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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의 '입추야사'(立秋夜思)와 저자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9. 11. 20:08
서울로 돌아온 김창흡이 주거지로 선택한 곳은 본래 그가 살던 양반가 한양 서촌이 아니라 한강변의 저자도(楮子島)였다. 앞서도 소개한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쓴 김상문에 따르면 그는 서촌으로 돌아와 병중의 어머니를 모시다가 63세가 되는 1714년 이후 저자도로 들어와 집을 짓고 산 것으로 보인다.
아, 나의 반생은 바람에 나부끼는 쑥대 같았으니, 한 곳에 머무르는 일도 수월치 않았소. 금강산을 미친놈처럼 돌아다니다 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신은 차분히 나를 기다려주었지.... 경신년(1680년)과 계해년(1683년) 막내아우와 누이동생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상심한 나머지 속병이 생기자 나도 어쩔 수 없이 산문(山門)을 떠나 어머니 곁에 머물다 한강 저자도에 집을 마련했다.
창흡이 이주한 저자도는 저자(楮子, 닥나무)가 많이 자란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 저자도 혹은 저도(楮島)는 국초의 세도가 한명회의 글에도 등장하는 섬으로, 그는 이 섬과 응봉, 삼각산이 바라다 보이는 경치 좋은 한강변에 거창한 정자를 지었다. 유명한 압구정이 그것이다. 18세기 겸제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에는 저자도와 모래톱이 잘 표현돼 있는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던 이 저자도는 공교롭게도 1970년대 현대건설에서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지으며 사라졌다. 압구정동 공유수면을 매립하는데 이 섬의 흙을 모조리 긁어다 썼던 것이다. (당시 35만평으로 여의도 면적 40% 정도의 규모였다)
저자도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면서 유속이 느려지는 곳에 쌓인 모래 퇴적층에 의해 만들어진 섬이다. 서울 부근의 한강은 크게 세 번 굽이치는데, 처음 꺾이는 곳에서 중랑천과 만나며 저자도가 생겨났고 세 번째 꺾이는 곳에서 서강과 만나며 난지도가 생겨났다. 옛사람들은 물이 꺾여 이루는 잔잔한 만(灣)이 흡사 호수처럼도 보이는 그곳에 실제로 호수의 명칭을 붙였다. 그것이 동호(東湖)와 서호(西湖) 등이니, 율곡 이이가 경국치민(經國治民)의 명저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쓴 곳이 이 한강변 부근일 것이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창흡이 서울로 돌아오자 조정은 끈질기게 그를 불러들여 1721년(경종 1) 사헌부 집의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세자 연잉군(영조)의 책임교수격인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한사코 벼슬을 마다한 데는 원래부터 관직을 기피해온 결벽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혼란한 정치를 혐오한 까닭이 컸다. (전후로도 이조참의·부제학·개성유수·형조참판·대사헌의 직첩이 계속해 내려졌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앞서 1편에서 말했지만 그의 집안은 대단한 권문세족이었으니 좌의정을 지낸 청음 김상헌이 증조부이고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이 아버지였는데, 그 밑의 6형제인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한양 6창'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으니, 아버지 김수항·수흥 형제는 기사환국으로 희생되었으며, 창흡이 69세 때인 1721년 12월에는 신임옥사로 맏형 김창집이 거제로 유배되고 아우 김창업은 울분으로 죽었다.(김창집은 4월 성주로 이배된 후 즉시 사사되었다)
창흡은 이 즈음 '입추야사'(立秋夜思)라는 명시를 쓴다. '가을의 길목에서 야밤에 든 생각'이라는 이 시는 그의 문집인 < 삼연집(三淵集)> 두 번째 책에 실려 있는데 '습유'(拾遺, 흘러다니는 시를 주워모음)의 부제가 붙은 것을 보면 정확히 언제 쓴 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 적어도 저자도에서의 작품은 아니고 아마도 서촌 장동(莊洞) 어느 친족의 집에서 쓴 시인 듯하다.
誰家女郞杵
乘月搗流黃
驚心樓上聽
頓覺葛衣凉
뉘집 여인들의 다듬이 소리
달빛 타고 비단옷을 두드리네
누각 위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 놀라고
갈옷의 서늘함 문득 깨닫게 되네
이 시에서 누각이나 유황(流黃, 누런 고치실로 짠 비단)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다듬이 소리가 들려오는 이곳은 분명 반촌(班村)이다. 그리고 그저 평화롭다. 그런데 누각 위에서 그 소리를 들은 시인은 왜 놀라는 것일까? 이유는 앞서 이미 말했다. 그곳이 비단옷을 입는 양반들이 사는 반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의호식하는 양반이긴 하지만 언제 유배 가서 불귀의 객이 될지 모르는 몸, 이에 문득 계절의 서늘함을 느꼈던 것이니 그것이 단지 갈옷과 같은 통기성 좋은 옷을 입은 까닭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한강변 저자도에서의 안빈낙도를 택했다. 그렇지만 죽음은 종질인 김언겸(金彦謙)의 별장 가구당(可久堂)에서 맞았다. 1722년(경종 2) 2월 21일로, 어쩌면 위 시 역시 가구당에서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구당은 서촌 어느 곳이리라는 추정만 분분할 뿐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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