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역대 경기도관찰사와 경기도지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2. 5. 09:41

     

    서대문 밖에 있었던 경기감영의 변천에 대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중점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체되어 사라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경기감영에 있던 당우 중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없다. 자리가 비싼 땅인지라 필연적 파괴를 불러온 것이니, 지금 당시의 건물은 물론이요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장소마저 거의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18~19세기 초에 제작된 경기감영도가 전해지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지하철 4호선 서대문역 부근의 경기감영 터 표지판
    경기감영도 / 12폭 병풍 중의 부분

     

    경기감영은 궁궐과 마찬가지로 삼문(三門) 체계로 돼 있는데, 포정문 → 중삼문 → 내삼문을 거쳐 관찰사의 처소인 선화당에 이른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이 같은 경기감영의 구조는 돈화문 → 진선문 → 인정문을 거쳐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는 창덕궁과 같은데,(ㄱ자로 꺾어져 도달한다) 경기관찰사는 그야말로 궁궐에 버금가는 감영에서 경기도 왕(王)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했다. 다른 도(道)와도 격을 달리 했으니 통상 종2품 감사보다 품계가 높은 대신(大臣) 반열에서 선발되어 부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해 뇌물죄로 적발된 관리의 자손, 행실이 옳지 못하거나 재가한 여자의 소생은 오르지 못했다. 경기관찰사의 선발은 의정부와 6조 당상관, 사헌부 대간 등이 추천한 사람 중 3명을 추려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이 이중 1명을 임명했는데, 요즘의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과 같은 법령도 이미 당대에 시행돼 감사 후보 중에 형제나 친척이 도내(道內)의 요직에 있는 경우는 선발에서 제외되었다.

     

    이와 같은 상피(相避)제도는 8도에 두루 적용되었으나 조선 하대에 이르러서는 규정이 흐릿해졌다. 그리하여 삼정의 문란에 즈음해서는 고위공직자 본인, 혹은 친인척들이 연계되는 예가 허다했으나 경기도에서는 특별한 부정이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말하자면 경기도관찰사는 그 명예와 권력에 걸맞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감영이 국왕의 처소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긴장감에서 비롯된  도덕성일 수도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각도의 관찰사는 해당 도의 행정, 군사 등에 관한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 예하의 부윤(시장), 목사, 대도호부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을 거느렸는데, 특히 경기도관찰사는 (조선 후대에 이르러) 수원부 · 광주부 · 개성부 · 강화부의 유수, 병마수군절도사까지 겸직했다.

    당연히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바, 대표적으로 경기도관찰사는 예하  3품 이하 관리들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 또한 왕권에 맞먹는 권한이었다. 그리고 경기감영에는 임금이 직접 행차해 관찰사의 권력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으니,
    영조와 정조가 경기감영에 거둥해 선화당에 들어 외읍(外邑) 백성들을 진휼하거나 군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경기감영도 속의 포정문과 외삼문
    경기감영도 복원도 / 왼쪽이 포정문이고 가운데가 정청인 선화당이다.
    일본공사관 하야시 부이치의 사진첩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 속의 경기감영 포정문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사진
    원주 강원감영 포정루 / 원주시 제공 사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392년 건국 이후 1393년 초대 경기관찰사 장자충(張子忠)을 시작으로 1908년 김사묵(金思默)까지 650여 명이 경기감사를 역임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에게는 청렴·결백의 공직자로서의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 출신에 조선시대 정언(正言)과 정론을 이끌었던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청요직을 지낸 인물이 많았다는 것은 역대 관찰사의 청렴·결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는 하륜(河崙), 한확(韓確), 김종직(金宗直), 신흠(申欽), 최명길(崔鳴吉), 채제공(蔡濟恭), 박문수(朴文秀), 최익현(崔益鉉), 김보현(金輔鉉), 김홍집(金弘集) 등이 있다. 다만 여기서 김보현의 경우는 매우 불명예스러웠으니 그는 앞서 선혜청 당상의 지낼 당시의 부정축재로 인해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에게 맞아 죽었다. 김홍집 또한 1896년 군인들에 의해 맞아 죽었으나 부정축재와는 전혀 무관한, 친일내각을 이끌었던 총리에 대한 고종 임금의 엉뚱한 복수극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1910년 10월 1일 강제합병과 더불어 일본인 히가키 나오스케가 부임했고, 이후 16명의 일본인이 역임했다. 광복 이후로는 구자옥 초대 관선지사 이후 모두 31명의 지사가 배출되었으며,(1945년 8월~1995년 6월) 미군정 때는 윌리엄 마이너스를 비롯한 3명의 미군 장교가 경기도지사를 지냈다.(1945년 9월~1947년 12월) 

     

     

    일제강점기의 경기도청 / 1909년 대한제국이 옛 의정부 자리에 내부(內部=내무부) 건물로 건립했으나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며 경기도청으로 전용됐다.
    1957년 경기도청 사진 / 이승만대통령 82회 탄신기념 현수막이 걸려 있다.

