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북동의 글쟁이 독립투사 김광섭작가의 고향 2022. 8. 30. 04:00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와 '저녁에'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이다. '성북동 비둘기'가 익숙한 것은 그것이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에'라는 시는 제목을 들어서는 잘 모를 수도 있겠으나 본문을 보면 바로 어떤 시인가를 알 수 있다. 과거 유심초라는 듀오 가수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분들이 벌써 70순이라 하니 세월 참 빠르다 하는 말밖에.....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전문
그런데 이 시는 사실 김환기 화백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당대의 중견화가로서 홍익대 미대 교수를 지냈던 수화(樹話) 김환기는 1965년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돌연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해 상파울루 비엔날레 회화 부분에서의 수상을 계기로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사고무친한 뉴욕으로 간 것인데, 어느 날 이산(怡山) 김광섭이 그리움을 담은 위의 짧은 편지를 보내게 된다.
1969년 12월 이산이 보내온 ‘저녁에’를 읽은 수화는 그 순간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 우주 속에서 너무도 미미한 존재인 인간과 그 인간들의 소중한 만남'이라는 주제로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대작 그림을 완성시킨다. 위대한 작가에 대한 화가의 위대한 화답과도 같은 이 작품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현실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 수화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74년 뉴욕의 한 병원에서 6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김광섭 시인이 생전에 살던 성북동 집을 주소 하나만을 가지고 찾아 나섰다. 성북동 168-34. 이것이 시인의 집 주소다. 요즘은 GPS가 잘 발달돼 있어 주소만 있으면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김광섭의 집은 1962년 본인의 여생을 위해 사들인 북정마을 산기슭 60평의 대지에 당대의 유명 건축가 김중업이 3미터의 축대를 쌓아 지은 집이라고 하니(성북 구립도서관 블로그 / 성북구청 공식 블로그) 더욱 찾기가 쉬울 것이었다. 그리고 김중업이 언덕 위에 지은 집이라니 자못 기대도 되었다.
그러나 막상 북정마을 언덕배기 위의 그의 집을 찾았을 때, 한마디로 '깼다.' 주소는 분명 정확하건만 그 지번에는 원익 스카이빌이라는 5층 다세대 주택이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한 규모의 다세대 주택만 보일 뿐 김광섭의 집이라고 여겨지는 건물은 없었다. (그때 우연찮게 비둘기 한 마리가 내 앞에 날아와 앉았다) 아무튼 허탈한 마음으로 성북동 168-34의 동판 명패가 뚜렷한 원익 스카이빌을 찍었는데, 그 건물을 소개하기 전 성북구청 공식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옛 집과 글을 보자.
이 사진을 찍을 때 허탈하고도 참담했다. 김광섭 시인의 집이라서가 아니라, 또 그 집을 김중업이 지어서가 아니라, 성북동에 있던 독립운동가의 자취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다. 그래서 초기의 시는 경향성도 강하였던 바, '동경'(憧憬)과 '초추'(初秋) 등은 만주사변을 배경으로 한 지식인의 니힐리즘을 문학적으로 묘사했다. 아닌 게 아니라 '동경'에서는 허무주의가 뚝뚝 떨어진다.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 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이
만상(萬象)에 식들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천주의자였으니 총이 아닌 펜을 들고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세상에 나섰다. 그는 중동고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을 비판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1940년 9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폐간에 즈음해서는 일제의 언론탄압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로 인해 그는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8개월의 감옥살이를 하고 (3년간을 보낸 한용운보다 더 길었다) 1944년 11월 30일 만기출옥한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좌익 문학세력의 준동에 맞서우익 문인단체를 앞장서 이끌었다. 이렇듯 그는 실천하는 문인이었다. 그러다 1964년, 그가 발행하던 문학지 <자유문학>이 경영난으로 폐간되는 등 어려움이 닥치면서 환갑이 되던 1965년 고혈압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어머니마저 이 무렵 여의였던 바, 정든 성북동 집을 팔고 미아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여러 어려움이 닥치자 살던 곳에 정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실은 경제적 문제에 봉착했던 듯하다. (그는 1977년 5월 23일 영등포구 여의도동 삼부아파트 자택에서 지병인 뇌졸중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이후 살던 집은 부동산 거래업자를 통해 건설업자에게 넘어가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선 것인데, 그것에 대해 이미 '나무신문' 등에서 주목했음에도 몰랐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광섭의 시 '산'은 필시 성북동 시절에 지었을 것이니, '나무신문'에는 그것을 증명할 만한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이 살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 쪽에 성북동 비둘기를 형상화한 김광섭의 작은 시공원이 있다는 것도 그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다 겪은 자의 초연한 관조가 빛나는 '산'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지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기어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도 되고 명산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시집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발췌
'작가의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창흡의 '갈역잡영'(葛驛雜詠)과 내설악 (0) 2022.09.08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친일파 모윤숙 (0) 2022.09.06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진 시인 박정만 (0) 2022.08.24 카프(KARF)를 이끌던 시인 임화 (2) 2022.08.14 주검으로 전한 여류시인 이옥봉의 러브레터 (0) 2022.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