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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월정 이정(李婷)의 마포범주(麻浦泛舟)
    작가의 고향 2022. 9. 3. 06:24

     

    풍월정 이정(李婷)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군호인 월산대군을 대면 거의가 알 터, 국어 교과서에 그의 시조가 실렸던 까닭이다. '가을 강에 밤에 드니'로 시작되는 아래의 시조인데, 그는 이 시조 이외도 한시 500수가량을 지은 다작(多作)의 시인이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그는 다작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사신들을 놀라게 했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기량도 빼어났다. 그래서 이정의 시는 명나라에도 소개되어 <전우산 열조시집(錢虞山列朝詩集)> 등에도 수록되어 전한다. 당시의 임금인 성종은 그가 죽자 유고를 수집케 하여 <풍월정집(風月亭集)>이라는 문집을 간행했는데, 여기에는 이정의 시 488수를 포함, 성종이 찬한 '어제기존형화상찬'(御製記尊兄畫像贊), 임사홍이 찬한 '신도비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정이 시작(詩作)을 즐긴 한강변 망원정
    고양시 신원동 월산대군 신도비
    <풍월정집> / 조선 제9대 왕 성종이 간행한 월산대군의 시문집으로 총 2권 2책으로 구성돼 있다.

     

    성종 임금이 직접 문집을 간행한 이유는 이정의 시가 빼어났다는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친형 작품이라는 데 무게가 더 실렸을 것이다. 앞서 '연산군이 큰엄마 월산대군부인을 범했다는 썰은 사실일까?'에서의 설명처럼 성종(질산군)은 권신 한명회와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농간으로 제 형인 월산대군을 밀어내고 보위에 올랐던 바, 비록 제 뜻은 아니더라도 평생 미안할 법했다.

     

    까닭에 성종은 그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대저택을 지어주고 본인 역시 월산대군의 집을 자주 방문하며 각별히 대했다. 성종은 월산대군 집 정자에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월산대군의 호(號)로도 쓰였다. 월산대군 이정 역시 그것도 제 팔자려니 생각하고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니 풍월정과 한강변의 망원정(望遠亭) 등에서 시을 짓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조용히 서른다섯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작품 무대가 되었던 서울 망원동 망원정에 대해서는 앞서 같은 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풍월정집>을 보다가 한강 풍월정에서 읊었음직한 시 한 수를 발견했다. 지금의 덕수궁 자리 그의 집에 있었다는 정자 풍월정이 아니라 한강 마포나루에 인접한 진짜(?) 풍월정을 말함이다. 화양정, 망원정, 압구정, 별영창 읍청루 등과 더불어 한강 8대 정자로 불렸다는 용산강 풍월정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자리는 확인되어 전한다.

     

    마포나룻가 벼랑 위 풍월정의 자리에는 숙종조에 백운암이라는 절이 세워졌다고 하니 정자는 적어도 숙종조 이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마포 풍월정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다만 <일성록> 정조 19년(1795) 3월 17일의 기록에 정조가 수군 훈련을 읍청루에서 지켜보겠다며 수군들을 풍월정 앞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한 대목이 나오는 바, 현재 석불사의 자리에 풍월정이 건립됐던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마포의 뱃놀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정의 시는 다음과 같다.

     

     

    麻浦泛舟(마포범주)

     

    滿浦煙光綠發地(만포연광록발지)

    微風嫋嫋吹寒漪(미풍뇨뇨취한의)

    江邊小草綠於染(강변소초록어염)

    堤柳又作黃金枝(제류우작황금지)

    畵船蕭鼓橫渡頭(화선소고횡도두)

    碧蘅紅杜生芳洲(벽형홍두생방주)

    蕩漿歸來夕陽邊(탕장귀래석양변)

    回頭忽見來沙鷗(회두홀견래사구)


    물 가득한 포구의 물안개, 푸르픔 피어나는 땅 위에서 반짝이고

    미풍은 살살 불어 차가운 물결 일으키네.
    강변의 작은 풀들은 강을 더욱 푸르게 물들이며
    강언덕의 버드나무는 또다시 가지에 금빛 눈을 틔운다.
    피리소리 북소리 나던 그림 같은 놀잇배는 나루에 정박해 있고
    푸른 곰취 붉은 아가위, 모래섬에 피었다.
    노 저어 돌아오는 길, 석양이 강변을 비추는데
    문득 머리 돌려 보니 비둘기 한 마리 모래밭에 날아든다.

     

     

    시정(詩情) 풍경
    마포에서 사라진 또 하나의 정자 별영창 읍청루

     

    아. 미려하고 미려하다. 월산대군 이정은 무심한 세월 속에서 물가의 물안개처럼 피어나는 욕망의 헛헛함을 그렇게 시로 승화시켰다. 그가 시름을 달랜 마포 강변 풍월정에는 앞서 말한 석불사가 옛 모습도 아니고 모던하지도 않지만 단아한 퓨전의 모양새로 우뚝하고, 거기서 바라보는 한강은 여전히 푸르다.

     

     

    석불사 대웅전
    석불사 삼성각 / 한국전쟁 때 다른 건물은 모두 불타고 삼성각만 남았다고 한다.
    석불사 위에서 본 한강
    석불사의 상징 미륵보살입상
    보살님께서 눈이 부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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