     

    민선 경기도지사의 경우는 5.16 군사쿠데타 후 중단되었던 한국의 지방자치제가 1994년 부활되며 1995년 민선 1기 지사인 이인제를 필두로 현 도지사인 김동연(민선 8기)까지 모두 6명을 배출했는데,(이인제, 손학규, 김문수, 남경필, 이재명, 김동연) 모두 대통령에 뜻을 두었으나 경선에서 탈락하거나 본선에서 낙선한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경기도지사는 흔히 '잠룡들의 무덤'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선을 포함한 역대 선거 중에는 1997년과 2002년에 대선 후보의 조연으로 맹활약(?)한 이인제의 경우가 가장 재미있었다. 1997년 대선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맞대결이 예상되었으나, 신한국당 경선 후보였던 이인제 후보가 경선 결과에 불복,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 경쟁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결과는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39만557표차 득표율 1.6%이라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되었는데, 이때 이인제는 19.2%의 표를 획득했다. 그래서 이후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에 기여를 했다는 칭찬(?)을 잠깐 들었다. 이회창 후보가 강세를 보였던 영남권에서 표가 분산되며 결과적으로 김대중 후보의 승리를 도왔기 때문이다.

     

    5년 뒤인 2002년 대선에서 이인제는 또다시 화제를 몰고 왔다. 그해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이번에는 민주당 당원이 되어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이인제 대세론을 앞세워 지역 경선에서 줄곧 1위를 달렸으나 광주지역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역전당한 뒤 2위로 밀려났다. 그러자 이인제는 경선 불참을 선언했고, 2002년 대선을 코앞에 둔 12월 1일 자신이 후보로 뛰었던 민주당을 탈당했다. 두 번째 경선 불복이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을 돕겠다며 나섰으나 '노풍'(노무현 바람)의 대세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48.91%를 득표한 노무현 후보는 46.58%를 득표한 이회창을 꺾고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이인제는 '경선 불복의 아이콘'이라는 오명을 얻었고 국회에서는 이른바 '이인제 방지법'이 제정되었다. 당내 경선 불복한 자는(여론조사 경선 포함)  해당 선거의 후보자로 등록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이었다.

     

    '이인제 방지법'인즉 이인제에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음에도 그는 이후로도 줄곧 정치가의 길을 걸었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27.7%라는 전국 최저득표 기록으로 국회의원이 되며 피닉제(불사조 이인제)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한 민간단체에 의해 기네스 북에 정당을 가장 많이 바꾼 철새정치인(무소속까지 14번)으로 등록될 뻔도 했으나 기네스 북에 그와 같은 조항이 없다 하여 신청되지 못한 일도 있었다. 

     

    이상 경기도지사로서 대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사람 중의 특이 인물을 살펴보았는데,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던 특이 인물로서 유시민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그는 개혁당→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무소속(대구 총선출마)국민참여당통합진보당진보정의당을 거친 이인제 뺨치는 철새 이력의 소유자로 지난 2010년에는 국민참여당 후보로 경기도지사에 출사표를 던져 야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야당 표가 분열되어 가뜩이나 열세인 경지도지사 선거가 암울해지는 바, 민주당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여권 후보 단일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유시민은 높은 인지도를 앞세워 민주당 후보인 김진표(현 국회의장)를 밀어내고(여론조사에서 50.48% 대 49.52%로 아슬아슬하게 승리)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파내는 기염을 토한 셈인데, 그는 이 여세를 몰아 민노당의 심상정 후보까지 사퇴시키고 범야권 후보로 기세등등하게 경지도지사 선거에 나섰다. 하지만 2010년 6월 5일 실시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김문수(당시 경기도지사)에게 4% 차이로 고배를 들었다.  

     

    아울러 2011년 김해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이봉수라는 자신의 당(국민참여당) 사람을 민주당을 대신해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때도 패배함으로써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됐고 결국 그가 만든 국참당은 창당 2년 만에 해산했다. 명목상으로는 통합진보당과의 합당이었다. 하지만 통진당은 1년도 못돼 분열되고 이후로는 진보정의당에 몸 담았으나 그 또한 뜻이 맞지 않았는지 2013년 2월 당을 나와 정계를 은퇴하였다. 

     

     

    진보정의당의 3명의 핵심당원 / 이런 시절도 있었다. 노회찬이 2016년 창원에 출마했을 때의 사진이다. 그는 지금 고인이 됐으며 유시민과 진중권은 썰전 마당에서 이빨꾼으로서 대립하고 있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