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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항문학가 풍류시인 정수동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0. 13. 08:37

     

    위항문학(委巷文學)은 17세기 말에 성립되어 구한말까지 이어져 온 중인계급의 문학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위항(委巷)은 '구불구불한 골목'이란 뜻이니 그 같은 골목길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시·시조·가사 등을 읊었던 것 같다. 위항문학은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하는데 여염집 사람들의 문학이라는 소리이니 두 단어는 같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서울 서촌에 살던 중인계급 사람들의 문학활동을 말한다.

     

    위항문학가들의 문집은 60여 권이 전해지며  조수삼의 <추재집> 같은 문집은 제법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 위항문학가 중에서 역관 출신의 홍세태, 이언진, 이상적, 정지윤 등은 이름이 알려진 편으로, 저 유명한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에게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또 규장각 출신의 문사(文士)들인 천수경, 장혼, 박윤묵, 유재건 등도 위항문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들 위항문학가들의 모임은 개화기까지 거의 250년이나 이어져 왔으나 사실 우리에게는 생소한데, 오히려 그들 모임을 그린 그림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와 이인문의 '송석원시사회도'가 유명한데, 두 그림 모두 송석원에서의 위항문학가들의 모임을 그렸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 /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가 정조15년(1791) 유둣날 저녁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 모인 위항문학가들을 그렸다.
    이인문의 '송석원시사회도' / 송석원 시 모임을 그린 그림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으나 왼쪽 바위 아래 '송석원' 글자가 뚜렸하다.

     

    송석원(松石園)은 서촌의 문인 천수경의 집이었다. 서촌 계곡의 경치 좋은 장소에서 열리는 이 시 모임은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혹은 옥계시사(玉溪詩社)로 불렸다. 석원시사는 문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듯, 위항문학가의 시를 상설 전시하고 있는 서촌 옥인변전소 담벼락에는 병으로 인해 시사에 참석하지 못한 차좌일이 못내 아쉬움에 읊었다는 시가 '차좌일의 통곡'이라는 제목으로 걸려 있기도 하다.

     

     

    차좌일의 시
    위항문학에 대해 안내한 옥인변전소 담장
    서촌 옥인변전소
    문 옆의 또 다른 안내문
    서촌 난개발 중 사라진 추사 김정희의 '송석원' 암각서
    옥인동 송석원 터 표석
    송석원 자리에는 일제시대 친일파 윤덕영의 호화주택 벽수산장이 있었다.
    송석원 지에서 본 백악산

     

    송석원시사 이후로도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서원시사(西園詩社)·직하시사(稷下詩社) 등으로 위항문학가의 문학활동이 이어졌다. 19세기에는 장지완(張之琬 1806~1858)이 좌장으로 있던 비연시사(斐然詩社)가 유명한데, 그 시절의 주목할만한 시인으로 하원(夏園) 정수동(鄭壽銅, 1808~1858)을 들 수 있다. 하원은 우리에게는 풍자와 해학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정수동은 서촌의 전형적인 중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왜어(일본어)역관이었다. 그 역시 사역원 역관을 지내 한때는 홍세태·이언진·이상적과 함께 '역관사가'(譯官四家)로 불리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세상을 자유로이 떠돌았다. 그럼에도 그의 재주를 아낀 안동김문의 김흥근을 비롯한 김정희, 조두순, 남병철 같은 명망가들이 그를 곁에 두고 도움을 주려 했으나 그는 불의(不義)한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아래의 시에는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나타나 있다. 

     

    疎狂見矣謹嚴休 

    只合藏名死酒褸 

    兒生便哭君知不 

    兒生便哭君知不

     

    세상이 미쳤는데 근엄할 게 무엔가

    이름을 감추고 술이나 마시다 죽지

    아이가 태어날 때 왜 우는지 아는가

    세상 근심 끝이 없어 그러는 거라네

     

    당시는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헌종·철종시대로, 세상은 매관매직으로 크게 부패한 상태였다. 그는 그와 같은 세태를 한탄하며 권세가들을 힘껏 조롱하였던 바, 그에 관한 여러 일화가 전한다. 아래 일화는 생소하나 무척 재미있다.  

     

    어느 날 정수동이 양반들의 연회석에 불청객으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자기들끼리만 술잔을 돌리며 떠들었다. 그럼에도 정수동은 개의치 않고 중간에 끼어 앉아 남들에게 건네지는 술을 계속 가로채 마셨다. 참다못한 한 양반이 곁에 앉은 정수동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러자 정수동이 곧바로 제 옆에 앉은 다른 양반의 뺨을 냅다 후렸렸다. 당한 양반이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자 정수동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돌림 뺨때리기 놀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는 나를 때릴 일이 없지 않냐는 능청이었다. 

     

    정수동은 김삿갓처럼 천하를 주유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하원시초(夏園詩秒)>에 103수가 전한다. 세상을 떠돌던 그는 나이 50세가 되던 철종 9년(1858) 2월, 만취 상태로 영의정 김흥근을 찾아와 그의 사랑채에서 자다 죽었다. 가족들은 장사 치를 돈이 없어 흥근의 아들 김병덕이 마련해 준 돈으로 불광천에 장지를 마련해 묻었다.  <하원시초>는 그의 친구인  최성환이 세상에 떠도는 그의 시를 수습하여 간행한 시집이라고 한다. 그 안에 실린 아래의 '곡아'(哭兒: 아이의 죽음을 곡함)라는 시는 그의 대표작처럼 소개된다. 

     

     

    <하원시초>

     

    無限他時門戶計

    一朝携去付荒厓 

    爾爺荷鍤平生事

    尙得人間未見埋

    寸錦曾無裹汝肌

    淚痕藥跡病時衣 

    十年慟煞貧家子

    復使壤泉藍縷歸

    未必聰明勝闒茸

     何嘗喜汝就冬烘

    辛勤識字將何用

    空有塗鴉壁上蹤

     

    언제나 집안 살림 계책 끝도 없어 
    하루아침 떠나니 험한 언덕에 묻네 
    네 아비 평생 술이나 마시고 다녔더니 
    그래도 사람으로 시신 묻는 건 못 봤네 
    비단 한 조각 없이 네 몸을 감싸니 
    아플 때 약에 얼룩진 옷에 눈물이 주루룩 
    열 살 급살에 가난한 집 자식이라 
    저승서 남루하다 돌려 보내진 않을까 
    총명하진 못해도 모자라진 않았는데 
    어찌 우둔한 내게 보내 기쁘게 했을까
    어렵사리 글자 깨쳐 무슨 소용 있는가 
    벽 위 삐뚤삐뚤 부질없이 남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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