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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한갑족 가문 한확의 낯뜨거운 출세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6. 4. 23:49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인적으로 본 유택(幽宅)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월산대군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앞서 '연산군이 큰엄마 월산대군부인을 범했다는 썰은 사실일까?'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조선 7대왕 세조의 장손으로 왕위 1순위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부인)와 권신(權臣) 한명회의 야료로 인해 왕위를 동생 잘산군(9대왕 성종)에게 빼앗기고 평생을 고독 속에서 살다 숨진 비운의 인물이다.

     

     

    월산대군의 묘 / 병풍석만 없을 뿐 봉분의 크기는 왕의 그것에 버금간다.
    월산대군 신도비/ 호사가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비라고 말하는 월산대군의 신도비이다. 임사홍이 상형문자로 쓴 두전(頭篆)이 빛난다.

     

    그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견달산 기슭에 마련된 월산대군 유택의 규모는 왕의 그것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그에 못지 않은 무덤을 하나 보게  되었다.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한확(韓確, 1400~1456)의 무덤이다. 앞서 '남양주 겨울기행 - 여유당과 수종사 & 다산 정약용' 이하 여러 글에서 언급했듯 남양주 능내리는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과 묘소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여러 번 가게 되었고, 그러면서 한확의 묘소도 지나간 적이 있었지만 굳이 가보지는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실학박물관 가는 길에 비로소 올라가 가까이 보게 되었는데, 우~ 깜놀!  왕족도 아닌 일개 신하의 무덤이 이렇게 클 수가....? 정말이지 왕이나 왕족에 버금갔다. 능내리(陵內里)라는 마을 이름이 이 무덤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도 비로소 이해가 갔다. 왕릉처럼  큰 무덤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렸다. 

     

     

    왕릉급의 한확 무덤

     

    이유를 실록에서 살펴보기 위해 '한확'을 검색어로 클릭했다. 그러자 맨 처음부터 낯뜨거운 문장이 나온다. 

     

    중국사신 황엄(黃儼)· 해수(海壽)가 한씨(韓氏) · 황씨(黃氏)를 데리고 돌아가는데,  한씨의 오빠 부사정(副司正)  한확(韓確), 황씨의 형부 녹사(錄事)  김덕장(金德章), 시중드는 시녀 각 6인, 환관 지망자 각 2인이 따랐다. 길 옆에서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8월 6일 기축 1번째기사)

     

    중국사신 황엄과 해수가  한씨와 황씨의 두 여인을 데리고 돌아가는데 왜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을까? 이유는 굳이 설명할 것도 없다.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를 요구했던 것처럼 명나라도 조선에 처녀 공출을 요구했다. 그래서 명나라 제5대 선적제까지 약 26년 간 100여 명의 공녀를 갖다 바쳤던 바, "조선 처녀는 조선의 제1수출품"이라고 극언을 한 학자도 있었다. 중국이 조선 처녀를 요구한다고 아무나 바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우선은 반가(班家)의 여식이어야 했고 또한 어느 정도의 미모가 있어야 했다. 물론 뛰어나면 금상첨화였겠는데, 언어 소통도 안 되는 조선 처녀를 도대체 왜 데려갔을까, 그 이유 또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명나라에서 처녀 공출 요구가 오면 반가의 부모들은 딸자식을 숨기고 핑계 만들기에 바빴다. 나이 따지지 않고 일찌감치 시집을 보내기도 했으니 턱없이 이른 조선의 조혼(早婚) 풍습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중국으로 제 딸을 보내지 않으려는 것이 부모의 한결같은 마음일 터였다. 그런데 한확은 부모가 아니라서 그랬을까, 그는 자진해서 제 손위누이를 공녀로 바쳤다. 동생 한씨와 더불어 장안 제일의 미모를 자랑하던 누이 한씨였으니 자격이야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확은 삼한갑족이라 불릴 정도로 명망 있는 양반가문 출신의 관료였다. 그래서 과거도 보지 않고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종7품 부사정에 올랐다. 또한 한확의 가문은 남녀가 모두 인물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한확은 과거 급제자가 아니라는 자신의 약점과 인물이 좋다는 장점을 두루 활용한 자신만의 출세법을 고안해 냈다. 바로 자신의 미인 누이를 공녀로 보내는 것이었다. 제 누이의 미모라면 어쩌면  황제의 후궁도 될 수 있다는 꿈 또한 뒷받침이 됐다. 1417년 명나라 사신이 공녀를 요구하자 한확은 기다렸다는 듯 제 누이를 상납했다. 

     

     

    사간원 터에서 바라본 경복궁 건춘문
    광화문 광장 사헌부 터
    사헌부 터 안내문 / 이후 한확은 탄탄대로를 달리니 한성판윤에 도관찰사, 도절제사, 판서, 찬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른다. 그동안 간통혐의로 사간원의 상소가 있었고 사헌부로부터도 탄핵을 당했으나 왕이 거부권을 행사해 무탈하게 넘어갔다.

