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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KARF)를 이끌던 시인 임화작가의 고향 2022. 8. 14. 06:31
예전 학교 다닐 때 과거의 시인들을 거론하다 보면 꼭 튀어나오는 '카프'(KARF)라는 단어가 있었다. '카프'는 1928년 결성된 조선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영문 이니셜로, 요즘 말로 하자면 좌빨 문학인 단체명이다. 그래서 '카프'는 대한민국 문학사에 있어서는 꼭 따라다니는 문학집단이었지만 그저 앞과 같이 단어의 해석으로 만족해야지 더 이상 깊게 들어가면 골치 아픈 일이 따를 수도 있었다. 붙잡혀 갔다 풀려나면 다행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박정만 시인 같은 경우이다.
박정만은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고문 후유증과 당시 겪은 충격을 술로 달래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를 썼다. 제목이자 본문인 단 2행 뿐인 시로, 말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토로했다. '한수산 필화사건'은 1981년 5월 중앙일보 연재 중이던 소설 '욕망의 거리'의 내용이 문제 돼 작가 한수산을 비롯해 중앙일보 권영빈 편집위원, 도서출판 고려원 편집부장 겸 시인 박정만 등 6명이 보안사로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한수산은 혹독한 고문에 시인 박정만의 이름을 꺼냈다. 소설 속 문장을 껀수 삼아 조진 사건이니 한수산도 영문을 모르고 당한 셈이나 가담자를 대라는 보안사 군인들의 고문에 못 이긴 한수산은 박정만의 이름을 댔다. 출판사 편집부장으로, 시를 벗 삼아 털어도 먼지 안 날 정도로 깨끗한 삶을 산 사람이기에 설마 그에게 무슨 일이 있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박정만 역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갔고 불문곡직 집단구타와 물고문 등을 당하다 혐의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박정만은 몇 년 후 사망했다.
임화(林和)는 서울 낙산(駱山) 아래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25년에 집안의 파산과 심리적 갈등으로 중퇴한 뒤 가출했다. 1926년 무렵부터 영화와 연극에 관심을 가지면서 수려한 외모로 영화 <유랑>, <혼가>에서 주연으로 출현했고, 한편으로는 다다이즘 경향의 시, 수필을 발표했다. 그는 1929년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같은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며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는 시인이 됐다.
두 시는 모두 계급적 선동성이 짙은데 개중 완곡한 '네거리의 순이'를 보자.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 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밥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 안아 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 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 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그는 시인뿐만 아니라 비평가로도 활동하며 유명세를 얻었는데, 더불어 연극과 영화 연기자로서 활약했다. 그리하여 그는 재주 많다는 의미에서 '조선의 랭보', 흰 피부에 잘 생긴 외모로서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사상은 빨갰으니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적극적 프롤레타리아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년 동안 일본 유학을 다녀온 1931년 제1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3개월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에는 카프의 일원으로 더욱 좌편향적인 활동에 나서며 볼셰비키 문학사상을 견인했다.
임화는 1932년, 당 24세의 나이에 윤기정의 후임으로 카프 서기장이 되며 카프 제2세대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1934년 일제에 의한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이 일어나며 다시 구속되었다. 이후 폐결핵으로 풀려난 후 1935년 5월 김기진, 김남천과 함께 경기도경찰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며 10년간의 카프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요양차 마산으로 내려갔다가 지방 문학인 이현욱과 만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는 1931년 카프 서기장 이북만의 누이동생 이귀례와 결혼한 바 있다)
이현욱은 임화와 결혼한 후 백철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지운하(池河運)라는 이름의 작가로 활동했고, 임화는 이 무렵 '다시 네거리에서', '바다의 찬가', 그리고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장시 '현해탄' 등의 시작품을 발표하고, '조선신문학사', '신문학사의 방법론' 등 문학사에 관련된 글을 집필했다. 그리고 즈음해서 좌빨의 거두 박헌영을 만나 의기투합한다.
해방 후 임화는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나서고, 김남천·이원조·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했다. 그리고 자신의 단체가 이기영·한설야·안막 등이 조직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과 대립하자 1946년 2월 박헌영의 지시로 두 단체를 통합시켰다.
그는 1946년 월북한 이태준에 이어 1947년 아내 지운하와 함께 월북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김일성이 남로당계 인사들을 숙청하면서 그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 스파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그는 뒤늦게 감옥에서 김일성 찬양시 2편을 썼으나 별 소용이 없었고, 이후 여러 가지 자괴감에 시달리던 그는 끼고 있던 안경을 부숴 깨진 안경알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고 빈사의 상태에서 끌려 가 총살을 당하는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는데, 시신도 거두는 자가 없어 버려졌다. 아내 지하련은 남편의 처형 소식을 듣고 평양에 와 남편의 시체를 찾았으나 종래 찾지 못했고, 결국은 실성해 평양 시내를 헤매다가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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