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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주 겨울기행 - 여유당과 수종사 & 다산 정약용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2. 11. 21:42

      

    양평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져 한강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 두물머리로 한자로 쓰면 양수리(兩水里)가 된다. 그 두 물이 합쳐지는 지점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양평 수종사로서, 특히 산령각(山靈閣)에서의 조망이 일품이다. 관광홍보자료에 쓰이는 수종사 두물머리 사진은 거의가 수종사 산령각 포토존에서 찍은 것이다.  

     

     

    수종사에서 본 두물머리

     

    그래서 수종사도 따라 아름다울 수밖에 없으니 일찍이 서거정은 이곳을 '동방 사찰 중의 제일 승경'이라고 극찬하며 아래와 같은 시를 짓기도 했다.

      
    가을이라 오만 풍경이 처량해지기 쉬운데
    밤새도록 비까지 와서 물이 못 둑을 쳐 대네
    속세의 연기 먼지는 피할 길이 없건만
    상방의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여라
    흰구름 역력하건만 뉘에게 줄 수 있으랴
    단풍잎은 흩날려 가는 길은 헷갈리겠지
    내가 가서 동원의 담화에 참여하려 하노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가 울지 못하게 하소

    秋來雲物易悽悽

    宿雨連朝水拍堤

    下界煙塵無地避

    上方樓閣與天齊

    白雲歷歷誰堪贈

    黃葉飛飛路欲迷

    我擬往參東院話

    莫敎明月怪禽啼

     

    이덕형 또한 수종사의 풍광을 사랑한 사람 중의 하나로 그가 한겨울과 초여름에 읊었다는 수종사에 관한 시가 수종사 보호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덕형이 읊은 수종사에 관한 두 편의 시
    세조가 하사했다는 수종사 은행나무

     

    다만 그 승경을 보기 위해서는 제법 땀을 내야 하니 조안보건지소 정류장에서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30여 분은 족히 걸어야 하고, 차를 이용하더라도 수종사 주차장에서 십여 분 산길을 올라야 승경에 이를 수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두물머리 풍광은 산령각에서 내려다보아야 제 맛이다. 산령각 앞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널찍한 전망대가 만들어져 조망과 감상에 용이하다. 

     

    `

    왼쪽은 응진전, 오른쪽 위가 산령각이다.

     

    더불어 이곳 다실(茶室) 삼정헌(三鼎軒) 또한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니 이 또한 동방 사찰 중에 있는 다실 중 가장 이름나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고 돈을 받는 곳은 아니어서 누구나 눈앞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자유로이 차를 마실 수 있다) 이는 지난 2000년 주지 동산스님의 보시에 따른 것으로, 삼정헌은 선(禪)·시(詩)·차(茶)가 하나로 통하는 집이라는 의미라 한다.

     

    그리고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다산(茶山)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차를 마시던 즐거움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다고 하나, 사실인지 살짝 의심이 든다. 수종사가 자리한 남양주는 정약용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지금도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는 그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이 있고(1986년 복원) 그의 실제 무덤도 있다. 기념관과 사당도 조성되었다. 그가 했다는 "차를 마시는 나라는 흥하고 술을 마시는 나라는 망한다"는 말은 꽤 유명하다.

     

     

    남양주 다산기념관과 정약용 사당
    정약용 사당 문도사 / 문도(文度)는 그의 시호이다.

     

    아울러 그의 호도 다산이고 보니, 그가 이곳에서 차를 즐겼을 것임이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 다가오지만, 그는 호 다산은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의 만덕산에서 비롯되었다. 만덕산에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인데 지금 그곳에는 그의 유배 처소였던 곳이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이름으로(하지만 이름과 달리 기와집으로) 복원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때 근방 백련사에 머물던 일명 다선(茶仙)으로까지 불리던 차 마니아 초의선사를 만나 차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약용의 유배 역정
    정약용의 강진 귀양길 / 첫 유배처 사의재는 정약용이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주막에 그가 붙인 당호이다.
    사의재(四宜齋) / 사의재는 "네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가 유배를 간 이유는 정치적 이유가 아닌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 살던 그가 수종사가 있는 남양주 고향으로 이사 온 것도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 탄압과 교인 색출을 피해서였다. 훗날 그는 당시의 독실했던 믿음을 버리고 배교를 하였고 그 덕에 참형 대신 유배길에 오르며 목숨을 건지지만, 고향 남양주로 이주해 살던 시절은 아직은 서학(천주교)에 목을 매던 시절이었다. 그런 그가 수종사를 차를 즐겼다니, 신앙 따로 입맛 따로였는지....? 

     

    그 내막을 알 수 있는 답이 정약용의 집 여유당(與猶堂)에 있다. 여유당에서 우리는 흔히 '여유로움'을 떠올리지만 그가 <여유당기>에 피력한 당호의 뜻은 정반대이다. 1800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소나기는 피해 가자는 심정으로 고향인 남양주 마재로 돌아와 칩거했다. 그를 총애했던 국왕 정조는 그가 천주교도임을 알고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정조는 천주교로 나라가 시끄러워지자 금정역(충남 청양의 역원) 찰방(총관리자)으로 보내 소나기를 피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노론 벽파들의 상소와 탄압 열풍이 수그러들자 다시 정약용을 불러들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스스로 지었다는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마재의 고향집에서 달을 바라보던 다산은 야밤에 찾아온 규장각 관리로부터 아래와 같은 정조의 편지를 전달받는다. 1800년 6월 12일 밤이었다. 

