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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산대군·중종·인종·명종·숙종·경종태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6. 23:07

     

    조선 비운의 왕자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1454~1488)에 대해서는 이미 썰을 풀었다. (☞ '연산군이 큰엄마 월산대군부인을 범했다는 썰은 사실일까?' / '풍월정 이정의 마포범주') 그래도 그의 박복한 팔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못다 푼 썰이 많은데 이번에는 그의 태실(胎室)에 관한 얘기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조선왕조에서는 왕손(王孫)의 태(胎)를 중히 여겨 태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안치했다. 그런데 조선의 수 많은 왕과 왕자의 태실 중 월산대군은 공교롭게도 서울 우면산에 안치되었으니 서울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실의 태실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또 비운의 요소가 되었던 바, 태실에 묻혔던 태 항아리와 태지석은 일찌감치 도굴되어 일본에 반출되었다.

     

     

    월산대군 태옹 / 높이 36.3cm
    우면산 월산대군 태실 / 비석 높이 60cm

     

    조선과 조선의 미(美)를 사랑했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의 증언에 따르면 월산대군의 태 항아리는 그가 존재에 대해 알기도 전 이미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미술교사로써 조선에 온 것이 1913년이니 그보다 앞서 도굴이 있었다는 얘기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분청사기가 고려의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물임을 최초로 밝힌 도예전문가로, 제 동생 아사카와 타쿠미, 그리고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했다. 

     

    * 경복궁 집경당 내에 조선민족의 이름을 내걸고 건립한 사립미술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민족미술관은 그들 3인이 수집한 한국의 공예품과 자기가 주류였는데, 그들은 그 유물들을 도태로 한국 문화가 중국 아류라는 일본인들 주장에 맞설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유물들을 모두 한국에 기증했다. (☞ '망우리 공원묘지에 묻힌 아사카와 타쿠미')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월산대군의 태 항아리가 진즉에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고 했다. 태실이 경성 근방에 위치한 탓이다. 이 항아리는 현재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일본인 나까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을 사업가 아타카 에이이치(安宅英一)가 구입하고 보관하였다가(아타카 콜렉션) 그의 사업이 파산하면서 스미토모 은행에 넘겨졌다. 이후 스미토모 그룹에 의해 오사카시에 기증되어 1982년부터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뚜껑과 태지석이 행방불명되었다. (내 항아리는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름) 이 태옹은 현재 '분청사기 인화국화무늬 월산대군 태항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백자 달항아리
    영조의 태옹 내외 항아리와 태지석 / 보통 이렇게 한 세트로 묻힌다.

     

    남아 있는 태지석의 탁본에는 ‘천순(天順) 6년 11월 18일에 묻다’라는 기록이 있어, 월산대군의 장태의식은 월산군(月山君)’으로 책봉된 2년 후인 1462년(세조8)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면산 태비(胎碑)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천순육년오월십팔일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立石)’의 날짜와 동일하다. 월산대군의 태실은 조촐하나 그 형태가 온전하여 조선 태실 비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0호)

     

    최근에 촬영된 월산대군의 태실은 아래와 같으며, 이어서 앞서 소개하지 못한 비교적 온전한 조선 왕들의 태실(혹은 태실비)을 싣기로 하겠다. 

     

     

    태실의 앞뒤
    태실이 위치한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291-1 태봉
    태봉 올라가는 길

     

    ▼ 중종태실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태봉에 있다.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의 태실이다. 1725년(영조 1) 때 관상감 관원을 보내 개수를 할 정도로 극진히 관리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태항아리가 서삼릉으로 옮겨진 후 석물이 훼손되어 땅에 묻혔다가 1982년 산주인이 장지 마련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여 1987년 복원이 되었다. 세 동간난 비신이 지난했던 과거를 말해준다. 

