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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선대원군이 붙잡혀간 동관왕묘(동묘)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10. 23. 01:21

     

    보수 공사 중인 동묘
    동묘의 관우상

     

    구한말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에 밀린 구식군대에 대한 푸대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구식군대는 녹봉까지 밀렸고 겨우 받은 녹봉미에는 겨와 모래가 잔뜩 섞여 있었던 바, 훈련도감 군인들을 주축으로 한 폭동이 일어났다. 1882년 임오년 6월 5일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그것이다. 이 군란(軍亂)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다룬 적이 있기에 앞서의 포스팅 가운데 개중 축약된 '오욕의 땅 이태원과 임오군란'의 내용을 보충해 싣기로 하겠다.

     

    1882년 임오년에 조선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한 해 전인 1881년 고종은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겠다며 별기군이라는 신식 부대를 창설했다. 훈련은 초빙된 일본인 교관이 맡았다. 그러자 훈련도감을 비롯한 과거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 군인들은 자연히 푸대접을 받게 되었던 바, 이에 반발하여 군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쿠데타는 성공하여 정권은 다시 흥선대원군에게 돌아갔다. 구식군대 군인들이 민왕후와 그 척족에게 밀려 뒷방 늙은이로 나앉은 흥선대원군을 추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원군에게는 다시 한번 광명이 도래하였으니 곧 복고 바람을 일으켜 별기군을 혁파하고 5군영 체제로 되돌아갔다. 중국식 군제를 모방해 만든 통리기무아문 또한 폐지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말하자면 조선판 앙시앵레짐이었다. 

     

     

    삼군부 총무당
    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의 중심 건물로서,
    삼군부 해체 후 통리기무아문 청사, 대한제국 시위대 청사로 쓰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사령부로 사용되다 1930년에 성북구 삼선동으로 이건됐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3년 서울 광화문 앞 육조거리 모습 / 왼쪽 삼군부와 오른쪽 의정부 건물이 그대로 있다. 삼군부 터에는 현재 정부종합청사가 자리한다.

     

    그러나 그 광명은 아주 잠깐, 근왕파였던 어윤중이 천진에 있는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조선 국왕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면서부터 사정이 급변했다. 정여창은 북양대신 직무대리 장수성에게 들은 바를 보고했고, 장수성은 사태를 진압하라는 명령과 함께 오장경을 사령으로 하는 등주(登州) 병력 3천 명을 파병시켰다. 

     

    7월 7일 경기도 남양만 마산포(화성시 송산면 고포리)에 상륙한 오장경은 한양으로 올라와 동대문 밖 관우 사당 동관왕묘(동묘)에 사령부를 차렸다. 그리고 7월 13일 고종을 알현하고, 이어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흥선대원군 또한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동묘의 청군 사령부를 찾아갔는데,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동묘의 언급이 없고, 또 답례로 간 것이 아니라 마건충 등이 초대해 할 수 없이 갔다고 돼 있지만, 그 내용이 세세한 바, 옮겨 적기로 하겠다. 

     

    마건충 등이 대원군을 초대했다. 대원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찾아가자 여러 장수들이 매우 정성껏 맞아 주었다. 두 번째 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 다시 초대받자 대원군이 아무 걱정 없이 수레를 준비하라고 명했는데, 정현덕이 말렸다.

     

    "이번에 가시면 분명 돌아오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듣지 않았다. 청군 진영 제1문에 이르자 수레에서 내리게 했다. 제2문에서는 따라온 자들을 막았다. 전날과 달리 변이 생긴 것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건충이 대원군을 결박하라 호령하더니 밀랍덩이로 그의 입을 막아 소리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가마에 태워 힘세고 날쌘 장정 한 패로 하여금 교대로 들게 하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번개처럼 동작나루를 건너 마산포에 이르자 재빨리 떠났다.

     

    시종들이 군영 밖에 있다가 대원군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묻자, 태공과 긴급히 타협할 일이 있어 오늘은 군영에서 묶고 내일 돌아갈 것이라고 거짓으로 답했다. 그리고 이튿날 숭례문에 방을 붙여 서울 백성들에게 알렸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태공이 왕후 시해 사건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리기 힘들어 황제가 물어보고자 하여 어제의 일이 생겼다. 일이 밝혀지면 곧 돌려보내겠다." (이상 허경진 역 <매천야록>에서 발췌)

     

     

    대원군 피랍을 주도한 마건충

     

    하지만 곧 돌려보내겠다는 대원군은 이후 3년 2개월 동안 천진 보정부(保定府)의 행정관청인 청하도서(清河道署)에서 구금 생활을 해야 했다. 대원군은 9월 1일 밤 남양만 마산포에서 청나라 군함 등영주에 강제로 태워졌고, 그 순간 33일간의 천하는 끝이 났다. 이후 그는 뱃멀미에 시달리며 중국 천진으로 가야 했고, 천진에 내려서는 북양함대의 청사인 영무처(營務處)로 끌려 가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의 군란을 사주했다는 죄로 감사안치(減死安置, 사형을 대신한 유배)형에 처해졌다. 