     

    누이 한씨로는 어이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한확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으니, 단박에 명나라 주체(朱棣,영락제의 이름)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후궁인 여비(麗妃)에 책봉되었다. 그녀를 명나라까지 호송해 온 한확에게도 정5품 봉의대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명나라 작위가 내려졌다. 까닭에 조선에 돌아왔을 때는 임금인 태종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있었다. 누이 한씨도 잘 풀려서, 처·첩 간의 싸움인 '어여의 난'(魚呂之亂)을 무사히 극복하였고 그 과정에서 명나라 황후가 죽어 한씨는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로써 황후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1424년 주체가 북원(北元) 원정길에 사망하자 당시 풍습에 따라 여비도 순장을 당하며 저승길로 떠났다. 그때 나이 겨우 24살이었다. 죽을 때의 일화는 더욱 슬프다. 여비는 살해당하기 전, 자신의 모친을 향한 피 울음의 유언을 남겼는데 "어머니, 어머니,  불초자식 먼저 갑니다. 부디...."하고 울부짖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집행관이 뒤에서 끈으로 목을 졸라 유언도 채 맺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비극은 이어졌다. 영락제가 죽고 장남 주고치가 제위에 올라 제4대 황제 홍희제가 되었으나 1년 만에 죽었다. 이어 주치의 손자 주첨기가 제5대 황제 선덕제가 되었는데, 이때 또다시 공녀를 요구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한확의 여동생 한씨를 꼭 짚어 포함시켰다. 조선 출신 환관들이 그녀의 미모를 언니 한씨에 못지않은 경국지색이라 말한 탓이었다. 한확은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 여동생을 상납했다. 어지간하면 기분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 사관(史官)들마저 이번에는 눈꼴사나웠는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종 황제(宣宗皇帝) 때 그 손아래 누이가 또 입시하게 되었다. 손아래 누이는 벌써 시집갈 시기가 지났었고, 한확은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그를 시집보내지 않고 장차 북경(北京)에 데리고 가려하므로, 사람들이 많이 한확을 천하게 여기고 그 손아래 누이를 슬피 여겼는데, 이때에 와서 특별히 자헌 중추원부사(資憲中樞院副使)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세종실록> 69권, 세종 17년 7월 20일 기축 1번째 기사)

     

    한마디로 벼슬에 눈이 멀어 제 누이동생을 팔아먹었다는 소리였다. 한확의 여동생 한씨의 반발도 없을 수 없었으니, "이미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지극하거늘 어찌 이 몸까지 팔아 호사를 누리려 하십니까?"하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간 혼수로써 애지중지해 온 비단을 찢고 패물을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가지 않겠다며 거의 1년을 버텼지만 결국 명나라 떠나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선덕제 주첨기 역시 명이 짧았으니 재위 약 10년 만에 향년 35세로 죽었다.(1435년)  하지만 다행히도 한씨는 죽지 않았다. 주첨기의 아들 주기진(제6대 황제 정통제)이 겨우 9살이었으나 돌보아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씨는 살아남았고, 정통제가 23살 당시 환관 왕진의 꾐에 빠져 몽골족 오이라트부 원정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었을 때 (저 유명한 '토목의 변') 그 동생 경태제가 제위에 오르면서 폐태자 되어버린 정통제의 3살 배기 아들 주견준까지 거두어 보살폈다.

     

    이후 포로에서 풀려난 정통제가 다시 황제에 오르고 경태제는 죽임을 당하는데, 이때 한씨는 주견준을 거두어 돌보아준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주견준 역시 황제에 오르자(제8대 황제 성화제) 자신을 돌아준 공로를 잊지 않고 공신부인에 봉했다. 한씨는 성화 19년(1483, 조선 성종14)까지 천수를 누리며 살다 74세로 죽었다. 그의 생은 언뜻 무난한 듯하지만 실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으니, 정통제의 아들 주견준이 폐태자되어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때 목숨을 걸고 그를 거두어 보살펴준 음덕(陰德)은 다행히도 양지에서 보상받았다.

     

    한확은 당연히 출세가도로 달렸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에서 모두 감투를 받은 거물 외교관으로서 양국에 입김을 행사하였으니, 세종조에는 명나라의 사신으로 가 조선개국 이래로 골칫거리였던 명나라에 대한 막대한 금은 세폐(조선의 금과 은을 조공으로 바치는 일)를 폐지시켰고, 세조 때에는 쿠데타로 집권한 수양대군 정권에 대한 정통성을 윤허받았다. 세조는 이 일에 앞서 한확을 좌의정, 좌익공신 및 서원부원군에 봉하며 자신의 아들 의경세자의 빈(嬪)으로 한확의 막내 딸을 책봉했다. 이 여인이 바로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건 말건, 어찌 됐든 황제의 처남인 한확이었다. 이에 한확과 사돈을 맺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으니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세종도 한확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아들을 손주사위로 맞았으며, 세조는 한확의 딸을 맏며느리로 들였는데, 세조의 경우는 너무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부디 명나라 황제에게 잘 말해 자신의 쿠데타를 무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탄 거야~. 찬탈한 게 아니라 양위를 받은겨~) 

