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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시인 백석과 유명 빨갱이 박헌영 & 길상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9. 20. 02:10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은 교과서에 가장 많은 시가 실린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는 우리나라 시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시인으로 조사되기도 했다.(2005년) 그는 이처럼 유명 문인이지만 그 전에는, 정확히는 1987년 이전에는 아는 사람만 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글쟁이였다. 북한 작가인 탓이었다. 그러다 1987년 해금 후 아름아름 그의 시가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이후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문청(문학청년)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먼저 그의 작품을 하나 보자. 아래의 '정주성'(定州城)은 '사슴'과 더불어 초기에 소개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졸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하늘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정주성'은 1935년 8월 30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백석의 첫 시이다. 이 시는 그의 고향 평북 정주에 있는 정주성의 폐허를 배경으로 하는데 단순한 서정성에서 벗어나 홍경래의 난에 대한 짙은 서사까지 함축되었으며(잠자리 졸던 성 터/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거기에 청배(지방 특산물인 푸른 빛이 도는 배)를 파는 무력한 조선인까지 등장시켰다. 토속적 향토미에 버무려진 서사, 그리고 당대의 모더니즘까지 함축된 이 시는 단박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로 소월 김정식과 동향이다. 소월은 백석이 다닌 정주 오산보통학교 6년 선배이기도 하다. 백석은 소월이 자신의 선배라는 점에 큰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는데, 소월이 유명한 '진달래 꽃'에서 그저 영변 약산의 진달래 꽃만을 주목한 데 반해 백석은 관서대란(홍경래의 난)으로 스러져 간 이름 없는 민중의 넋까지 보듬었다는 점에서 소월보다 더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 생각이다)
1935년 '정주성'을 필두로 폭풍 같이 시를 쏟아내던 백석은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자비 출간했다. 그러면서 '사슴'의 가격을 당대의 시집보다 두 배가량 비싼 2원으로 책정했으나 인세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던 듯 100부 한정으로 찍어 대부분을 증정용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에 시집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문청들은 '사슴' 속의 시들을 필사해 감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대학도서관의 것을 필사한 시인 윤동주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 그의 시집은 <사슴> 외에 여러 권이 나와 있지만 정작 본인은 <사슴> 외에는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슴>은 더욱 귀한 대접을 받는 시집이 되었으며, 해적판이 횡횡한 통에 지금은 어느 것이 오리지널인지도 불분명하다. <사슴>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 서정주의 <화사집>에 이어 한국 평론가가 뽑은 한국 대표 시집 3위에 오르기도 했는데,(2012년) 번외의 이야기를 하자면 아직도 친일파 서정주의 시가 거론되는 현실이 그저 개탄스럽기만 하다.
* 시인 신경림과 안도현은 백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읽고 또 읽었으며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ㅡ신경림
"나는 백석의 시를 베끼기 위해 시를 써 왔다." ㅡ안도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사와 함흥 영생고보에서 근무하던 백석은 1939년 돌연 만주로 떠났다. 이후 안동세관 세관원으로 일하며 개인적으로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어를 공부하던 백석은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리고 남으로 가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마다하고 정주 오산학교 당시의 스승인 조만식 선생 곁에 남아 시와 동시를 쓰며 러시아어를 번역했다. 그리고 북한정권 수립 후에도 정치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시인과 번역가로서만 활동했는데, 그가 북에서 번역한 러시아 문학작품은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1958년 드디어 백석에게도 올 것이 왔으니, 그는 "이데올로기만큼 문학적 요소도 중요하다"는 평소의 주장이 문제가 되어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 축산반으로 쫓겨났다. 오지의 대명사 삼수·갑산 그곳이었다. 이후 그는 삼수군의 양치기와 농사꾼으로 일하며 그곳 아이들에게 베푼 문학수업을 위안거리로 삼다가 1995년 겨울에 걸린 감기가 회복되지 않아 이듬해 1월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했다. 그 역시 횡사였지만, 깨진 안경알로 손목을 그은 자해상태에서 총살형에 처해진 임화에 비하면 그래도 천수를 다한 평안한 죽음이었다. (☞ 'KARF를 이끌던 시인 임화')
