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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친일파 모윤숙
    작가의 고향 2022. 9. 6. 23:28

       

    모윤숙은 일제시대 말기부터 대한민국 근·현대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여류시인이자 문필가로서, 과거 국어교과서에는 대표작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외교·여성운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직함 또한 다양했고 화려했다. <다음백과>에서 간추린 이력만도 아래와  같다.  

     

    1950년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1954년 한국 펜클럽 부회장, 1955년 서울대학교 강사 및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7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총회 한국대표, 1958년 아시아 여성단체연합회 총회 한국대표, 1962년 여성단체협의회 이사, 1969년 여류문인협회 회장, 1970년 국제 펜클럽 서울대회 준비위원장 등을 지냈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73년 한국현대시협회 회장, 1974년 통일원 고문, 1977년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등을 역임했다. <다음백과>

     

     

    모윤숙(毛允淑, 1910~1990)

     

    그는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영어실력을 앞세워 국제정치 무대에서 섰으니 1948년 제3차 UN 총회 한국 대표로 참가해서 대한민국 로비스트로도 활약했다. 그리하여 1948년 당시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하던 인도의 벵갈릴 크리슈난 메논과 교제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도록 회유시켰다. 모윤숙은 이에 대해서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이 없었더라면 단독선거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따라서 이승만 박사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화자찬식의 자랑을 부끄럼도 망각한 채 늘어놓았다.

     

    당시 메논이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한 이유는 "그럴 경우 남북 분단이 고착화될 것"이라는 제3세계 지도자와 외교관으로서의 소신이었다. (결국 그 예상은 맞았다) 하지만 당시 모윤숙의 끈질긴 로비에 회유된 그는 이승만 지지 쪽으로 선회했는데, 이후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린 것은 내가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발언으로서 세간의 매리언 모(모윤숙) 몸로비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당시의 모윤숙과 메논

     

    나아가 그는 한국전쟁 중에는 이른바 '낙랑클럽'을 이끌며 (총재 김활란, 회장 모윤숙) 우익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 모윤숙에 포섭된 동문 김수임은 미군장교 베어드와 동거하다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하는 비운을 길을 걸었다. 이후 낙랑클럽을 조사한 미군 CIC측에서 '낙랑클럽은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한 이야기는 당시에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무튼 마당발 모윤숙에 관한 이야기는 불명예 쪽에 초점을 맞춰 저술된 책이 나올 정도로 풍부하나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오직 '시인으로서 일제에  부역한 일'이다. 우선 그때의 시를 한 편 보자. 

     

    어린 날개

    ㅡ 廣岡(히로오카) 少年航空兵(소년항공병)에게

     

    날아라, 맑은 하늘 사이로
    억센 가슴 힘껏 내밀어
    산에 들에 네 날개 쫙 펼쳐라.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
    아름드리 희망에 팔을 벌리고
    큰 뜻 큰 세움에 네 혼을 타올라
    바다로 광야로 날으는 곳마다
    승리의 태양이 너를 맞으리.
    고운 피에 고운 뼈에
    한번 삭여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어린 날개'는 잡지 <신시대> 1943년 12월호(제12호)에  발표된 시로,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소년항공병 출신 한국인 가미가제 특공대 이현재(李賢載, 일본명 히로오카 겐야·廣岡賢載)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이자 희생을 찬미하는 시이다. 한마디로 '악마의 시(詩)'로서, 앞서 말한 노천명의 '신익(神翼) - 마쓰이오장(松井伍長) 영전에' 및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松井伍長) 송가(頌歌)'를 뺨치는 빼어난 작품이다. (노천명과 서정주의 시에 나오는 마쓰이 오장은 가미가제 특공대로 차출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죽은 인재웅을 말함이다)

     

    모윤숙은 이 악마의 시를 필두로 <삼천리>에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지원병에게'를, <매일신보>에 전쟁 찬양시 '호산나 소남도'를 발표하고, 이후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 '내 어머니 한 말씀에', '동방의 여인들' 등의 일본군국주의 찬양시를 육·해·공군을 넘나들며 써재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앞서 말한 대로 노천명이 <매일신보>의 기자로서 생계형 부역자였다면 모윤숙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나선 적극적 친일파였다는 점 또한 부각된다.

     

    그는 이와 같은 해바라기형 향일성(向日性)으로 해방 후에는 재빨리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및 박정희 군사정부에 빌붙어 영화를 누렸다. 1950년 발표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그녀의 발 빠른 행보를 보여주는 명시(名詩) 중의 하나로서, 대한민국 신병교육대 수양록에도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90년 6월 7일 사망 후에는 대한민국 문화계 최고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되었다. 당시는 정말로 이성을 상실한 듯한 대한민국이었다.  

     

     

    고(故) 모윤숙 시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정부*

     

    다만 글은 문호(文豪)급이었으니, 일제시대 말 일월서방 출판사에서 출간한 산문시집 <렌의 애가>는 1997년 이화대자대학출판부에서 간행된 것까지 포함해 89쇄를 찍은 시대를 불문한 베스트셀러이다. 까닭에 그 시집을 읽었던 안 읽었던 그 안의 시어(詩語) 시몬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아직도.

     

    청춘의 심장을 자극시켰던 그 시집의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 앉아 밤을 새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작고 큰 별들이 떨어졌다 모였다 그 찬란한 빛들이 무궁한 저편 세상에 요란히 어른거립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는 무한한 암흑 속에 꼭 파묻혔습니다."

     

    서울 광진구 군자로 30-1 명당자리에 있던 모윤숙의 저택은 산문시집 <렌의 애가>의 인세 수입으로만 장만한 집이었다. 그곳이 명당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있을 수 없을 터, 세종대왕은 재위 14년(1432)에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화양정(華陽亭)이라 이름하였다. <주서(周書)>에 나오는 '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라는 구절의 뜻을 따서 붙인 이름으로, 회양정 앞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드넓은 말(馬) 목장에 기인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화양정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으니 그 전망이 얼마나 유려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회양정은 규모가 100여 칸이 되었던 대단히 큰 정자로서, 지금의 화양동은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지금은 회양정도, 모윤숙의 집도 사라지고 없지만 그의 집 뒤에 있던 세 그루의 느티나무와 높이 20미터, 둘레 7.5미터, 수령 700년의 느티나무는 아직 건재하다. 세종 때에도 있던 그 나무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호로, 서울에 있는 느티나무 중 유일하게 기념물로 지정된 거목이다. 

     

     

    세 그루 느티나무 앞 붉은 벽돌 연립주택 건물 자리에 모윤숙의 집이 있었다.
    화양정 터 표석
    서울특별시 기념물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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