     

    "오랫동안 서로 못보았구나.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려 하는데 주자소(인쇄를 담당한 관청)에 새로 벽을 발라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 그믐께쯤 경연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한서선(漢書選, 한나라 역사서인 한서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한 책) 10부를 보내니 5부는 그대의 집에 남겨 간직하고 나머지는 제목을 지어 다시 보내도록 하라."  

     

    정조가 정약용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약용은 감읍하며 왕의 명을 따랐다. 그러면서 재회의 날을 고대하는데, 얼마 후 전혀 뜻밖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6월 28일 밤 갑자기 붕어했다는 소식이었다. 정약용이 얼마나 슬퍼하고 상심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그가 자신의 집에 '여유당·與猶堂'이라는 이름의 당호를 지은 것도 이 즈음이었다.  

     

    당호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겨울철에 시냇물을 건너듯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한다(猶兮若畏四隣)"는 문장에서 빌려왔다. "겨울에 개울을 건너는 것처럼 조심하고 이웃 사람들의 시선을 경계하자"는 계고의 의미를 이곳에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었다. 정조임금이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진 지금, 그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했음이었다.

     

    "겨울에 찬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머뭇거리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경계하라·····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사람은 찬 기운이 뼈에 사무치기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건너지 아니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자는

    엿보고 관찰하는 시선이 몸에 따갑기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에도 하지 않는다."

    <여유당기> 中

     

    * '여유(與猶)는 본래 여(輿)와 유(猶)라는 짐승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둘 다 의심과 겁이 많아 소리만 나면 나무 위에 올라가 숨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외로운 난새(鸞)는 깃털이 연약해 가시밭 험한 길을 견딜 수 없어 한 척 돛단배에 몸을 맡기고 아득히 서울을 하직한다네 / <여유당기>에 적은 또 다른 칩거의 이유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에 새겨진 글)
    여유당의 내외관
    재현된 다산의 방
    여유당 입구의 안내문

     

    하지만 그 의지가 헛되이 주변인의 고변을 당하였으니 1801년 2월 8일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정약용이 속한 신서파(信西派, 남인 시파 무리)를 몰아내기 위한 공서파(攻西派, 노론 벽파와 결탁한 남인 벽파의 무리)의 끈질긴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신서파와는 반대로 공서파는 노론 벽파와 더불어 천주교를 줄곧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탄압해 왔는데, 그들은 이 기회에 정약용을 죽여버리려 최선을 다했다.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는 주장이 그들 공서파의 공통된 부르짖음이었다. 정약용의 영향력을 그만큼 두려워 한 것인데, 그의 천주교 신앙은 참형의 빌미로써 적격이었다. 하지만 정약용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그 또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배교의 증명으로써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해 죽게 만들었다. 그는 국문장에서 매형인 이승훈(최초의 영세자)은 집안을 망친 원수로, 조카사위인 황사영(황사영 백서사건의 주인공)은 죽어도 사교를 버리지 않을 나라의 원수로 진술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전도한 윤지충(진산사건의 주인공) 등도 고발해 죽게 만들었으며, 아예 맨발 벗고 나서 신도들을 잡아들였으니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기록된 정약용 활약과 의지는 다음과 같다. 
     

    "제가 재작년(1799년, 정조 23년) 형조에서 근무할 때에 척사방략(사악한 천주교를 배척할 수 있는 방안)을 지어 임금께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사람들의 비방을 받아 직책에서 교체되었기 때문에 바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사악한 천주학을 하는 사람은 제게는 원수입니다. 지금 만약 제게 10일의 기한을 주시고 영리한 포교(捕校)를 데리고 나가게 해 주신다면 사악한 천주학의 소굴을 급습하여 우두머리를 체포해 바치겠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소굴의 우두머리는 진실로 어떤 놈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들은 대로 말하자면 김백순이란 이름이 파다하게 입에 오르내리고 포천의 홍교만 또한 유명합니다. 제 형(정약전)과는 사돈간이자 홍주만의 동생 되는 자입니다....."

     

    회귀해 말하자면 1784년 4월, 23살의 성균관 유생이던 정약용은 형수의 상을 치르고 사돈인 이벽(최초의 천주교 신자)과 함께 뱃길로 서울로 서울에 가는 길에 두미협(남양주 팔당 부근)을 지나는 배 위에서 제 형 정약전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처음 들었다. 이후 정약전과 더불어 독실한 신자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포교했으나 1802년 봄, 정약용은 철저한 배교의 길을 걸었다. 왜 그랬을까? 그의 굴곡된 길을 따라 다시 걸어보자.  

     

     

    꽁꽁 언 남한강 뱃길 풍경
    남양주 정약용 생가 앞 호수 같은 강물도 얼어붙었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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