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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포의 정자 별영창 읍청루, 담담정 & 남호독서당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9. 27. 22:42

     

    말이 나온 김에 또 하나의 안평대군 흔적을 찾아 나섰다. 마포에 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담담정(淡淡亭)이다. 담담정은 안평대군이 근방의 풍광에 반해 지은 정자로, 작명(作名)에 고민함 없이 '맑고 맑은 정자'라 이름 붙였다. 그 아래로 보이는 남호(南湖)의 물결은 그만큼 맑았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비치했고 시문을 좋아하는 선비를 불러 모아 자주 시회(詩會)를 열었다.  

     

     

    조선후기 화가 김석신이 그린 '담담정' / 가운데 강에 연접한 정자가 읍청루이고 왼쪽 절벽 위의 집이 담담정이다.

     

    담담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위치는 알 수 있으니,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이락정집(二樂亭集)> 등의 문헌에 언급이 있는데, 특히 <이락정집>에서는 담담정의 위치를 '烏石岡晩眺 岡在讀書堂西百步許淡淡亭東北'이라고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 즉 담담정의 위치는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 있던 별영창 읍청루의 서쪽 백 보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인데, 읍청루(揖淸樓)는 1860년대에 그린 김정호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서 그 장소를 찾을 수 있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
    우연찮게도 국토교통부 관계자가 <경조오부도>에서의 읍청루의 글자를 정확히 짚고 있다. / 2020년 용산공원 사전 설명회 사진
    마포에서 사라진 또 하나의 정자 별영창 읍청루 / 정조는 즉위년인 1777년 과거 남호독서당 자리에 정자를 짓고 읍청루라 이름하였다.
    읍청루가 있던 벼랑 위에는 현재 마포타워가 서 있다.

     

    지금은 이 읍청루 또한 사라졌지만 사진까지 명확한 마당이라 그 위치는 진작에 밝혀졌다. 그곳의 옛 지명은 벼랑창 고개, 혹은 벼랑고개로서 필시 별영창(別營倉)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일제시대에 청암동이 되었으며, 청암동 마루턱 현대오일뱅크 주유소 곁에 2018년에 설치된 '별영창 읍청루'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별영창은 훈련도감 군병의 급료를 지급하였던 곳이다. 읍청루는 별영창에 딸린 누각으로 한강 조망이 뛰어났다. 1934년 마포로 가는 도로를 만들면서 지형이 바뀌고 건물도 사라졌다.  

     

     

    별영창 읍청루 표지판
    표지판 주변
    읍청루 터에서 본 한강


    별영창 읍청루를 찾았으니 담담정을 찾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다. 서쪽으로 백 보 정도를 걸으면 되는 것이다. 그곳에도 표석이 서 있었는데, 위치는 아마도 위의 <이락정집> '독서당록의 내용을 근거로 비정했으리라. 옛날에는 직선거리라 백 보 정도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더 걸리는 듯하다. 다만 풍광만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다른 정자 자리들은 죄 아파트에 막혀 전망을 잃었는데 여기는 확 트였다는 뜻이다. 마포구 마포동 419-1 벽산빌라 앞 담담정 표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동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담담정 표석
    담담정 위치에 내려다본 한강 / 바로 옆 까페 I O U 정원에서 본 풍경이다.
    이곳 정원에서 보는 한강이 일품이다.

     

    무계정사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는 안평대군이 담담정을 지은 이야기도 실려 있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은 …… 성격이 부탄(浮誕)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경승(景勝)을 즐겨 북문(北門) 밖에다 무이정사(武夷情舍)를 지었으며, 또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만 권의 책을 모아두었다. 문사(文士)를 불러모아 12경시(景詩)를 지었으며, 48영(詠)을 지어 등불 밑에서 이야기하고 달밤에 배를 띄웠으며, 연구(聯句)를 짓고 바둑, 장기를 두는 등 풍류가 끊이지 않았고, 항상 술을 마시며 놀았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말한 무계정사(武溪精舍=무이정사)와 마찬가지로 단죄의 빌미가 되었으니, <연려실기술>에는 "안평이 다른 다른 뜻이 있어 무계정사를 짓고, 또 담담정에서 김종서 등과 교류한 것을 죄목을 삼았다"고 기술돼 있다. 그리하여 결국 담담정 또한 파국의 장소가 되었는데, 1453년 계유정난 당해에 파괴된 무계정사와 달리 세조는 훗날 이곳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다.

     

    그 혼돈의 정국을 세조 때의 학자 이극감(李克堪)은 '담당정'이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서쪽으로 지는 해,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

    그 아득한 강과 산은 끝없는 근심을 불러오누나 

    그러나 하늘과 땅은 유한하고 나 또한 늙어가니

    이 몸은 그저 백구(흰 비둘기) 나는 모래밭에 묻혀 살고 싶구나 

     

    夕陽西下水東流

    渺渺江山無限愁  

    天地有窮吾亦老 

    此身從付白鷗洲 

     

     

    이미지 사진

     

    시와 부,(賦) 소설(용부전·庸夫傳)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했던 문학천재 진일재(眞逸齋) 성간(成侃, 1427~1456)은 '마포야우탄(麻浦夜雨嘆, 마포에 내리는 밤비를 탄식함)이라는 시에서 당시의 시국에 관한 더욱 리얼한 묘사를 하고 있다. 현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필화(筆禍) 사건이 될 법한 내용이나 그는 천재답게(?) 일찍 죽었다. 성간은 위에서 언급된 성현의 형이기도 하다.   

     

     

    검은 구름 한 조각 푸른 하늘 밑에 떠 있고 
    가끔씩 외로운 학 울음소리 멀리 물가에 맴돈다  
    밤이 들면 나루터에 남풍 몰아치고
    서강의 물은 솟구쳐 비를 만든다


    철없는 어린 고기들은 떴다 잠겼다 하며 입질을 해대는데

    물귀신은 물결을 부르고 혼령은 춤을 춘다

    강의 섬들을 함께 싸안아 태초로 돌아가려는 겐가

    누각 위의  서늘한 기운 더위를 남김없이 거두누나  

     

    강 기러기 어지러이 날며 시끄럽게 울어대며

    수초더미는 바람과 물결 따라 어지러히 흔들린다

    닻줄 놓친 늙은 어부는 강가에서 소리치고

    큰 배는 기울고 작은 배는 표류해 떠다닌다

     

    인간사 어디건 위험하지 않은 곳 없겠지만

    별안간 닥친 사람 인생 예측하기 힘들도다

    낭간군자(작자를 지징함) 한바탕 웃었건만

    한밤에 잠 못 이뤄 머리가 학처럼 기울었다

     

    黑雲一片低青天 
    時聞獨鶴嗚遠渚 
    夜來渡口南風顚 
    倒捲西江作飛雨 
    魚兒出沒爭噞喁 
    馮夷鼓浪神靈舞 
    勢包島嶼歸洪濛 
    涼生軒戶收餘暑 
    江鴻搖蕩聲嗷嘈 
    菱荷歷亂隨風濤 
    漁翁失䌫叫江湖 
    大船傾側小舶飄 
    人間何處非至險 
    俄頃生涯臨不測 
    琅玕君子笑一場 
    半夜不眠頭鶴側 

     

     

    읍청루 도로 위 남호독서당 터 / 독서당(讀書堂)은 사가독서(賜暇讀書)에서 유래했다.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는 제도로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실시한 것이 효시이다.
    남호독서당 터에서 본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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