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왕건의 기습 쿠데타에 당한 태봉국왕 궁예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 21. 15:36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태봉국왕 궁예는 918년 6월 왕건 일파가 일으킨 기습 쿠데타에 밀려났다. 그 일파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박술희 등으로 개국일등공신에 오른 자들이다. 이중 신숭겸이 선봉에 서니 현대사의 박희도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79년 12.12사태 당시 제1공수특수여단장(준장)이었던 그는 1공수를 이끌고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무력 점령함으로써 신군부 쿠데타 성공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때 1공수의 총질로 다수의 군인들이 사상했다. 

     

    하지만 무력하게 당한 5.16 때와 달리  12.12사태 때는 기존 군부에서도 반격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장태완 소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당시 반란의 수괴들이 모여 있던 경복궁 안 30경비단을 공격해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을 처치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명령불복종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12.12 당시 이곳 신무문 안에는 청와대 경비부대인 30경비단이 주둔했다. 문 밖으로 청와대가 보인다.

     

    그때는 장태완 소장이 수경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겨우 1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으므로 내부 장악력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수경사에서 오래 근무하며 요직인 수경사 예하 30경비단장으로 있던 장세동 대령이 실세였다. 그는 지휘체계상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직속 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반란군에게 붙어 역으로 장태완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이후 장세동은 전두환에게 오랜 사랑을 받는다)  

     

    비유하자면 장세동은 궁예를 배신하고 왕건의 쿠데타에 가담한 복지겸 같은 놈이었다. 그는 태봉국의 오랜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봉국왕 궁예에 대한 민심 이반을 핑계로 반란군의 편에 섰고, 마군(馬軍) 정예병을 이끌고 반란군 진압에 나선 마선장군 환선길을 밀고하여 죽게 만들었다. 

     

    환선길은 태조가 즉위한 지 4일 만에 역 쿠데타를 일으켜 정병 50여 명을 이끌고 궁정에 침입하였으나 복지겸의 밀고로 대비가 있었던 바,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울러 이흔암과 임춘식 또한 반기를 들어 거병하였는데, 태봉국 장수들의 이와 같은 역반란은 학정으로 민심을 크게 잃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왕건 측의 대의명분과는 크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영동지방) 호족 김순식은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왕건에 10년 동안 복속하지 않았던 바, 이 또한 왕건 측 주장과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흥미로운 점은 환선길에 이어 거병한 이흔암의 아내가 환씨(桓氏)라는 점이다. 환선길은 붙잡혀 아우 환향식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흔암의 처가 환씨인 점은 이흔암 역시 환선길의 역모에 가담했다 발각되어 주둔지였던 웅주(熊州, 지금의 충청남도 일대)의 군대를 이끌고 거병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흔암의 아내 환씨도 남편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보이니 이후 환씨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멸족을 시킨 것이었다.

     

    * 궁예(弓裔)가 궁씨(弓氏)였는가는 지금도 의문 사항이다. 단일본인 토산궁씨(兎山弓氏)는 현재 500여 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93년 미스코리아 진(眞)에 궁선영 씨가 선발되며 궁씨의 존재를 알렸다.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 후 아들들과 함께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실질적으로 멸족된 것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궁예의 후손을 자처하는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의 세보에는 궁예가 신라의 왕족으로 기재돼 있으며 전후 사정도 김씨의 개연성이 있어 김씨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1993년 혜성과 같이 등장한 궁씨
    이후 궁선영은 연기자, 모델, 뮤지컬 배우 등으로 활약했고,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연구교수, 카이스트 대학원 대우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희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태봉국왕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 당시 철원 궁을 탈출해 근위병들과 함께 포천 명성산(鳴聲山)으로 도망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산의 이름은 그때 부하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하여 유래되었다. (그들이 쌓은 성도 있었다 하나 찾을 수는 없다) 궁예는 명성산 일대에서 농성하다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에서는 그가 도망치다 화전민들에게 발각되어 해를 입어 죽었다거나,(<삼국사기>)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내려와 보리 이삭을 훔쳐먹다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고려사>)