     

    중종태실

     

    ▼ 인종태실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 태실봉 정상부에 에 있다. 인종태실은 태실봉안 의례에 따라 1521년(중종 16)에 처음 설치됐다가 인종이 즉위하면서 1546년(명종 1)에 추가 공사(가봉)가 완료되었다. 이후 1680년(숙종 6)의 개수를 거쳐 1711년(숙종 37) 태실비에 대한 재건이 이뤄졌다. 일제시대 태항아리 등이 서삼릉으로 옮겨진 후 방치되었다가 됐다가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인종태실은 설치와 보수 관리에 관한 관련 기록이 소상하고, 처음 설치된 이후 원래 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조영기법과 구조 등이 조선왕실 태실 의궤의 내용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규모가 화려·웅장하고 장식 기법 및 짜임새가 우수해 태실 조형의 수작(秀作)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에 지방문화재로 관리되다가 올해 8월 26일 문화재청 고시를 통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승격되었다.

     

    인종 태실

     

    ▼ 명종태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다. 명종태실은 조선 13대 왕 명종이 태어나던 1538년(중종 33)에 의례에 따라 건립되었다. 조선 왕실의 많은 태실 가운데 <조선왕조실록>등에 관련 기록이 상세히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 형태 및 자리가 온전할 뿐더러 주변 지형 등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일찌기 보물(제1976호)로 지정되었다. 태실이 보물로 지정된 최초의 예로서, 한국미술사의 태실 연구 자료로서도 뛰어난 가치를 지닌다.

     

    1538년(조선 중종 33년) 건립 당시 태실과 함께  세워진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大君椿齡阿只氏胎室碑)' 외에 명종 즉위 이듬해(1546년) 세워진 '주상전하태실비', 그리고 1711년 추가로 세운 ‘주상전하태실비’ 등 모두 3기의 비석이 있다. 

     

    명종태실

     

    ▼ 선조태실비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오덕사 내에 있다. 본래는 운산면 태봉리 태양산 정상부에 있었으나 태실은 해방 전후로 망실되고 태실비는 마을로 옮겨져 동네 주민들 연자방아의 밑돌로 쓰이다가 오덕사 주지가 경내로 이전했다. 태양산 태실에는 1570년(선조 3)에 가봉 당시 건립된 것과, 이후 그것의 글씨가 마모돼 1747년(영조 23)에 다시 세운 '주상전하태실비'가 있었으나, 둘 다 마을로 옮겨져 방치되다 2016년을 전후해 선조 3년의 것은 마을 한쪽에, 영조 23년의 것은 오덕사 경내에 보존되었다.

     

    오덕사 선조 태실비
    오덕리 마을의 선조 태실비 / 오피니언타임스 사진

     

    ▼ 숙종태실비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태봉에 있다. '위키백과' 등에 "고종 2년(1869) 태와 태실은 경기도 양주로 옮겨가고 현재는 2기의 태실비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는 까닭일까, 여기저기 모두 그렇게 쓰여져 있으나 1869년 경기도 양주로 옮겨졌다는 것을증명하는 기록이나 석물은 찾을 수 없다. 아마도 1928년 일제가 서삼릉으로 옮긴 것에 대한 잘못된 기록으로 여겨진다.

     

    이후 망실되어 흩어졌던 것을 1991년에 공주시에서 태실의 기단석에 의거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나 장태석물은 수습을 못하였고 원자 때 세운 비와 1683년(숙종 9)에 세운 '주상전하태실비'만 보존됐다. '주상전하태실비'가 숙종 9년에 뒤늦게 세워진 것은 당시의 극심한 흉년에 비를새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망실된 장태석물은 지금도 산 주변에서드문드문 보인다. 장태석물이 있던 자리에는 누군가 이미 묘를 썼다. 

     

    숙종태실비

     

    ▼ 경종태실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뒷산 태봉 정상에 있다. 조선 제20대 왕인 경종은 숙종의 원자보다는 희빈장씨(장희빈)의 아들로 더 유명하다. 1831년(순조 31) 11월에는 김군첨 등이 태실을 파헤치고 석물을 흩뜨리는 희대의사건이 발생했다. 1928년 일제가 태항아리를 옮겨 간 뒤 다시 훼손되어 해방 이후에는 일부 난간석과 둘레석이 엄정면사무소에 이전되었다. 이후 1976년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었는데, 이때 일부 사라진 부재를 새로 깎아 만들었으나 비교적 온전한 편이다. 

     

    경종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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