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님은 침묵했지만 한용운은 침묵하지 않았다
    작가의 고향 2022. 9. 22. 01:08

     

    만해 (卍海)라는 특출난 호를 가진 한용운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  '님의 침묵'의 3편의 시가 실려져 시인으로서 꽤 대접을 받은 셈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시인으로 대접보다는 불의(不義)의 시대에 침묵하지 않은 독립투사에 대한 대접이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 말도 맞다. 사실 독립투사로서 그만큼 가열하게 투쟁한 사람도 드물다.

     

    일례로 그는 1905년 봄, 무장투쟁을 위해 해삼위(海參崴,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았다가 빡빡머리로 인해 변장한 일본군의 끄나풀로 오해를 받아 그곳 한인동포들에 의해 금각만(金角灣) 바닷속에 수장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를 구한 것은 항구를 순찰 중이던 러시아 경관들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만해는 진작에 동해바다 물고기 밥이 되었을 터였다.  안중근 의사를 의거를 맞아서는 다음과 같은 한시를 썼다.

     

     

    안해주 安海州

    萬斛熱血十斗膽 

    淬盡一劍霜有韜 

    霹靂忽破夜寂寞 

    鐵花亂飛秋色高 

    만 석의 뜨거운 피와 열 말의 담력으로

    단칼에 처단하는 서릿발이 보였구나.

    청천의 벽력이 밤의 적막을 깨노니

    철의 꽃 가을 하늘 높이 비산하도다.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

     

    만해는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33인, 혹은 48인의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당시 그는 다방면에서의 거침없는 활동으로 일제 첩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어찌 그리 당당한 행보를 보일 수 있는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받은 것인데, 이에 그는 스스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천하여 겨우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고성 건봉사에서 수행하던 승려였다)

     

    아래의 시 '나룻배와 행인'은 이 즈음에 쓴 시인데, 격정의 시기에 마음 또한 다스리기 힘든 격정일 텐데도 이와 같은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룻배와 행인'을 남녀 간의 안타까운 사랑이나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으려는 마음', 혹은 '구도(求道)의 길'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여기는 시험문제를 푸는 자리가 아니니 그런 구구한 해석은 불필요하다. 그저 느낀대로 여기면 될 터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미지 사진

     

    그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들 3·1독립운동 민족대표들이 붙잡혀 온 서대문형무소에서였다. 그곳에는 일경에 체포된 33인 민족대표 중 32명(기독교계 대표 김병조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이 수감되었고, 그들 민족대표들에 대한 집요한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2선 조직 17명도 잇따라 붙잡혀 수감되었다. 만해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특출난 행동으로써 주목을 받는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에 실린 3.1운동 관련대표 48인의 얼굴

     

    감옥에서 이들 민족대표들은 의연하게 수감생활을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고문과 협박에 부끄러운 행보를 보인 사람도 있었으니, 어떤 자는 사형 가능한 내란죄를 적용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벌벌 떨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만해는 공포에 떨며 비굴함을 보인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갈과 함께 인분(人糞) 세례를 퍼부었다.

     

    "그대들이 정녕 민족대표란 말인가? 우리 민족대표가 이처럼 공포에 떨거나 배반적 행동을 한다면 그대들을 따르는 우리 민중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한용운은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끝난 후, 만일 피체되어 감옥에 갈 경우 아래와 같이 하자고 동지들에게 다짐했는데, 그는 정말로 이와 같이 행동했고 그렇지 않은 자는 꾸짖었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받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한용운의 성깔 드러나는 서대문형무소 머그샷
    하지만 고개를 숙인 건 반항의 표시가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일본군의 끄나풀로 오인한 조선인 청년에게 얼굴에 총을 맞은 후 의지와 무관하게 머리가 저절로 흔들리는 '체머리' 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들 민족대표들을 중형으로 처벌하고 싶었지만 그럴 경우 다시  민심에 불을 지를 수 있다는 판단에 생각보다는 낮은 형량이 부과되었다. 그리고 이때 3년의 형기를 채우고 나온 만해는 거물이 돼 있었으니 그의 출옥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석방된 후에도 만해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이어갔으니, 1922년부터 거국적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설립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민족자본 육성과 민족교육을 담당할 고등교육기관 건립을 위한 큰 행보를 디딘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1921. 12. 21. 출옥 보도기사 / '지옥에서 극락을 구(求)했노라'는 석방의 변(辯)이 당당하다. (이때도 눈빛은 장난 아니다)