     

     

    대원군을 태우고 간 1258t 군함 등영주

     

    이후 대원군은 이홍장의 직례(直隷) 총독부가 있는 천진으로 끌려가 (당시 이홍장은 북양대신과 직례총독을 겸하고 있었다) 보정부의 한 건물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서울에는 오장경과 원세개 등이 이끄는 청군이 상주하게 됐고, 5백년 조선 역사에 전례 없던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제거시켜준 대한 공에 대한 보상이었으니 고종은 스스로 호구가 되기를 자청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일부가 남아 있는 천진 보정부 청사
    지금은 박물관이 된 직례총독부 청사
    천진에서 찍은 대원군의 사진 / 오른쪽에 '고려국 대원군 광서 4년'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또한 한편으로는 임오군란 때 피해를 본 일본에 대한 보상도 해줘야 했는데, 피해보상금으로 유족에게 5만엔, 일본 정부에 50만엔 도합 55만엔을 주기로 했다. 이 액수는 조선 정부 1년 예산의 1/3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던 바, 당장에 돈이 없던 조선은 일본에서 차관을 빌려 일본에 지불하는 우스꽝스럽고도 어이없는 절차를 치러야 했는데, 물론 이자 또한 지불해야 했다. 여러가지로 망조에 들어선 조선의 임오년이었다.  

     

    대원군이 피체된 역사의 장소에서는 당시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오장경의 현판 글씨가 걸려 있다. 기타 오조유, 황사림 같은 하급 군관들의 글씨도 볼 수 있는데, 조선에서의 횡포를 그 글씨들이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홍장이 외교고문의 이름으로 파견한 마건충의 내정간섭이었으니, 대원군을 붙잡아간 바로 그 자였다. 그 당시 마건충이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제작했는가, 안 했는가, 그 여부가 최근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바로 아래 프로그램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중국에서는 마건충이 제작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다. 다음 회에서는 그 문제를 한번 짚어보자.

     

     

    중국의 한 퀴즈 프로에 "한국의 국기를 만든 중국 외교관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출연자는 "마젠중(마건충)"이라고 했고, "정답"이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동문조도> 속의 동묘(●) / 1746년 무렵의 그림으로 흥인지문과 오간수문, 목멱산과 낙산 등이 보인다.
    단장된 동묘 중문 / 3년간의 오랜 보수 공사를 마치고 올해 초 재개장했다.
    동묘 정전 /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의 압력으로 1599년 관왕묘 공사를 시작하여 1601년 완공하였다. (보물 제142호)
    동묘 정전 내의 관우상 / 구리 4천 근(약 2.4 t)을 녹여 만든 후 금도금한 높이 2.5 m 미터의 금동좌상으로 1601년 제작된 수작(秀作)이다. 입구에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라는 영조 임금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정전의 우편 / 정면은 5칸, 측면은 6칸으로 정면보다 측면이 긴 구조와 조적조 벽체가 전형적인 중국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정전의 좌편 / 지붕은 높은 '정(丁)' 자 모양과 '일(一)'자 모양이 합쳐진 '공(工)'자 모양이다.
    정전의 뒷편
    정전 앞 석등 / 1888년 10월에 제작돼 북관왕묘에 놓였던 석등이나 북묘가 폐정되며 동묘로 옮겨 왔다.
    1912년 <한국건축조사보고>에 수록된 동묘 석등 / 석등 위에 놓인 철제 램프가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준다. 램프는 전하지 않는다.
    동묘 서쪽 회랑 위에 걸린 오장경의 글씨 / 임오군란 당시 이곳에 주둔했던 청군 사령관 오장경의 '유청집희' 현판이 걸려 있다. 시경이 나오는 말로 '맑고 밝게 이어진다'는 뜻이다.
    위 현판이 걸린 곳 / 그밖에도 청나라 하급군관과 중국사신 등이 쓴 현판과 주련이 40개 가까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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