서 1895년 청일전쟁의 발발하자 황망히 청나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이제 일본의 세상이 된 듯 보였으나 그 기쁨은 아주 잠깐,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삼국간섭(三國干涉)이라는 원치 않은 선물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잘 알려진 대로 삼국간섭은 극동에서의 패권과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하하던 제국주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해 일본이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거둔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주도록 압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프랑스와 독일이 가세해 러시아의 편을 듦으로써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했는데 이 장난의 배후에 베베르(Karl Ivanovich Wauml;ber, 1841~1910)가 있었다.
베베르는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관 서기를 거쳐 천진(톈진) 주재 영사로 있던 중, 1884년(고종 21) 7월 조선의 외무차관 묄렌도르프가 중재한 한·러수교조약에 러시아 전권대신으로서 사인을 한 자였다. 그는 이듬해 주한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부인과 함께 부임했는데, 그들 부부는 전에 보지 못했던 깍뜻하고 깔끔한 예의범절로 고종과 민왕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간 무례함의 극치를 보여주던 원세개 같은 놈을 상대하다가 이같이 품격 있는 외교관을 만났으니 금방 마음이 빼앗길 법도 했다.
그리고 베베르는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이라는 자신의 친척 여자를 고종에게 소개시켰다. 손탁은 베베르가 조선에 부임할 때 함께 온 여자로서, 그녀가 베베르가 동행한 것은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이라는 조금은 멀게 보이는 친척(윤치호 일기)이기 때문이었지만 그 관계가 모호해보였다. 그밖에는 그녀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없었으니 고향이 과거 프랑스 영토였던 알사스-로렌 지방 출신의 독일계 여자라는 것과 서른 살 먹은 과부라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보통이 아니었으니, 생긴 것은 그저 그랬어도 타고난 친화력으로 금새 고종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탁은 베베르 부인과 더불어 민왕후를 배알할 때 진주분의 남용으로 피부가 상한 것을 보고 서양 화장품을 선물하였고 그 효과를 본 민왕후가 이후로 그녀를 매우 예뻐했다고 하는데,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말이다.
손탁은 이렇듯 센스가 있었다. 게다가 알사스-로렌 지방 출신답게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기본으로 구사하였고, (러시아어는 당연히 했으며) 영어도 유창함은 물론 금방 한국말까지 익혀 무려 5개 국어에 능하였던 바, 민왕후는 일정한 직업이 없던 손탁에게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국인 빈객을 접대하는 역할의 외국인 접대계 촉탁으로 일하게끔 배려했다.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로는 궁내부 황실전례관(Hofzeremonienmeisterin)으로 승격되었고, 그에 앞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거했을 때는양식 요리를 전담하여 대접했다. 또 그에 앞서 아관파천 자체에 그녀가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개연성 또한 충분했는데, 아무튼 손탁은 아관(러시아공사관)에서 이것저것 고종의 수발을 들어줬고, 이에 고종은 아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후 그간 공로를 치하하여 정동 16번지 저택을 하사하였다. (1898년 3월 16일의 일로, 대지 78평의 정동 1번지 1호 저택에 이어 두번 째로 하사한 저택이다)
그곳은 본래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기포트가 살던 곳으로 방 다섯개의 양관(洋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898년부터 1902년까지 손탁은 이 집을 '손탁빈관(孫澤賓館)'이름의 사저 겸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했다. 그리고 손탁은 이 집의 응접실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사교장소로서 개방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은 곧 정동구락부의 산실이 되었으니 단골로 드나든 사람들로는 미국공사 실(Sill), 프랑스공사 플랑시, 미군 군사교관 다이,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민영환, 이상재, 윤치호, 이완용 등으로 주로 친미·친러(親露)계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교모임 이상의 발전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손탁은 정동구락부의 마담 노릇을 하기도 하였으며, 1주일에 한 번씩 정동 러시아공사관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내외를 초대해 파티를 베풀고 무도회를 주최했다. 그녀의 음식 솜씨는 매우 훌륭하였던 듯, 1902년 4월 9일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의 편지에는 "손탁의 집에 묶으며 일품요리를 맛보았고, 벨기에 영사와 프랑스 공사 비서도 거기서 만나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식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녀는 한말의 외교계를 주름잡은 풍운의 여걸, 서울 외교가의 꽃, 정치적 마돈나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무대가 좁을 수밖에 없을 터, 손탁은 고종이 하사한 또 다른 땅인 정동 29번지(대지 1,184평)에 내탕금(內帑金, 왕실 사유재산)으로 25개의 객실을 갖춘 400평 규모의 2층 양관 '한성빈관(漢城賓館)'을 신축했다.(고종은 손탁에게 모두 세 차례 부동산을 하사했다) 설계는 제물포구락부, 러시아공사관, 경복궁 관문각을 건축한 러시아인 사바틴이 맡았으며 1902년 10월 완공됐다.
신축된 한성빈관은 요즘으로 치자면 5성급 호텔이었다. 아울러 그것이 내탕금으로 건립되었으니 조선정부의 영빈관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경영주와 소유주는 엄연히 손탁이었다. 하지만 손탁이 이곳이 고종이 하사한 땅과 돈으로 지어졌음을 망각하지 않았으니 호텔 2층 전체를 국빈 전용 객실로 사용했고, 아래층에는 일반 외국인 객실 ,주방, 식당, 커피숍을 두었다. 그리고 명칭도 한성빈관, 즉 'Seoul Guest house'를 고집했다. 다만 사람들은 편의상 '손탁호텔'이라 불렀는데 1909년부터는 그것이 정식 이름이 되었다.
그녀가 손탁빈관과 손탁호텔을 무대로 러시아 스파이 노릇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고 싶지 않아도 러시아에서 그녀를 가만 두지 않았을 터, 일본인 코마츠 미도리(小松綠)는 <메이지약사 외교비사>라는 책에서 손탁에 대해 "용모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나 재주가 있어 시종 궁중에 출입하며 왕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국왕에게도 안내 없이 근접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왕실과 외국인 간의 연락은 물론, 비자금의 전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썼고,
민왕후 시해사건에도 가담했던 일본인 간첩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는 <조선잡기>라는 책에서 "러시아의 외교 전략은 먼저 손탁에 의해 첫 걸음을 띄고 움직였다"고 기술하였던 바, 그녀가 러시아의 정책에 따라 움직이는 스파이임을 기정사살화했다. 하지만 손탁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다 고종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한 1909년,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호텔을 팔고 이한(離韓)하였다.
그녀의 후임으로 황실전례관을 지냈던 엠마 크뢰벨은 자신의 책 <나는 어떻게 조선에 오게 되었나>에서 손탁을 '무관의 여황제'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이권을 얻으려는 외국인들은 모두 손탁과 접촉했고, 그녀의 개입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였던 바, 반드시 러시아의 스파이는 아닐지리도 구한말 대한제국의 막후에서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권을 주물렀던 통 큰 여자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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