     

    만해는 그야말로 만 석의 뜨거운 피와 열 말의 담력의 가진 자처럼 행동했다. 그는 1933년 55세 되던 해 백양사 벽산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두 칸짜리 집을 짓고 1944년 입적할 때까지 생활하며 항일 투쟁을 지속했는데,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두 번째 머그샷

     

    만해는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경성감옥(☞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만주에서 무장 독립투쟁 운동을 하다 붙잡혀 온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을 알게 된다. 김동삼은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북로군정서 김좌진의 청산리대첩 등을 지원한 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경성감옥으로 이감된 독립투사였다.

     

    김동삼은 이감된 이듬해인 1937년 4월 13일 만 59세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이름난 독립투사였던 까닭에 오히려 그 유명세에 시신을 거두려는 자가 없었다. 이때 만해가 홀로 찾아가 시신을 인도받은 후 통곡을 하며 메고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집 성북동 심우장에서 5일장의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에는 여운형, 조한영 조지훈(훗날 시인이 된) 부자, 홍명희, 방응모, 이병총, 이극로, 허헌 등이 참석했고, 만해는 또 한 번의 통곡 속에 일송의 뼈가루를 한강에 뿌렸다.

     

     

    일송 (一松) 김동삼(1878~1937)

    심우장의 김동삼 관련 표지판
    성북동 심우장

     

    만해는 또 1936년 2월 18일 만주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충북 청원 묘지에 묘비를 세워주었다. 만해는 오세창과 더불어 기념비까지 세우려 비문을 썼으나(글씨는 오세창이 쓰기로 했다) 일본 경찰의 극심한 견제에 결국 묘비만을 세웠다. 아울러 만해는 신병우, 박광, 최범술 등과 함께 단재의 역사 유고(遺稿)  <조산상고사>와 <상고문화사>를 간행하려 했으나 역시 일제의 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단재 (丹齋) 신채호(1880~1936)

     

    만해는 말년에 심우장에 머물며 시작(詩作)과 더불어 <흑풍>, <후회>, <박명(薄命)> 등의 소설을 집필했다. 그중 1935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흑풍>은 조선이 무대가 아니라 청나라 말기의 혼란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혁명'을 주제로 한 인간 삼라만상을 그렸다. 만해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배경을 청나라로 삼으면서도 억압에 대한 투쟁 및 여성해방문제를 테마로써 민중을 계몽했다.  

     

    그는 원고료로 힘겹게 생활하면서도 여러 장소에서 무료 강연을 하였는데, 그중에서 일제에 아첨하고 협력해온 조선 31본산 사찰 주지들을 향해 일갈한 연설은 매우 유명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학비에 보태 쓰라며 없는 돈을 털어주었고 자신은 배고픔과 냉골에 떨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공습경보의 사이렌이 심하게 울리던 밤의 다음날 새벽, 그 소음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로 들었다. 해방을 일 년 삼 개월을  앞둔 1944년 5월 8일이었다. 그는 정말로 마이웨이(MY Way)를 걸었다. 끝으로 <님의 침묵>에 실린 '나의 길'이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

    강가에서 낚시 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욱을 냅니다.

    ​​

    들에서 나물캐는 여자는

    방초를 밟습니다.

    ​​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쫓아갑니다.

    ​​

    의있는 사람은

    옳은일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노을을 밟습니다.

    ​​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 밖에 없습니다.

    ​​

    하나는 님의 품의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1926년 발행된 <님의 침묵> 초판본
    심우장 입구 만해가 심은 향나무
    심우장에 걸린 글
    서울시의 안내문
    입구에서 본 심우장
    심우장 안내문
    만해가 출가했던 백담사의 흉상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 / 충남영상위원회 사진
    망우리문화역사공원 만해의 묘 / 만해는 미아리 개인 화장장에서 다비되었고 소골(燒骨)되지 않은 치아와 함께 망우리에 묻혔다. 왼쪽은 1965년 사망한 부인 유숙원의 묘이다.
    무덤 입구의 표석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