     

     

    포천 산정호수의 궁예 동상
    궁예의 전설이 전하는 명성산
    눈 덮힌 산정호수에서 바라본 명성산

     

    인기 드라마였던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토벌군에 몰린 궁예가 부하 장수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하고 그를 죽인 장수 역시 자결을 하는 것으로 마감 져 궁예의 최후를 미화시켰다. 그리하여 전혀 근거가 없는 역사 왜곡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으나, 백성들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 역시 크게 믿을 바는 못된다. 고려 사람에 의해 기록된 <삼국사기>의 궁예 관련 내용은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태조 왕건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가장 깔끔한 방편이었을 터.... 

     

    <삼국사기>의 내용을 참고한 듯 보이는 <고려사>의 기록 역시 그러한 쪽인데, 전설에는 왕건과의 최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의 자살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실제적으로도 그러했을 개연성이 짙은 바,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한 시대 영웅의 마지막 모습으로 어울렸을 것 같다. 즉 895년 철원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운 궁예였지만 패서지역(구 고구려계 지역인 경기도 북부, 황해도, 평안도 남부지역) 호족들의 나와바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비운의 최후를 맞아야 했던 것이다.

     

     

    산정호수 변에 묘사된 궁예의 최후

     

    그 패서인들의 우두머리가 송도 신흥 호족인 왕륭으로서 바로 태조 왕건의 아버지였다. 왕룡·왕건 부자는 신라말 군웅할거한 효웅이었지만 굴러들어온 돌 궁예에 의해 박힌 돌임에도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마침내 태봉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태봉국을 대신한 고려국 건국에 성공하였다.

     

    태봉은 '큰 땅'이라는 뜻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다른 말이다. 즉 궁예와 왕건은 하늘 아래 고구려를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원대한 뜻이 같았다. 하지만 하늘 아래 영웅이 둘일 수는 없었으니 왕건에 밀린 궁예는 그렇게 덧없이 갔다. 궁예는 산속  평원인 철원 땅을 수도로 삼아 23년 동안 집권하였지만 결국 쫓겨나고 태봉국의 도성은 이후 폐허가 되었다.

     

    철원 태봉국의 도성은 외성 12.5㎞, 내성 7.7㎞로 백제 풍납토성(3.5㎞)과 신라 월성(1.7㎞) 및 고구려 국내성(2.7㎞)을 훨씬 능가하는 큰 성이었다. 철원도성은 이후 500년 후에 세워진 한양도성(18㎞)과 맞먹을 정도였으니 궁예의 포부(혹은 허세)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분열이 이루어졌고, 공교롭게도 지금도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있다. 분열된 남한과 북한이 정확히 그 반을 갈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청책 브리핑이 설명하는 철원도성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둔 궁예도성
    DMZ에 갇힌 궁예의 꿈 "남북 함께 발굴하자" / SBS 뉴스
    현재 궁예도성으로 가는 길은
    이처럼 위험하다.

     

    도성 터에서는 일제시대 상당수의 유적·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 사진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석등은 보물로도 지정됐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터라도 확인하고 싶지만 민통선 내인지라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방이 지뢰밭이라 갈 수도 없다. 궁예도성은 백마고지 아래에 있는데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월정리역까지이다.

     

     

    일제강점기 촬영된 궁예도성 터
    일제강점기 촬영된 궁예도성 석등
    철원역사문화전시관의 태봉국 철원성 안내문
    지금 태봉국의 흔적은 도로명으로만 남았다. 뒤에 보이는 PALACE는 궁예와는 물론 상관이 없다.
    고석정 유원지 절벽 위로 보이는 '궁예도성'도 궁예와는 상관이 없다. (통갈비 맛집임 ^^)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