     

     

    드라마 <왕과 비> / 한확의 딸 인수대비 한씨는 성종의 와이프 윤씨를 폐비·사사함으로써 훗날 갑자사화의 피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남양주시 일패동 산 37-1에 있는 세종의 8남 계양군 이증의 처 정선군부인 한씨 묘. 인수대비의 친 언니이다.
    정선군부인 한씨 묘를 찾아가다 만난 나무
    정선군부인 한씨 묘를 찾아가다 만난 또 다른 나무 / 밑동이 완전히 뚫렸다.
    한확의 아들 한치례(韓致禮)는 세종의 딸 정의공주의 차녀와 혼인했다. 사진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63에 있는 정의공주와 남편 양효공 안맹담의 무덤이다.
    근방의 유명한 방학동 은행나무
    근방의 서릉부원군 한치례 묘 / 더코리아뉴스 사진

     

    한확은 세조 2년(1456)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부탁대로)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양위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공을 세우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돌아오는 도중 요양 사하포에서 57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운구된 시신은 권신(權臣) 한명회가 묏자리를 본 능내리 단산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69-5) 야산에 마련되었는데, 세조가 자신의 능으로 쓰려던 곳을 내주었다는 말도 있다.

     

    한확의 무덤은 당대에는 보기 드문 왕릉급 무덤으로 조성되었다. 신도비 역시 왕릉급으로 세워졌으니, 비문은 서천 어세겸(西川 魚世謙)이 짓고 글씨는 임사홍이 송설체(松雪體)로 썼다. “襄節韓公神道碑銘”(양절한공신도비명)이라고 쓴 두전(頭篆)이 압권이다. 

     

    글씨는 마모되어 읽기 어려우나 잘 살펴보면 한확 누나와 여동생의 흔적이 보이는데, 신도비 또한 보기 드문 대리석이다. 명나라 황제가 보내준 돌로 알려져 있다. 러나 1456년 당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그보다 39년이 지난 1495년에 세워졌다. 비문에 의하면 한확의 딸 인수대비가 아버지 묘소에 비가 없는것을 슬퍼하자 1494년 성종이 건립을 명했다고 하는데, 당대 권신의 신도비가 이처럼 늦게 세워진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성종이 훈구파 대신들의 결집을 경계하여 훈구파 원로 한확 신도비 건립을 막았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지만 인수대비의 고집에 결국 신도비를 세우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연산군3년(1497)에 세워진 한확의 부인이자 인수대비의 모친인 남양부부인 홍씨의 신도비도 마찬가지 경우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여성의 신도비를 세우는 법이 없었지만, 인수대비의 위세에 조선 최초의 여성 신도비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명나라 황실 강혜장숙여비와 공신태비의 어머니 묘소라는 배경이 더 크게 작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뉘라셔 명 황제의 장모에 대한 신도비 건립을 반대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양주시 은현면 용암면 산 54-1에 있는 남양부부인 홍씨 무덤 앞의 대리석 신도비는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여성의 것으로 남게 됐다. 그런데 그 거대한 돌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코끼리가 했다고 한다. 홍씨 묘 앞에는 돌을 싣고 왔다 지쳐 죽은 (혹은 굶어 죽은) 코끼리의 묘가 있었다고 하는데, 다음에 근방에 갈 일이 생기면 꼭 찾아보려 한다. 

     

    양절공과 남양부부인 홍씨 신도비는 차마 귀부를 만들어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리되면 정말로 제왕급이다. 조선 왕의 신도비는 세종조까지 귀부와 이수를 갖춰 세워졌고 이후로는 폐지되었다) 3단의 높다란 받침돌 위에 위엄을 갖춰 세워졌다. 과연 세도가의 신도비답다. 살아생전 한확의 비리에 대한 상소가 빗발칠 때, 세종이 "이제 그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 당대의 위세를 보는 듯하다.

     

     

    오마이뉴스 심양시 사하포의 사진을 옮겨보았다.
    양절공(襄節公) 한확 묘/ 양절은 세조가 내린 시호다.
    한확 묘의 두 개의 묘표
    오른쪽 묘표는 훗날 후손들이 추가해 세운 것이다.
    석등에서 바라본 신도비각
    석등에서 바라본 조산
    신도비 (전면)
    신도비 (후면)
    3단의 화강암 기단석
    받침돌에는 복련(覆蓮)과 안상(眼象)을 매우 정교하게 조각했으며 받침돌 밑에 다시 2단의 기단석을 마련했다.
    비문에 따르면 인수대비가 아버지 묘에 신도비가 없음을 슬퍼하자 성종 25년(1494) 건립을 명했고 이듬해 완공됐다.
    무덤의 원경
    지척에 연인들의 성지 옛 능내역이 위치한다.
    가는 길에 폐선로 위에 놓인 객차를 찍어보았다.
    이 사진은 겨울에 찍은 것임.
    능내 마재마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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