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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견의 몽유도원도 &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9. 24. 23:58

     

    1447년 정묘년의 어느 늦은 봄날, 비해당(匪懈堂, 서촌 안평대군의 집) 마당의 꽃 감상을 하던 안평대군이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깊은 산속에 난 길을 따라 헤매는 꿈이었는데, 그는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복사꽃 만발한 동산을 만났다. 동양의 신선사상에서 이상향으로 꼽던 이른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안평대군은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에 감격하며 노닐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잠이 깨었다.

     

    너무도 아쉬웠던 안평대군은 화공(畵工) 안견(安堅)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방금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네. 구름과 안개 서린 선계(仙界)와도 같은 신비한 계곡을 구불구불 돌아 만난 아름다운 도원이었어. 나는 그 도원에 취해 노닐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금방 잠이 깨고 말았네. 내가 자네를 부른 건, 꿈이 잊히기 전 그 광경을 그림으로 남기기 위해서라네. 그대가 내 꿈을 좀 그려줘야겠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평소 예술에 관심이 깊어 '시·서·화'에 고루 능했으며 가야금 연주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書)에 뛰어나 그의 글씨는 중국에까지 이름이 높았다. 그리하여 중국사신들에게 "조맹부 (趙孟頫)*를 이었으되 조맹부보다도 뛰어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그 솜씨는 더 이상 평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실제로 <연려실기술>에는 북경에 간 조선사신들이 좋은 글씨를 찾으면 중국인들이 오히려 "당신네 나라에 제일필(第一筆, 안평대군)이 있거늘 어째서 멀리서 찾느냐?"고 되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 조맹부는(1254~1322년)는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겸 서예가로, 특히 그의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로 불리며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 안평대군은 조선 중기의 한호(韓濩, 한석봉)과 더불어 조선 2대 명필로 불리며, 한호, 양사언, 자암 김구와 더불어 조선 4대 명필로 꼽히기도 한다.

     

     

    안평대군의 글씨 /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의 부분

     

    당대의 이름난 화가였던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이 잊힐새라 꿈에 대해 조금 더 물었고, 그 즉시로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 사흘을 머물며 아래의 대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완성했다. 사흘 후 그림을 마주한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 속에서 본 것과 정말로 흡사하다며 크게 기뻐했고, 자신과 친한 사람들을 불러 그림을 보여주며 감상평을 부탁했다. 

     

    그 그림을 본 사람 중 23명이 찬문(撰文)을 썼다. 김종서(金宗瑞)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정인지(鄭麟趾) 박영(朴英) 서거정(徐巨正) 김수온(金守溫)  이현로(李賢老)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로,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그림의 소장에 머물지 않고 4년 후 그림 속의 무릉도원과 비슷한 장소를 찾아내 집을 짓고 무계정사(武溪精舍)라 이름 붙였다.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이야기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린 몽유도원도 / 세로 38.7cm, 가로 106.5cm의 그림으로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 소장품이다.
    그림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지니 왼쪽의 평범한 인간세상에서부터 시작해 구불구불 기암괴석의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절벽 아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본인이 흰색으로 표시한 길)
    그리고 동굴을 빠져나와 더욱 좁아진 길을 따라 올라 폭포수 위 다리를 건너게 되면 드디어 무릉도원에 이른다. (흰색 화살표)
    이곳이 안평대군이 놀았다는 도원이다.
    그림에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직접 쓴 발문과 집현전 학자와 문사 등, 23명이 쓴 찬문(撰文)이 붙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 20m의 두루말이에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을 노닌 그림'이라는 표제를 썼다.
    2009년 국내 전시 때의 몽유도원도 /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사용할 때와, 1996년 호암미술관에서 전시된 적이 있으며, 2009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가 있었다.
    2009년 전시 때 줄을 선 관람객 / 이때 9일간의 전시에 하루 평균 만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고 이에 박물관 측은 관람시간을 1분으로 제한했다. 1분 관람을 위해 서너 시간 줄을 서야 했지만 이들은 마지막 안복(眼福)을 누린 분들이다. 이후 덴리대학은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더 이상 진본 전시를 안 한다고 선언했다.
    이이남 작가가 디지털 기술로 복원한 몽유도원도

     

    무계정사는 '무릉계곡과 같은 곳을 택정해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안평대군은 무계정사를 마련한 후 매우 흡족해 했다고 성현은 덧붙였다. 이개(李塏, 1417~1456)가 쓴 '무계정사기(武溪精舍記)'에는 안평대군의 기쁨이 한층 더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일찍이 도원에서 노는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여기는 꿈속의 그 도원과 너무도 흡사하다. 어쩌면 조물주가 내게 택정해 준 땅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간 천 년 동안이나 감춰 두었던 곳을 하루아침에 드러내 기어이 나에게 돌아오게 하다니.... 내가 이곳을 좋아함은 신선이 되고자 함이 아니니, 그저 산에 마음이 끌리면 언덕에 올라 조용히 휘파람을 불고, 물에 끌리면 냇가에서 시를 읊으며, 하늘의 도를 거역하지 않고 근본을 지켜 온유하게 살려 함이로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고 장만한 집이건만 안평대군은 그곳에서 채 2년도 살지 못했다. 1453년 계유년의 봄날, 저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피바람에 불며 모든 것이 쓸려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몽유도원도의 찬문이 한명회의 데스노트인 살생부(殺生簿)에 옮겨졌던 것일까? 찬문을 쓴 사람 중 신숙주를 비롯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거목 김종서도 쓰러졌고, 단종 복위를 기도했던 이른바 사육신도 훗날 모두 도륙되었다. 안평대군 역시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아직은 젊은 35세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싸운 이유 / 이들은 4대왕 문종의 첫째, 둘째 동생이다. 그런데 문종이 즉위 2년만에 죽고 겨우 10살인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삼촌들이 침을 흘리게 된 것이다. 모후가 있으면 감히 그렇지 못했으려만 단종은 불행히도 생모도 양모도 없었다.
    무계정사에 관한 복잡한 사진 / 안평대군이 살던 부암동 무계정사 터에 지어진 집이나 안평대군과는 무관하다. 2017년 한국문화유산진흥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퇴락해 무너진 서까래가 눈길을 끈다.
    무계정사 터는 1974년 1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무계동' 각자는 안평대군의 글씨라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담장 안에 갇혔다.
    지난 2015년 무계정사지 11,000㎡가 경매에 나온 후 유찰을 거듭하다 결국 34억 100만원에 낙찰되었다. 이후 위의 한옥도 새로 지어지고 나무도 새로 심어졌다. 물론 그 새 집을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은 개인 집이기 때문이다.
    무계정사 터 바로 아래 위치한 빙허 현진건의 집 터도 경매에 나오며 빙허의 흔적은 표석으로만 남았다.
    현진건 집 터 표석 / 빙허는 무계정사 터에 집을 짓고 산 셈이다.
    2002년 철거되기 전의 현진건 집
    현진건 집 터에서 만난 그리 멀리 않은 과거
    그래도 이 팻말 덕분에 동네 분위기는 아취가 남아 있다.
    안평대군과 현진건이 보았을 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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