백석의 흔적은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 그 편린이 남아 있다. 백석은 헌칠한 외모에 190cm에 가까운 우월한 기럭지, 그리고 고급양복만을 선호한 멋쟁이였던 까닭에 여성들에게 인기 짱이었는데, 뭇여성을 마다하고 의외로 함흥관 기생이던 진향(眞香, 본명 김영한)과 눈이 맞아 동거를 했다. 하지만 백석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는데, 이에 백석은 만주로의 사랑의 도피를 꾀하나 김영한은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던, 잘 나가던 최고 기생으로서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의 앞길을 막기 싫었던 눈물 어린 배려였을까..... (이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백석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던 김영한과의 사랑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이렇게 읊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하지만 끝내 나타샤는 나타나지 않았고 백석은 홀로 만주행 열차를 탔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김영한은 비록 기생이었지만 권번에서 3년간 엄격한 기예 교육을 받았고, 그 기간 동안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조선 명창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또 글짓기에도 재주를 보여 한글학자 신현모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까닭에 통속의 기생과 같은 취급을 당한 처사에 상처를 받았을 법도 했다. (당시 백석은 26세, 김영한은 22세였다)
이후 김영한은 성북동에서 대원각(大苑閣)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하다가 말년에 법정스님에게 24,000㎡(약 7000평) 규모의 대원각 전체를 시주했다. 당시 돈으로 1천억 원이 넘는 거액의 시가였다. 이에 법정스님은 몇 번이고 고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 대원각을 대한 조계종 산하 길상사(吉祥寺)로 개조했다. 당시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1000억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로 백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했다.
김영한은 1999년 11월 생을 다할 무렵,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해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람들은 이것을 그녀가 살아생전 들어주지 못한 백석의 청에 대한 미안함으로 해석했고 그대로 따랐다. 이후 두 사람은 순애보는 세간에 무던히 오르내렸고 사찰로 거듭난 길상사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길상사 측에서는 실제로 50억원을 출연해 백석 기념사업에 희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의 아름다운 스토리는 2000년 들어 원경스님(당시 70세)이란 사람이 나타나며 대원각의 소유를 둘러싼 진실공방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는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1인자 박헌영의 유일한 혈육이었는데, 길상사의 전신인 대원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본래 대원각은 남로당 자금으로 지어진 집으로, 남로당에서는 대원각을 박헌영의 사저(私邸) 겸 남로당 본부로 쓰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집의 규모가 너무 커 노출이 쉽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구조라 하여 당시 사용하던 혜화동 혜화장에 그대로 머물렀고, 건물은 과거 경기고등학교 재학 당시의 신원보증인이던 조용구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것이 혼란기에 조용구의 집안사람 조봉희에게 넘어갔고 다시 김영한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조건이 '시절이 조용해지면 다시 원소유주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원경스님의 요지인즉, "김영한은 이 건물을 요정 대원각으로 꾸며 운영하다 본래의 약속을 어기고 법정스님에 일방적으로 시주했다는 것"으로, 그는 그 증거로서 아래의 길상사 등기부등본을 들었다. 길상사 땅의 등기부등본을 보면 소유권이 정말로 1955년 조용구의 집안 사람인 조봉희(왼쪽 점선 원)에서 김영한(오른쪽 점선 원)에게 넘어간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경스님의 주장이 진실인지 입증할 수 없다. 아울러 당사자인 박헌영, 조용구, 김영한이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증언을 채취할 수도 없다. 그리고 원경스님은 이후 2015년 조계종 최고 법계(法階)인 대종사(大宗師) 법계를 받았고, 길상사의 권리도 조계종으로 이관되며 진실공방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다만 당시에 박헌영의 최후가 다시 조명되었다. 일제시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박헌영은 해방 후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며 많은 좌파 젊은이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이와 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남로당을 구축하였으며, 대구 10월 폭동과 여순반란사건 등을 배후 조종하였고, 북한으로 넘어가서는 제1대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6.25 전쟁 이후 미제 간첩’ 등의 혐의로 처형당했던 바,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정치가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 박헌영의 편린 역시 길상사에 남아 있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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